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도구를 중립적인 것으로 여긴다. 중요한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이제 하나의 상식처럼 통용된다. 기술 자체에는 선악이 없으며, 결국 문제는 인간의 선택과 태도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일면 우리를 안심시킨다. 도구가 무엇이든 그 책임과 영광은 온전히 우리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런 사유는 인간과 도구를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을 전제한다. 인간은 선택하는 주체이고 도구는 선택당하는 대상이라는 관점, 인간은 목적이고 도구는 수단이며, 인간은 능동적이고 도구는 수동적이라는 구도에서 가능한 발상이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발상에는 도구가 인간을 거꾸로 빚어내는 방식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다.
우리는 흔히 도구를 손에 쥔 물건 정도로 생각한다. 망치나 칼처럼 인간이 사용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대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현대의 도구는 더 이상 그런 물건이 아니다. 요즘 스마트폰을 단순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이가 있긴 한 것인가. 이것들은 이미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이자 조건이며,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조직하는 장치가 되었다. 우리가 도구를 쓰는 동안, 도구도 말없이 우리를 빚어간다.
사실 도구가 인간을 만든다는 통찰은 새롭지 않다. 문자와 인쇄술, 시계와 철도,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모두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도구가 중립적이라는 믿음이야말로 도구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가장 오래된 착시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는 도구관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기능주의적 인간 이해에 대해 우려한다. 기능주의는 인간과 사물을 모두 효용의 언어로 이해한다. 무엇이든 무엇에 쓰이는가로 설명된다. 중요한 것은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고 관계가 아니라 활용이다. 능력주의가 기능주의의 사회적 형태라면, 도구의 중립성이라는 믿음은 기능주의의 기술철학적 형태인지도 모른다. 둘은 한 뿌리에서 나온 쌍생아다. 인간을 쓰임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사유이다.
그러나 기능주의가 놓치는 것이 있다.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그렇게 하게 되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다. 기능주의는 행위를 설명하지만,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위치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응답한다.
나는 인간성을 고정된 본질로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인간다움의 의미는 달라져 왔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인간은 완성된 실체라기보다 끊임없이 형성되는 존재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성이 기술에 의해 비로소 발견되는 잠재력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인간성은 광맥처럼 우리 안에 묻혀 있다가 좋은 도구가 와서 캐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환경 속에서 형성되며,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인간성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발현에는 언제나 그것을 호출하는 위치가 있다.
나는 이것을 위치성(position)이라 부른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위치에 놓여 있고, 동시에 그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위치성은 내가 보여지는 자리이면서 내가 보는 자리다. 세상이 나를 배치하는 좌표이면서, 내 사유가 출발하는 발판이다. 인간성이 위치성에서 발현된다는 말은 두 겹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어떤 위치에 놓임으로써 특정한 인간이 되고, 동시에 그 위치에서부터 세계를 해석하고 응답하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도구를 다시 보게 된다. 만약 인간성이 위치성에서 발현된다면, 도구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도구가 바로 그 위치를 조직하기 때문이다. 도구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에 반응하며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곧 우리가 세계와 마주 서는 위치 자체를 다시 짜놓는다. 도구가 중립적이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위치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위치를 설계하고, 누군가는 거기에 놓인다. 위치를 짓는 자와 위치에 서는 자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권력이 발생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위치성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합의한 적 없는 설계의 산물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반응하도록 배치된 위치에,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최적화된 위치에 던져진 채 살아간다. 그 위치를 만든 의사결정에 우리는 참여한 바가 없다.
도구의 중립성이라는 믿음이 위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위치를 설계한 권력을 비가시화하고, 모든 책임을 그 위치에 놓인 개인에게 되돌려 보낸다. 더 현명해지라고, 더 절제하라고, 더 책임지라고 말하지만 정작 왜 그런 위치가 만들어졌는지는 묻지 않는다. 의지를 가지라는 훈계가 끝내 공허한 것은 그래서이다.
위치성을 다시 묻는 일은 결국 정치적 물음이다. 누가 우리의 위치를 설계하는가. 그 설계는 어떤 가치를 향하고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우리는 그 설계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 인간성이 위치성에서 발현된다는 명제는 우리가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위치를 우리 손으로 다시 구성할 수 있고, 또 구성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우리가 놓인 위치는 세계를 사유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기에, 그 위치를 묻는 일은 곧 우리 사유의 조건 자체를 우리 손에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는 위치를 만들고, 위치는 다시 인간을 만든다. 도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손에 들린 물건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조직한다. 결국 문제는 도구가 아니다. 누가 우리의 위치를 설계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설계에 참여하고 있는가. 인간성은 그 물음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비로소 발현된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