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충성가

정명 기자

작성 2018.08.04 13:07 수정 2018.11.14 16:19
충성가 

 

대중가요가 유구하면 애창곡(愛唱曲)이 되고, 저항가요가 세대를 거치는 맥락(脈絡)으로 이어가면 절창곡(絶唱曲)이 된다. 이 노래를 단순 군국가(軍國歌)로 보는 곁눈질을 했다면, 눈동자를 정면으로 고정시키고 다시 바라보라. 민족의 절창이다. ‘초로가·독립군 양양가로도 불려지던, 작사 작곡가 불명의 이 노래 속에는 민족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남명 조식 선생이 주창하셨던 목숨을 내 건 나라사랑의 맥박이 뛰고 있다.  

 

을사늑약·고종양위·헤이그 밀사사건의 연장선에서 조선통감부로부터 해체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의 결기가 살아 있다. 이 노래는 그때로부터 이어진다. 만주벌판과 간도의 산자락, 충칭의 갈피 진 언덕 초막에서 독립군가·광복군가로, 해방광복과 건국 후에는 국방경비대가로, 6.25전쟁 중 학도의용군가로 진화(進化), 승화(承華)된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 이씨조선 오백년 양양하도다 /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 ~ 이슬 같이 죽겠노라 // 이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 고려 사적지는 양양하도다 /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 이조 오백년은 양양하도다 /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 ~ 이슬같이 사라지리라’(자료 편집)  

https://youtu.be/hSZy24abVFk 

 

어느 노병께서 환갑을 넘긴 아들에게 들려주신 6.25전쟁, 학도병 참전의 절규 같은 무용담을 듣고 막숨을 몰아쉬었다. 노병은 1950년 8월 부산진공고에 설치된 육군제2훈련소에서 M-1소총과 키를 잰 후, 학도병 대열에 합류했다. 총알이 부족하여 1개 분대를 세워 놓고, 1~2명이 시범사격으로 방아쇠를 당겼단다. 19508월부터 징집된 학도병들이 분산 투입된 전선은 다부동·유학산·Y고지·포항지역 형산강전투 등이다. 또 인천상륙작전 양동공격의 일환으로 장사동 상륙작전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학도병은 모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북한군 기습남침 직전 1사단장에서 해임당하고 서울지역 S고등학교를 운영하던 K장군의 제자들로부터 태동되었음이 시기적으로 타당하다. 구국결사대, 진천지역에서 창설된 수도사단장으로 재소집 된 그를 뒤따른 학도들. 이어서 화개지구 전투·낙동강지역 전투·포항지역전투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공산군과 맞섰다. 그 대표자가 유서가 된 <피 묻은 편지>를 남긴 이우근 학도병이다. 당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17. 1950810,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어머님께 바친 편지의 주인공.  

 

6.25전쟁 당시이던 1951년 제주도 모슬포에 제1훈련소가 창설되기 전, 훈련소는 6~7개소, 북진공격을 하면서 논산에 제2훈련소가 창설된다. 이후 제1훈련소는 1956년에 해체되었고, 2훈련소이던 논산훈련소는 1999년 육군훈련소로 개칭된다. ‘충성가’, 이 노래 한 곡에는 대한제국군대로부터, 독립군·광복군·국방경비대·6.25전쟁 참전군인·학도병들의 애국열혈(愛國熱血)이 펄펄거리고 있다.

기고 : 유차영 시인, 한국콜마 상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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