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의 삶의 향기] 아내의 약지

김희봉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29 14:13 수정 2020.06.29 14:14

 



벚꽃 지고 장미 붉은 잎이 흩날리니 봄이 떠나고 있다. 올해는 포근한 봄의 어깨를 한번도 보듬어주지 못한 채 홀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있다. 넓고 투명했던 창()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굵은 쇠창살을 박았고, 철책을 내려 빛을 앗아갔다. 바깥 세상은 캄캄한 어둠으로 변했고, 우리는 방에 고립되어 시각을 잃은 채 귀만 열고 살았다.  

 

한 세계가 닫히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일까? 눈을 감고 있을 때 말이 더 잘 들리는 것처럼, 어쩌면 내면의 눈이 더 밝아지는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이, 내가 모르던 자신과 아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요약하면, 바쁠 망()이다. 공사다망해서 쉴 새없이 달려왔다. 평생 물 관리와 환경 일에 종사했고, 은퇴 즈음에 한의대를 8년간 다녔다. 그리고 매달 신문 칼럼을 쓰고, 문학 모임을 이끌어 온지도 스무 성상이 넘었다. 촌음을 아끼며 산 세월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눈을 감으니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쁠 망()이란 마음()이 쫓기면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서늘한 깨달음이다. 

 

쉴 휴()를 비로소 보았다. 사람()이 나무()에 기댄 모습이 편하다. 욕심없이 쉬엄쉬엄 살아온 사람들의 나뭇짐이 오히려 푸짐하다. 물질을 떠나 정서적 곡간도 더 널찍하다. 어쩌면 쉬면서 도끼날을 벼르는 재충전의 지혜가 내겐 없었던 건 아닌가 하는 자괴심이 들었다.       

 

아내와 24시간을 지내면서, 또 하나의 발견은 이순(耳順)넘긴지 오랜 내가 아내에게 쉽게 서운해 한다는 사실이었다. 젊고 바삐 살 때는 몰랐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온갖 정성으로 남편을 살갑게 받드는 딴 집들의 모습이 내심 부러웠다. 평생 가정을 돌봤고, 지금은 아내가 조금만 아파도 한방치료를 서두르는 내게 아내가 자주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괜히 윽박지르거나 쌩하니 찬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데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니 내 속에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있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를 위해 홀로 뛰신 어머니의 자상한 보살핌을 그리워하는 아이가 내 속에서 떼를 쓰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내에게 존경받는 남편이 되려고 애써 대범한 척 살아왔는데, 내 속 아이의 상처를 달래주어야 할 때가 왔음을 느낀 것이다.   

 

 

다행히 속 눈이 밝아지니 치유의 첫 걸음이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아내의 약지가 검지보다 훨씬 긴 것을 처음 발견한 것이다. 

 

손가락 길이와 호르몬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영국의 존 매닝 교수가1990년대 부터 주도해왔다. 그는 남녀불문하고 태아가 남성호르몬에 많이 노출되면 약지가 발달하고, 상대적으로 여성호르몬에 더 많이 노출되면 검지가 길다고 밝힌 것이다. 그 후 이 분야 연구가 봇물 터지듯 했는데, 4백여편 논문들이 매닝 교수의 연구결과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아내가 소소한 애정표현 대신, 대범하고 실용적인 성격은 타고 난 천성이었다. 예전에도 모른 건 아니었지만 내가 떼를 쓰거나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아내의 긴 약지는 조물주의 뜻. 내 믿음이 착오였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도움은 영성 깊은 김기석 목사님의 짤막한 메시지에서 왔다. 그는 부부 행복의 비결은 배우자에게 덕 볼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촌철살인의 한마디였다. 그리고 늙어가면서 긍휼한 마음을 가지라고 했다. 슬픔과 고난의 강물에 잠겨도 같이 견뎌내자고 했던 그 첫 언약을 기억해내야만 비로소 배우자의 시린 어깨를 측은지심으로 감싸줄 수 있다고 했다. 순간, 아내 덕 볼 생각으로 불만에 찼던 내 속의 어린아이가 보였다. 얼굴을 붉히며 그 아이를 가슴에 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 속에 유폐되어 산 지난 봄은 어둡고 긴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었다. 육체는 병들고 소멸되어가는 엔트로피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둠을 뚫고 미세하게 들려온 내 속의 울림이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속에서 오래 곪았던 상처를 핥고, 같이 늙어가는 아내의 주름과 긴 약지를 고마움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이 기적같은 시간은 아마도 성 어거스틴이 말했던 은총의 시간,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김희봉]

서울대 공대, 미네소타 대학원 졸업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캘리포니아 GF Natural Health(한의학 박사)

수필가, 버클리 문학협회장

1시와 정신 해외산문상수상

 

김희봉 danhbkimm@gmail.com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