탈세계화와 글로벌 공급망 변화
21세기 초반, 세계화(globalization)가 경제 지형을 뒤바꿔 놓을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글로벌 공급망은 국가 간의 경제적 연결고리를 강화하며 효율성을 극대화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글로벌 공급망의 효율성을 두고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긴장, 기후 변화, 그리고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확산은 세계화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있는 주요 원인으로 꼽힙니다. 이런 변화는 단지 세계 경제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일상경제와 직결된 중요한 화두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탈세계화(deglobalization)'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이는 세계적인 석학 클라우스 리히터(Klaus Richter) 박사가 2026년 3월 Project Syndicate에 기고한 'Deglobalization's Discontents: Rethinking Resilience in Supply Chains(탈세계화의 불만: 공급망 회복탄력성 재고)'라는 제목의 칼럼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는 효율성 중심의 세계화가 지정학적 불안정, 환경 지속 가능성, 기술 주권 등의 문제를 제대로 예상하지 못한 채 달려왔다고 진단합니다.
리히터 박사는 "과거 수십 년간 글로벌 공급망은 비용 최소화라는 단일 목표에 최적화되어 왔지만, 이제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며, "단순한 효율성을 넘어 지정학적 안정성, 환경 지속 가능성, 기술 주권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에 따라, 기업과 국가들은 '리쇼어링(reshoring)'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전략을 내세우며 새로운 경제적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과학법(CHIPS Act)을 통해 자국 내 첨단 제조업 육성에 나섰고, 유럽연합도 2023년 유럽칩법(European Chips Act)을 발효하며 반도체 자급률 20%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 자동차, 혹은 가전제품의 가격과 공급에도 직접적인 파장을 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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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에서 복잡한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경제 구조를 구축해왔습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5년 기준 한국의 수출 의존도(명목 GDP 대비 상품 수출 비중)는 약 42.3%로, OECD 주요국 중 최상위권에 속합니다. 특히 반도체와 자동차 산업은 수출 의존도가 높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 통계에 따르면 2025년 반도체 수출액은 약 1,520억 달러로 전체 수출의 24.1%를 차지했으며, 자동차 및 부품은 약 980억 달러로 15.5%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미·중 갈등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지정학적 요인은 한국 경제가 직면한 취약성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에너지 자급률은 약 17.8%에 불과하며, 석유와 천연가스의 경우 수입 의존도가 각각 99.7%와 98.9%에 달합니다.
이러한 높은 수입 의존도는 에너지 가격 변동성에 민감한 이유가 되며, 이는 곧 기업과 소비자 모두의 부담으로 돌아옵니다. 2025년 말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 고조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95달러를 넘어섰을 때, 국내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850원까지 치솟으며 소비자 물가에 직격탄을 날린 바 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일부 한국 기업들은 리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 전략을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리쇼어링'은 제품 생산을 해외에서 국내로 다시 이전하는 과정으로, 이는 생산 비용 증가와 함께 국내 일자리 창출이라는 이중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삼성전자는 2024년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장 건설을 시작했으며, SK하이닉스도 2025년 인디애나주에 첨단 패키징 공장 건립을 발표했습니다. 국내에서도 2023년 제정된 'K-반도체 전략'에 따라 경기도 용인과 평택 일대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 진행 중입니다.
한국 경제의 잠재적 위험과 기회
동시에, '프렌드쇼어링'은 신뢰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와 연계를 통해 공급망 안정성을 높이는 전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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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한국이 동남아시아 및 미국과 경제 동맹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이러한 변화의 일환입니다. 한국은 2022년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했으며, 2024년에는 베트남, 인도네시아와의 공급망 협력 MOU를 체결했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각각 전기차 생산기지 구축을 발표하며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줄이면서도 글로벌 경제에 대한 의존도를 균형 있게 형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에도 단점이 존재합니다.
리쇼어링은 국내 생산기반 재편과 작업장 자동화 도입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이는 단기적으로 제조비 상승을 야기합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2025년 연구에 따르면, 반도체 생산을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전할 경우 인건비와 운영비가 평균 23~28%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또한, 프렌드쇼어링의 경우, 국가 간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고 하지만 입장 및 관점이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이 장기화되거나 제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리히터 박사는 "리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이 특정 위험에 대한 탄력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비효율성과 예상치 못한 취약성을 초래할 수 있다"며 "비용 효율성만을 강조하다가 생존과 번영을 위한 다른 요소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이준혁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경제는 그 어느 나라보다 글로벌 공급망에 깊이 의존하고 있어, 탈세계화 흐름은 위기이자 기회"라며 "이 전환기에 디지털 전환과 첨단 기술 역량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2024년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을 개정해 반도체, 이차전지, 바이오 등 12대 전략기술 분야에 대한 세제 혜택을 확대했으며, 2026년까지 총 550조 원 규모의 민관 투자를 유치한다는 계획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위기적 상황을 경험 중입니다. 바로 기후 변화입니다.
리히터 박사는 "기존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강력한 환경 규제를 도입하지 않으면, 글로벌 공급망 역시 지속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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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우, 2020년 선언한 '2050 탄소중립' 목표와 2023년 발표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과 같은 환경 관련 정책이 산업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환경부에 따르면 2030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해야 하며, 이는 제조업 중심의 한국 경제에 상당한 구조 조정을 요구합니다. 친환경 에너지나 소재에 대한 투자 확대는 일자리 창출과 제품 비용 상승이라는 양면성을 지닙니다.
예를 들어 전기차 시장 확대를 위해 리튬과 니켈 같은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2025년 기준 한국은 리튬의 84%, 니켈의 73%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이 중국을 경유합니다.
LG에너지솔루션과 포스코홀딩스는 이러한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2024년 호주, 캐나다와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했으며, 2025년에는 아르헨티나 리튬 광산에 직접 투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원의 확보는 지정학적 리스크와 높은 초기 투자 비용을 동반합니다.
유럽연합이 2023년 도입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한국 수출 기업에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제시합니다. 산업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CBAM이 본격 시행되는 2026년부터 한국의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등 주요 수출품목이 연간 약 1.2조 원의 추가 비용을 부담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포스코는 이에 대응해 2025년 세계 최초로 수소환원제철 파일럿 플랜트를 가동하기 시작했으며,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20% 감축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지속가능성과 전략적 대응의 필요성
향후 한국은 탈세계화 흐름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국가 차원에서의 정책적 지원과 민간 기업의 공동 노력이 필요합니다. 디지털 전환과 산업 다각화를 통해 단순 제조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넘어 첨단 기술 산업 중심으로 변모해야 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혁신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25년 발표한 '국가 AI 전략'에 따르면, 2030년까지 AI 분야에 10조 원을 투자해 세계 3대 AI 강국으로 도약한다는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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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와 카카오는 이미 초거대 AI 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삼성전자도 차세대 AI 반도체 개발에 연간 5조 원 이상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용에 구애받지 않는 지속 가능한 공급망 구축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즉, 단기적인 효율성보다는 장기적인 안정성을 고려한 신중한 정책이 필요합니다. 리히터 박사는 "공급망의 다변화와 전략적 동맹 구축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강조합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의 조상현 수석연구원은 "탈세계화 시대에 한국이 택해야 할 길은 '선택적 세계화'"라며 "핵심 기술과 전략 자원에 대해서는 자립도를 높이되, 혁신과 시장 확대를 위한 글로벌 협력은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한국 수출 기업의 약 67%가 중소기업이지만, 이들은 대기업에 비해 공급망 재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정부는 2025년 '중소기업 공급망 안정화 지원 사업'을 통해 1.2조 원의 예산을 투입해 중소 수출 기업의 다변화 전략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원자재 구매 자금 지원, 해외 시장 개척 보조, 디지털 전환 컨설팅 등을 포함합니다.
결론적으로 탈세계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보입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2023년 세계 상품 무역 증가율은 0.8%에 그쳤고, 2024년에도 2.1%로 코로나19 이전 연평균 증가율(4.3%)에 크게 못 미쳤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6년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글로벌 경제 통합의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되고 있으며, 지역 블록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공급망의 재구성은 더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경제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발 빠르게 일어나기 위해 꾸준히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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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터 박사가 강조했듯이 "효율성에서 회복탄력성으로의 전환"이 핵심이며, 이는 단기적 비용 증가를 감수하더라도 장기적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투자입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질문은 그것입니다. "이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고, 어떤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정부, 기업, 그리고 국민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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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project-syndicat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