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옥천 환산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시인이 '향수'에서 그려낸 고향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

10월의 뙤약볕 아래에 충북 옥천의 환산(고리산)에는 나무들의 풍성한 초록이 눈부시다. 산허리로 뻗힌 대청호수에는 나무들 푸른 그림자가 너울거린다. 호수가 길을 따르고 그 길의 끝에 옥천이 자랑하는 부소담악이 있다.

 

옥천은 금강이 구절양장처럼 흐르는 고장으로,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기도 하다. 정지용의 꿈결 같은 고향 생각이 절로 나는 '향수'를 찾아 산행버스는 경부고속도로 대전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시내를 지난 후 군북면사무소 앞 굴다리를 건너 환산 들머리인 이백리 황골말에 산객을 내려놓는다.


환산 등산 안내도. 오늘 산행코스는 황골말-1보루-봉수대-3보루-4보루-삼각봉-정상(581m, 5보루)-성인봉-추소리 황룡사-부소담악 구간으로, 총 거리 9km에 4시간 정도 소요된다.


들머리 황골말에서 시작된 산오름은 아직 늦여름의 잔열이 숲속에 가득하여 땀을 한참 쏟아내어야 한다. 30분 정도 가파른 비탈길을 치고 오르면 능선이 나타나고 1보루가 나온다.


1보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충남 최고봉인 금산의 서대산이 보인다. 보루는 전투 지휘소여서 전망이 좋을 수밖에 없다.

능선을 따라 정상 쪽으로 가면 환산성 3보루가 나온다. 554년 백제 성왕의 태자 여창 휘하의 백제군은 신라 장수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과 관산성 전투를 벌인다. 관산성에서 패한 여창은 이곳 환산성에서 병력을 재정비하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

 

가뭄에 대청호 수위가 낮아지면, 부소머리와 추동을 잇고 있던 세월교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고 하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환산성 4보루는 정상까지 가는 동안 대청호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그렇지만 대청호는 지금 녹조에 덮여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발아래로 보이는 소옥천은 대청호가 생기면서 물줄기가 줄어들었고, 옛날에 모래밭이 반짝였다는 천변은 지금은 푸른 초원이다. 백로 몇 마리가 얕은 물속을 거닐고, 좁은 물길 너머 머리가 무성한 바위산이 펼쳐져 있다.

 

댐이 들어서기 전, 산줄기가 길게 뻗어나간 그곳에 산줄기를 휘돌아 하천이 흘렀다. 산 아래 천변에는 마을이 있었고, 사람들은 밭을 일구며 살았다. 하천이 호수가 되자 마을은 물에 잠기었고, 일구던 밭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새로이 터를 잡았다. 산은 높아 여전히 하늘에 있지만, 그 옛날 물길이 휘돌던 풍경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정상 부근으로 갈수록 산성 터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무너지고 부서진 성곽 길을 따라서 눈은 대청호 물길 따라 걷는다. 산꼭대기 위로는 땡볕이 이글거린다. 하지만 푸른 그늘이 내린 산길은 차라리 서늘하다. 이곳에서 성을 쌓고, 목숨 걸고 싸운 백제 민초들의 고단했던 삶을 생각하니 그저 숙연할 따름이다.

능선의 산길에는 1,500년 전 이곳에서 전사한 백제군과 가야군, 그리고 바다를 건너온 왜군 등 백제 연합군 3만 명의 한이 곳곳에 서려있다.


신라 장수 김무력에게 관산성(管山城)을 탈취당한 백제 성왕의 아들 여창이 이곳에서 성을 쌓아 재건을 도모하려다 과로로 쓰러진다. 당시 고리산에서 20km 떨어진 성치산성에 있던 성왕은 태자 여창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하자 아들을 위로하러 50명의 기병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다가 매복한 신라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한다. 성왕의 죽음으로 순식간에 전세는 급반전되어 백제군은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고, 백제는 나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일국의 군주지만 아비로서 자식을 걱정하는 자애로움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으니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정상 부근의 환산성터. 백제와 신라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정상(581m)의 표지석. 환산성 제5보루이기도 이곳은 백제가 축조했던 총 6개 보루 가운데 통괄지휘본부 역할을 한 곳이다. 산은 환산(環山) 또는 고리산(古利山)이라고 불리는데, 산정에 서면 아흔 아홉 봉우리가 고리를 이루고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을 뒤로 하고 부소머리 추소리 마을 쪽으로 내려선다. 가을을 배달하는 10월의 햇살은 아직도 까칠하고, 마을로 내려가는 하산 길도 만만찮은 내리막이다.

 

성인봉 중턱에 서면 그 장쾌함에 눈이 호강한다. 준봉 사이를 S자로 휘어지며 흐르는 물길. 그리고 그 가운데로 뻗어있는 능선이 거대한 용의 움직임처럼 느릿하게 꿈틀댄다. 동쪽으로는 소옥천이 감아 도는 추소리마을과 그 너머로 첩첩이 쌓인 옥천의 산줄기들이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 멀리 대청호가 눈에 잡힌다. 소옥천 물길을 눈길 따라 가면 커다란 호랑이가 물가에 엎드려 있는 듯한 부소담악의 자태가 도드라진다.

 

성인봉은 가을이 되면 추소리의 새벽 물안개를 찍기 위해 사진 애호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가파른 산길을 한참을 내려오면 추소리 서낭당으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황룡사까지 마지막 경사길이 남아 있다. 이 길은 오르막보다 더 힘들다.

 

이윽고 산행 날머리인 추소리 황룡사에 도착한다.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에 있는 절이다 보니 나라 주인이 바뀌면 그때마다 절 이름도 바뀌었다고 한다.

 

추소리 마을은 1979년 대청댐이 만들어지면서 추동은 사라졌고, 부소머리의 일부가 물에 잠겼다. 현재는 절골과 부소머리, 서낭당이 추소리를 이루고 있다.

 

 

추소리 마을 입구에는 부소담악 가는 안내판이 서 있다.

 

추소리에서 부소담악 가는 코스모스 길은 폭신한 흙길이고 옆길은 나무 데크 길이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가끔씩 발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야생화들의 자태도 즐길 만 하다. 미동 없는 수면을 가르는 물새들의 교태와 멋들어진 물가의 조화가 아름답다. 가을날이 그려놓은 수채화는 이렇듯 곱디곱다.

추소리 마을 서낭재에서 소옥천을 따라 부소담악으로 가는 이 길은 대청호 500리의 일부 구간이기도 하다.
추소리 마을에도 가을이 익어간다. 아늑한 솔숲에 에워싸인 추소정에 올라 물길 너머 시골마을도 음미하고 청명한 바람도 맞이한다.

추소정에서 바라본 길게 뻗은 부소담악은 열 지어 나아가는 병사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비 20m, 높이 40~90m의 능선이 물길 복판으로 약 700m나 뻗어있다. 머리에 숲을 이고 밑동에 기암을 드러낸 좁고 긴긴 산이다.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지만 백제 성왕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다.

소옥천은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곳' 가운데 한 곳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부소담악에서 추소정을 지나 추소리 마을로 들어서는 길은 정지용의 시 '향수'가 입안에서 저절로 흥얼대는 그런 길이다. 정지용이 태어나고 자란 보청천이 아닌 소옥천이지만 이 길도 '향수'에서 그려낸 고향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다.

 

소옥천 들녘에는 얼룩빼기 황소가 금방이라도 나와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0.07 17:37 수정 2018.10.1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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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데이님 (2018.10.16 01:33) 
[여계봉의 산정천리] 옥천 환산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코스미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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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미님 (2018.10.11 19:28) 
멋집니다
정말 정지용의 시 향수가 떠오르는 글이네요 멋진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다음 산행기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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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님 (2018.10.10 19:22) 
멋진글
글을읽고 몰랐던스토리에대해 알게되었네요^^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다음에도 좋은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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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녀님 (2018.10.09 07:25) 
고리산
집근처여서 자주 가는 산인데 이런 역사가 담긴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1,500년전 역사를 되새기면서 산행해야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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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조아님 (2018.10.07 21:24) 
환산
스토리있는 산행기. 백제 성왕과 시인 정지용..너무 재미있습니다. 다음 기사가 너무 기대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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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j0226님 (2018.10.07 21:19) 
고리
우리 고향 옥천은 정지용시인 향수를 떠올리는 마을이죠. 근데 고리산이 삼국시대 격전지였다는 것은 처음 알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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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