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하루] 은비령엔 그가 산다

시인 전승선

사진=코스미안뉴스



은비령엔 그가 산다


산은 길을 덮었다.

푸른 안개가 계절에 옷을 입히면

숲이 열리는 소리에

내려와 잠든 별들이 달아나 버린다.  

빈 가방 속에 숨어 나를 따라온

슬픔의 언어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숲속에 숨는다.

가지마다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에

인연의 옷이 하나하나 벗겨지고

몸 속 감옥 담장이 허물어진다.


하얀 마음을 손수건처럼 펼쳐 논 산기슭에

그의 눈물이 이슬처럼 내리고

산과 산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의 미명에 나는 묻혀버리고 만다.

낡은 세상에 이름만 남겨두고

먼지 쌓인 세월을 털어내며 떠나온 길

계곡은 깊어 삶을 잊기에 알맞다.

낯선 울음소리에 깨어난 숲이

먼산의 어깨를 흔들면

마지막 아침이 오늘이라 해도 좋겠다.


아파할 사랑 없는 생애가 부끄러울 뿐

시들시들 말라가는 시간의 저편을 떠나보내고

남루함 덮어줄 그리움마저 묻어버린다.

이제 불타는 숲의 산문을 걸어 잠그고

은비령의 그가 부르는 바람의 노래를

마저 부르리라.


편집부 기자
작성 2021.04.22 07:51 수정 2021.04.2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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