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모르는 사이 켜켜이 쌓이는 시간 속에서 캔버스 위에 타인을 향한 다정한 미소와 즐거움을 새겨 넣는 작가가 있다. The Imaginary Pocus가 [창간특집기획연재] 아티스트 아카이브 시리즈로 만난 열다섯 번째 주인공은 평범한 일상 속 파편들을 채집해 따뜻한 온기로 빚어내는 ‘즐거움’을 사랑한 아티스트, 서양화가 EJ은정 작가이다. 이번 아티스트 인터뷰는 치열하면서도 다정한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이 심층 인터뷰를 통해 작가의 진솔한 삶의 궤적과 철학을 세밀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의류직물학도에서 전업 작가로, 삶의 궤적을 캔버스에 기록하다
그의 붓질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주변에서 미술 전공을 권유받을 만큼 재능이 있었지만, “미술은 취미 미술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의류직물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실기가 없는 학과였음에도 감각은 숨겨지지 않았다. 스타일화 수업에서 의상의 주름과 자연스러운 포징을 그리며 스스로 인물화에 깊은 애정과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두 아이가 8살, 4살로 한참 힘들던 시절, 육아의 고단함은 좁은 베란다에서 다육이 키우기에 몰두하며 달랬다. “천 원짜리, 이천 원짜리 포트들을 사서 화분에 옮겨 심고… 나중에 보니 그해 여름과 가을 동안 100만 원도 넘게 샀더라고요(웃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제 우울증 치료제였어요”라고 회상한다. 무언가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 시간은 도돌이표 같은 육아의 일상으로 지친 작가에게 극복의 실마리이자 삶의 위로였다.
시간이 흘러 부모님의 병환과 아이들의 입시, 그리고 노화가 겹치며 지쳐갈 때쯤, 마침내 나만의 해방구로 꺼내 든 것이 그림이었다. 본격적인 예술 입문의 길에서 여러 재료를 탐구하던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감이 나오는 유화 작업에 정착했다.
단기간에 이뤄낸 7회의 개인전과 아트페어 릴레이, 평단과 대중을 매료시키다
단순한 치유의 도구로 시작되었던 그의 예술은 곧 평단과 대중의 인정을 동시에 받으며 무섭게 확장되었다. 2022년 <대한민국회화대전> 서양화 부문에서 작품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탄탄한 기본기를 입증했고, 같은 시기 <관악예술상점>에서는 '관객이 뽑은 작가상'을 수상하며 대중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전업 작가로서 보여준 행보는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2023년 12월 연우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장은정 그림전>을 시작으로, 은하갤러리, 인사동코트 조선살롱 등에서 단기간에 총 7회의 개인전을 연이어 개최하는 놀라운 작업량과 열정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포아트페어 선정 작가를 비롯해 뱅크아트페어, 인천아트쇼 등 굵직한 국내 주요 아트페어와 수많은 그룹전에 꾸준히 출품하며 미술 시장 내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현재의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그는 더 넓은 세상과 교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다가오는 3월 갤러리재재에서의 7번째 개인전을 마친 직후에도, 4월 뱅크아트페어(Bankartfair), 6월 울산아트페어, 그리고 7월 시애틀아트페어까지 쉴 틈 없는 국내외 일정을 앞두고 있다. 늦게 시작한 만큼 하루하루를 밀도 있게 채워나가는 그의 역동적인 활동 기록은, 그가 왜 지금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화가 중 한 명인지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세필 묘사와 캔버스 덧칠로 빚어낸 일상의 즐거움과 힐링 미술
그는 스스로를 기질적으로 우울감이 있는 사람이라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우울이 타인에게 전이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우울은 전염이 심해요. 어둡고 나쁜 그림을 보고 무거운 메시지를 읽고 나면 내 삶까지 우중충해져요. 그래서 행복하고 재밌는 부분을 부각시켜요”라는 확고한 예술 철학 아래 힐링 미술을 선사하고 있다.
가장 돋보이는 창작 과정은 섬세한 붓끝에 있다. 바탕을 거칠게 툭툭 칠하다가도 인물의 표정을 그릴 때만큼은 작은 붓에 온전히 집중한다. “나의 즐거움을 묘사하는 표정은 세필의 작은 움직임에서 나와요. 아주 작은 주름과 선, 눈동자에 찍힌 하얀 점 하나로 사람의 생기가 달라지거든요”라며 세필 묘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유화는 시간과의 싸움이기에, 작업실에는 바니쉬(마감재)를 칠하지 못한 미완성 작품들이 많다. 끊임없는 캔버스 덧칠은 사유의 흔적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일상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작년에 완성했다 생각한 그림도 다시 꺼내 보면 생각이 달라져 또 붓을 들게 돼요. 완전히 덮어버리거나 부분을 수정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때의 생각을 존중해서 아예 다른 캔버스에 다시 그려보기도 합니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과거 감정마저 다정하게 끌어안는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EJ은정의 시그니처, 정체성을 투영한 세 가지 이정표
작가의 예술적 궤적을 대변하는 대표작 3점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그의 세계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첫 번째는 교감의 기억을 안겨준 연작, <어둠 속에 빛처럼>과 <나에게로의 초대>이다. 물속을 헤엄치는 여자가 불안에서 안도의 웃음으로 변해가는 표정 변화를 담았는데, 어느 아트페어에서 한 관람객이 설명 없이도 이 감정선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분이 감상을 말해주는데 머리카락이 쭈뼛 솟는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어요. 내가 그림을 그릴 때 가졌던 생각들을 다 끄집어내 주니, 어… 이분 뭐지? 신내림이라도 받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웃음)”라며 그림 컬렉팅과 예술적 소통이 주는 짜릿한 희열을 전했다.
두 번째는 코로나19 시절의 간절함이 담긴 <우리, 다시>이다. 마스크를 벗고 식사하며 즐기지 못할 것 같았던 불안감을 이겨내고자 그린 그림이다. “불안했던 마스크를 지워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어요”라는 그의 말처럼, 일상이 회복된 지금 이 캔버스는 또 다른 덧칠을 고민하며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있다.
세 번째는 1년 넘게 걸려 완성한 <Swing? Swing!>이다. 실존하는 뉴올리언스의 스윙 재즈 밴드 영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제가 좋아하는 재미를 더하기 위해 뒷줄 갤러리들을 유명한 골프 선수들로 채웠어요. 얼굴과 최대한 닮게 그리느라 힘들었어요”라고 재치를 보인 이 대작은 다가오는 전시의 메인 작품이다.

취향을 고르는 즐거움, 갤러리재재에서 열리는 EJ아트편의점
3월 18일부터 23일까지 인사동 갤러리재재에서 7번째 개인전 <EJ 아트 편의점>이 열린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그에게 그림은 “일상의 파편들을 수집하여 포장하고 진열하는 과정”이다. 편의점 매대의 물건들이 누군가의 갈증을 달래주듯, 선글라스에 비친 왜곡된 풍경이나 시원한 물살 등 휘발되는 찰나를 캔버스에 담아 관객의 시각적 허기를 채워주고자 한다.
메인 진열대에는 <Swing? Swing!>이 자리하며, 그 주변 벽면으로는 현대인의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담은 작은 소품들이 조각조각 걸려 각자의 주인을 기다린다. 이처럼 '편의점'이라는 일상적 공간을 전시 테마로 삼은 배경에는 작가의 쿨하고 다정한 철학이 녹아 있다. “진정한 예술이라는 건 참 어려운 질문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게 결국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진정한 예술입니다.”
전시장 내내 상주하는 작가는 “예술은 어렵지 않아요. 가벼운 마음으로 취향을 골라보세요”라며 관객을 초대한다. 진열된 그림들 사이를 거닐다 내 마음을 건드리는 눈빛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 일상의 즐거움을 더할 3월의 어느 봄날 미술 전시 추천 목록으로 부족함이 없다.
상상의 힘으로 가치를 증명하다, 인물화로 던지는 출사표
기술이 상상도 못한 방향으로 세상을 뒤엎는 시대에 상상의 힘에 대한 작가의 시선도 명확하다. “앞으로 시장은 상상도 못한 방향으로 바뀌고 새로 나오고 엎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형태이든 가치를 인정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작가의 노력에 달린 거겠죠”라고 덤덤히 말한다.
4월 뱅크 아트페어를 비롯해 6월 울산, 7월 시애틀 아트페어 일정을 앞둔 그는 한국 미술 시장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한다. “우리나라 미술시장은 유행에 민감하고 투자에 목적을 두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인물화가 살아남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물화로 기억되는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며 진솔한 바람을 전했다.
동굴 벽화처럼 삶을 기록하며 나누는 따뜻한 연대
인터뷰 말미, 아직 삶의 예술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에게 그는 “아직도 찾고 있는 작가로서 조언보다는 함께 가자 손잡아드리고 싶네요”라며 위로를 대신했다.
“예술은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녜요. 동굴 벽화를 남기듯 내 삶이 그냥 녹아있고, 그걸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작가입니다. 어차피 해석은 나중에 동굴을 탐험하고 벽화를 발견한 사람들의 권리이자 몫이니까요”라고 덧붙인다.
스스로의 삶을 진솔하게 기록하며 기꺼이 누군가의 기쁨이 되기를 자처하는 작가. 그가 캔버스 위에 정성껏 흩뿌린 온기들이 앞으로 더 많은 관객의 일상을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아티스트 소개: EJ 은정 (장은정)]
의류직물학을 전공하며 인물화에 대한 재능을 발견했고, 삶의 지치는 순간들을 극복하고자 유화 붓을 잡았다. 기질적인 우울감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며, 세필 묘사와 끝없는 덧칠을 통해 사유를 확장하는 진지한 작업 방식이 특징이다. 2022년 대한민국회화대전 서양화 부문에서 작품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특선을 차지하고, 관악예술상점 '관객이 뽑은 작가상'을 수상했다. 총 7회의 개인전과 아트페어에 꾸준히 참여하며 입지를 다졌다. 다가오는 3월 18일 인사동 갤러리재재에서 열리는 개인전 <EJ 아트 편의점>을 시작으로 4월 뱅크 아트페어, 6월 울산아트페어, 7월 시애틀 아트페어 등 활발한 활동을 앞두고 있다. 현재 인스타그램(@eddie9151_kr)을 통해 대중과 소통 중이며, 일상에 기쁨의 파편을 선물하는 '인물화로 기억되는 작가'가 되기 위해 매일 캔버스 앞에 선다.
[3월 개인전 상세 정보]
전시명: 7th 개인전 <EJ 아트 편의점 (EJ's Art Convenience store)>
전시 기간: 2026년 3월 18일 ~ 2026년 3월 23일
전시 장소: 인사동 갤러리재재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5-2 1층)
관람 시간: OPEN 10:00 ~ CLOSE 19:00
관전 포인트: 전시 기간 내내 작가가 전일 상주하며 관객과 소통 예정
[The Pocus Archive: 아티스트 아카이브 – OO을 사랑한 아티스트]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결국 인간의 마음과 상상의 힘에 있다. 본지 The Imaginary Pocus는 창간을 맞이하여 기술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과 상상 세계를 지켜가는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 [OO을 사랑한 아티스트]를 선보인다. The Pocus Archive는 앞으로도 자신만의 가치를 사랑하며 자신의 원하는 미래를 실현하는 아티스트들을 엄선하여 기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