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로 위에서 종종 타인의 삶을 스쳐 읽는다. 얼굴도, 목소리도 아닌 한 줄의 문장이다. 앞차의 뒷유리에 붙은 작은 스티커, “아이 먼저 구해 주세요.” 짧은 문장이지만 그보다 긴 여운을 남긴다. 교통신호가 바뀌고 앞차가 출발한 뒤에도 금방 지워지지 않는다.
한때 도로 위에 나선 차량의 언어는 단순했다. “초보운전”이라는 네 글자는 기술의 미숙을 알리는 표식으로 길 위의 다른 운전자들에게 여유와 배려를 구하는 무언의 신호였다. 오늘날의 문장은 훨씬 감정적이고 존재론적이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에서 “까칠한 아이가 타고 있어요”로 진화한 문구들은 운전자의 삶과 관계의 중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세계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이’가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가 무엇을 최우선 순위로 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와도 같다. 특히 “아이 먼저 구해 주세요”라는 문장은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운전자의 절박한 외침이다. 혹시 모를 사고, 생사의 경계에서 부딪힐 선택의 순간조차 부모인 운전자는 자신보다 어린 자녀를 먼저 호명한다. 이는 일종의 윤리적 선언으로 나보다 아이가 먼저라는 본능에 가까운 결단이 아닐 수 없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방향 지시등을 켠 질문 하나가 마음속으로 끼어든다. 왜 우리는 “부모님 먼저 구해 주세요”라는 문장을 도로 위에서 만난 적이 없는 걸까. 그것은 그 돌발 상황조차 비윤리적이기 때문일까, 혹은 그런 상황 자체를 상상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부모 역시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임은 분명하다.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한 사람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그러나 부모라는 이름은 종종 그 개별성을 탈색시킨다. 아이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순간, 부모는 서서히 배경으로 물러난다. 도로 위의 스티커는 그 축소된 부모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부모의 사랑은 숭고하지만, 필연적으로 '자기 소거'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아이 먼저”라는 문장은 내리사랑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자기 존재를 기꺼이 후순위로 미루겠다는 다짐이다. 부모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지워내는 존재가 된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이 일방적인 양보는 아무런 맺힘 없이 자연스러운 미덕으로 간주하곤 한다.
과연 그래야만 할까. “함께 살아남고 싶다”는 말은 이기적인 걸까, 아니면 너무나 인간적인 진심일까. 어쩌면 우리는 부모에게 지나치게 일방적인 역할만을 요구해 온 것은 아닐까. 헌신과 희생만으로 정의되는 존재, 자신의 욕망과 생존을 늘 뒤로 미루는 존재로서의 부모라는 이미지가 너무나 당연해진 우리는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기조차 두려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새 스티커를 상상해 본다. “부모님을 지켜 주세요”라는 문장이 도로 위에 등장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맞이할까. 필시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의심 없이 박제한 관계의 질서를 흔들지도 모른다. 반면, 부모 역시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임을, 지워지지 않아야 할 고유한 이름임을 환기할지도 모른다.
차창에 붙은 작은 스티커에는 시대의 윤리와 감정 구조가 압축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스쳐 읽으며 우리 사회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침묵하는지를 엿본다. 그에 따른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사라지는 목소리들을 상상한다.
부모는 언제나 아이의 이름을 먼저 올린다. 그 뒤에는 지워진 이름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오늘은 가만히 그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 도로 위의 비보호 좌회전 같은 질문을 깜박이는 것도 좋겠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