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세계인의 날, 278만 이웃 앞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한 가지

세계 시민, 여권이 아니라 마음의 국경 문제다

세계인의 날에 다시 묻다, 나는 환대받기 위해 사는가 환대하기 위해 사는가

오늘, 당신 마음의 국경은 누구의 발끝에서 멈춰 서 있는가

▲ AI 이미지,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제공

5월의 마지막 햇살이 길어지는 어느 화요일, 인천공항 제1터미널에는 늘 그렇듯 낯선 언어들이 부드럽게 흘러 다닌다. 베트남 청년의 가방에서 떨어진 라이스페이퍼 한 묶음,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어머니가 손녀에게 건네는 호두빵, 태국 여성이 두 손에 꼭 쥔 부적과 한국어 입국 신고서 한 장. 그 작은 풍경들이 모여 오늘 우리가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거대한 그림이 된다. 5월 20일, 세계인의 날은 바로 그 이름의 다른 얼굴을 비추는 정직한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 서면 누구도 그저 외국인이 아니다.

 

이 기념일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아니다. 2007년 「재한외국인 처우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같은 해 5월 20일이 법정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본래 유엔이 정한 '세계 문화 다양성의 날'은 5월 21일이지만, 이미 그날이 '부부의 날'로 지정되어 있었기에 하루 앞당겨졌다. 

 

그래서 우리는 5월 20일이라는 숫자 안에 두 개의 마음을 함께 담고 있는 셈이다.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세계의 약속, 그리고 한 가정의 작은 사랑을 지키자는 한국의 다짐. 같은 봄에 두 마음이 나란히 서 있다. 같은 날부터 한 주간은 '세계인 주간'으로 정해져, 법무부 주관 아래 전국 각지에서 문화 교류 행사가 이어진다.

 

법무부의 가장 최근 통계는 차갑지만, 분명한 진실을 일러 준다. 2025년 말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은 278만 명을 넘어섰고,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44%에 이른다. 중국과 베트남, 미국과 태국,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우리 동네 골목과 공장과 강의실에서 매일 숨 쉬고 있다. 유학생만 30만 명, 결혼이민자는 18만 명을 넘어선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한 사람이 짐을 싸고, 부모를 두고 떠나오고, 모국어를 잠시 접어 두고, 김치찌개와 아침 인사를 배우기 시작한 이야기의 총합이다. 통계 뒤에는 언제나 얼굴이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도 한때 떠나는 자였다. 1903년 갤릭호에 타고 하와이 사탕수수밭을 향한 102명의 조선인, 사할린의 탄광에서 돌아오지 못한 강제 동원 노동자, 1960년대 독일의 갱도와 병원에서 땀과 눈물로 송금을 만들어 보낸 광부와 간호사들. 우리는 그렇게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외국인이라는 이름을 입어 본 민족이다. 그 시린 기억이 우리 몸 어딘가에 분명히 새겨져 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외국인을 손님이 아닌 '불편한 이웃'으로 분류하는 데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 받았던 환대를 잊은 자만큼 위태로운 사람도 없다.

 

성경은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단호하게 말을 건넨다. 레위기 19장 34절은 이렇게 적는다.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인을 너희 본국인처럼 여기고 너희 자신처럼 사랑하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외국인으로 살았다."

 

여기서 핵심은 "너희도 외국인이었다"라는 회상이다. 환대는 우월한 자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같은 결의 아픔을 지나온 자의 자연스러운 응답이다. 히브리서 13장 2절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다.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외면한 어느 외국인의 등 뒤에 천사의 그림자가 머물고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불경에서도 성경처럼 "외국인(나그네)"이라는 단어를 직접 명시하여 환대를 명령하는 구절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불교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넓은 차원에서 '일체중생(一切衆生)에 대한 자비'를 가르치며, 그 안에 외국인·이방인이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불경 ‘자애경’ 1장 8절에는 "어떠한 생물일지라도, 약하거나 강하거나, 길거나 짧거나 중간치거나, 굵거나 가늘거나, 작거나 크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살고 있는 것이나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를 발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멀리 살고 있는 것"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방인·외국인·낯선 자에 대한 자비를 포괄한다.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한 것도 인상적이다. 성경 레위기 19장 34절이 "본국인처럼 여기라"라고 한 것과 가장 가까운 정서를 보인다.

꾸란 4장 36절에도 "알라를 경배하고 그분께 어떤 것도 비교하지 말며, 부모와 친척과 고아와 가난한 자와, 가까운 이웃과 먼 이웃과, 동반자와 나그네, 그리고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자들에게 선을 행하라. 진실로 알라께서는 거만하고 자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지 아니하시니라."라고 말한다.  

▲ AI 이미지,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제공

나는 오랜 시간 중동 땅에서 무슬림 형제·자매들 곁에서 살았다. 그 땅의 어느 좁은 골목, 어느 다리 아래의 카페, 그 땅의 흙냄새 나는 마당에서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한결같았다. "손님은 신이 보낸 사람이다." 그들에게 손님은 거절할 수 없는 신의 명령이었다. 빵을 나누고 차를 끓이고 침대를 양보하는 그 모습 앞에서, 오히려 나는 성경을 믿고 행하는 기독교인들이 사는 나라인 우리 대한민국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보다 무슬림들의 환대가 더 극진하거나 깊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복음을 가진 우리가 그 복음이 가르치는 '나그네 사랑'의 기본기조차 자주 잊고 있다는 자기 고백이다. 환대의 깊이는 신학의 두께가 아니라 손끝의 온기로 증명된다.

 

'세계 시민'이라는 말은 그래서 거창한 정치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식당 한쪽 구석에서 한국어가 서툰 청년에게 메뉴를 천천히 읽어 주는 일이며, 공장 안전 교육에서 영상 옆에 베트남어 자막을 함께 띄우는 작은 결정이다. 자녀의 반에 새로 들어온 우즈베키스탄 친구를 부모인 내가 먼저 이름으로 불러 주는 작은 용기이며, 주일 예배당 뒷자리에 앉은 낯선 얼굴에게 "어디서 오셨어요?"라는 질문 대신 "함께 점심 드실래요?"라고 말하는 따뜻한 손길이다. 세계 시민은 거대한 비행 노선표가 아니라, 식탁에 의자 하나를 더 놓는 마음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글을 적어가는 나는 한 가지 고백을 하고 싶다. 나도 한때 외국인의 얼굴이 낯설어 시선을 피한 적이 있다. 출입국 사무소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마음 한구석에 가벼운 한숨을 흘린 적이 있다. 그러나 매년 5월이 오고, 라일락 향이 창가에 머무는 이 계절이 되면 나는 다시 묻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두신 이유가, 혹시 멀리 떠나온 누군가에게 따뜻한 한 끼와 한 마디의 안부가 되어 주라는 부르심은 아니었을까. 

 

나는 환대받기 위해 태어났는가, 환대하기 위해 살아가는가. 마태복음 25장 35절의 그 음성,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영접하였다"라는 그 한 줄이 오늘따라 내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세계 시민은 여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국경을 어디에 그어 두는가의 문제이다.

작성 2026.05.20 13:49 수정 2026.05.2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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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