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시를 걷다] 동강

동강에서 너를 만나다

너는 희망으로 사느냐

희망은 상처를 경유해서 온다.

시간이라는 상처와 생명이라는  

상처를 경유해 날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다시, 동강에게 희망을 바치며

살아서 아름다운 동강의 생명을

기어이 사랑이라 불러본다.

처음 오대산을 발원해 강원도 산골을

굽이굽이 돌아 정선 조양강을 만나 흐르면

동강은 희망이 되고 생명이 된다.   

 

겨울 강에 눈이 내린다.

뱃사공은 말없이 강을 건너고

아득한 풍경은 무릉에 당도해

신기루 같은 전언을 내려놓는다.

풍경은 덧없는 것들의 쓸쓸함까지도

영원한 그리움을 만들어 내며

세상의 언저리로 내리는 눈이 된다.

그래서 겨울 동강에 내리는 눈은

저 뱃사공 마음처럼 따뜻하다.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김수영의 외침이 살아나는 동강에서

나는 삶에 묻은 때를 씻어내며

마음 놓고 기침을 해 본다

순수는 아직 살아서 숨을 쉬고

흩날리는 눈발 속으로 강물은 흐르는데

겨울 한복판에서 출렁이는

저 환한 바람 바람이여 

 

평화는 고요해서 아름다운 것

눈동자를 밟고 지나가는 바람이 멈추자

강의 고요가 세상의 상처를 핥아 주는 동안

사랑은 깊은 가슴과 가슴의 길을 지나

희디흰 밥알 같은 눈으로 내리고

어라연에서 깃털처럼 가벼워진 내가

강이 된다. 강물이 되어 흐른다.



순한 물길은 서강에서 느리게 흐르는데

선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서강을 바라보고

운명과 독대한 단독자의 향기가 아직도 나는 듯하다.

영혼의 거처를 찾아 겨울 철새들이

서강 위를 날아올라 저녁 하늘로 사라지고

먼 강마을의 저녁연기만 무심하게 피어오른다.

순한 강 서강이여 어서 흘러라.

흘러서 북풍에 밀려오는 동강과 만나라.

 

가장 낡은 세상의 한 길이 끝나고

물의 길이 놓이는 저 착한 강을 본다.

푸른 옷자락을 여미는 강이 내 마음을 읽고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우며 흘러간다.

그래 너는 오고 있었다.

저 강을 따라 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과 끝인

너는 오고 있었다.

강에서 강이 되는 너는 오고 있었다.

강으로, 착한 강으로…….



눈길을 밟고 오신이여,

산골 마당 위로 마른 햇볕 스며들기 전에

싸리 빗자루로 길을 내신 그대는 어디 가고

한지 같은 눈의 수평선 끝에

사자산 풍경이 걸려 댕강 거리는데

대숲을 돌아 나온 바람 한 점이

눈 내린 산골에 파문을 일렁인다.

겨울 햇살이 내려앉는 절집 마루에

나는 헛헛한 마음을 개켜 두고

풍경에 걸린 바람을 따라 산을 휘돌았다.

 

줄곧 길을 생각했다.  

길은 겨울로 향해 있었고

겨울은 지상에서 너무 깊었다.  

산이 입을 벌리자 바람이 쏟아진다.  

하얀 바람이 지나가는 사자산에서

길을 따라 걸어가며 생각했다.  

생각은 똬리처럼 내 머리위에 앉아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 주린 영혼은 저 길을 홀로 걷고 있는데  

나는 아득한 적막에 기대 

마음속 등불을 켜고 있었다



 

단종의 땅 영월에 서면

애간장이 녹아서 없어진 그의 한이 밟힌다.

얼음장 위로 날선 겨울 빛을 튕겨 내며

감춰진 단종 비사에 내리 꽂히는데

고적한 겨울 풍경이 되어버린 그는

겨울 강이 되어 울울울 흐르고 있을 게다

 

눈이 그치자 더 환해진 장릉의 오후,

단종은 카메라 밖으로 조용히 떠나가고

마당 가득 늙은 시간이 쌓여 갔다.

벼랑에 서서 벼랑이 된 그의 영혼은 말이 없는데

그를 받아 걸어 둔 나뭇가지만 낡은 조등처럼 결려 있다.

눈 쌓인 그날 나는 오랫동안 어린 단종에게 갇혔다.


 

강원도 촌놈이 서울 갈 채비를 하는 곳이 합수머리라고 했던가.

달려온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 덕포로 기차가 지나간다.

뜨거운 기다림이 있는 합수머리로 기차가 지나가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를 노래 부르며

어딘가에서 실종된 그리움을 찾아낸다.

너를 만나는 곳 너를 만나서 하나가 되는 곳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강물이 지나가고 우리가 지나간다.

더 이상 너는 혼자가 아니다


동강과 서강이 만나 서로를 보듬으며

남한강의 처음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원죄를 얻었다.

이 땅에 마지막 남은 자연을 업은 영월에 오면

그래서 마음이 먼저 깨끗해진다.

빈 맘으로 오면 더욱 빈 맘에 중독되고 말아

저 푸른 강물에 영혼을 빨아 널고 싶어진다.

처음의 내가 되고 싶어진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18.08.06 17:07 수정 2020.07.0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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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