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중해의 진주라 불리던 레바논이 비명과 화염 속에 잠겨 있다. 푸른 바다의 낭만이 깃들어야 할 베이루트 하늘에는 이제 검은 연기와 드론의 기계음만이 가득하다. 2026년 3월, 레바논 정부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국제 사회를 향해 전례 없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국가 존망의 갈림길에서 터져 나온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이스라엘과의 직접 협상이라는 파격적인 카드와, 자국 내 무장 세력 헤즈볼라를 향한 ‘배신’이라는 날 선 비판은 중동의 지정학적 지도를 다시 그리게 만들고 있다.
국가의 심장을 겨눈 두 개의 창, 왜 지금인가?
레바논이 이토록 극단적인 선택을 한 배경에는 이란의 대리인으로 전락한 헤즈볼라의 독단적인 행보가 자리한다. 2024년 휴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이란과 이스라엘의 직접 충돌 이후, 헤즈볼라는 레바논 정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스라엘 북부를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이 결정은 레바논이라는 국가의 운명을 헤즈볼라라는 한 무장 단체의 손에 맡겨버린 셈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기다렸다는 듯 대규모 보복 공세에 나섰다. 남부 국경 지역부터 베이루트 외곽, 베카 계곡까지 이어지는 파상 공세는 헤즈볼라의 섬멸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레바논의 무고한 시민들이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 레바논 정부는 헤즈볼라의 무력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킬 군사적 힘이 없다. 결국 아운 대통령은 국제 사회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과 직접 머리를 맞대는 ‘정면 돌파’만이 레바논의 숨통을 틔울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아운 대통령의 고발
조셉 아운 레바논 대통령은 지난 월요일, 유럽연합(EU) 관료들과의 화상 회의에서 격정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는 헤즈볼라를 향해 “레바논의 이익이나 국민의 생명에는 안중에도 없는 무장 파벌”이라고 규정하며, 이들이 이란 정권의 계산을 위해 레바논을 혼란과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넣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국가의 공식 군대가 아닌 사적 무장 세력이 국가 전체를 전쟁의 참화로 끌어들인 것에 대한 분노다.
아울러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전쟁법과 국제법을 무시하며 레바논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400여 명이 사망하고 60만 명이 넘는 피란민이 발생한 참혹한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아운 대통령의 제안은 구체적이다. 국제 사회의 보증 아래 즉각적인 휴전을 하고, 레바논 정규군이 남부에 배치되어 헤즈볼라의 무장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이스라엘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하라는 ‘평화 로드맵’이다.
엇갈리는 냉소와 기대, 베이루트의 시계는 멈췄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 이스라엘 카츠는 “후퇴는 없다. 지금은 헤즈볼라를 타격할 기회”라며 공세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스라엘 군부는 외교적 수사보다는 실질적인 ‘무장 해제’가 선행되지 않는 한 협상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텔아비브 대학의 에얄 지서 교수는 아운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통제력을 상실한 지도자의 비명”이라며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의 조셉 바후트 소장 역시 레바논 정부의 무력함을 꼬집었다. 헤즈볼라를 무력으로 제압할 실질적인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내놓은 협상안이 과연 이스라엘의 공격을 멈출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EU의 카야 칼라스 외교수장은 “외교만이 레바논이 혼돈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기회”라고 강조하며 국제 사회의 개입을 촉구했지만, 현장의 총성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너진 담장 아래서 피어나는 평화를 향한 질문
이 글을 정리하며 베이루트의 어느 무너진 골목길을 떠올린다. 국가라는 울타리가 보호해 주지 못하는 삶, 그 안에서 국민은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헤즈볼라는 저항을 외치지만 그 저항의 대가는 가난한 서민들의 집과 목숨으로 치러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안보를 말하지만, 그 안보는 타국의 어린 생명들을 앗아가며 세워지고 있다.
아운 대통령의 이번 선언은 어쩌면 세계를 향한 가장 솔직한 고백일지 모른다. “우리는 더 이상 이 거대한 괴물들의 싸움터가 되고 싶지 않다”라는 절규 말이다. 중동의 복잡한 방정식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늘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아이를 안고 우는 어머니에게 이념이나 종교, 지정학적 승리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레바논의 이 비극적인 드라마가 종막을 고하기 위해서는, 총구 뒤에 숨은 정치적 계산이 아닌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국제 사회의 논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