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다투려면 벗고 다퉈라(Argue Naked)

이태상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7.27 09:41 수정 2020.07.27 10:19

 

다투려면 벗고 다퉈라. (Argue Naked.)’

 

이 말은 어제저녁 인터넷 온라인 줌(zoom)으로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Norfolk)와 뉴저지주 테너플라이(Tenafly) 사이 거리 두기 결혼식 주례가 신부-신랑에게 해준 말이다. 살다 보면 다툴 일도 있겠지만 사랑싸움만 하라는 의미심장한 당부였다.

 

이 결혼은 신랑 신부 두 사람 다 재혼이지만 40년 전 한동네에서 살면서 같이 놀던 소꿉동무가 페이스북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49세가 된 신부는 공교롭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기이하게도 30년 전 같은 49세 때 나와 재혼한 엄마의 큰 딸이자 나의 큰 의붓딸이다.

 

나도 즐겨 시청했던 SBS 프로그램 (2011323~2014226)이 있다. 이보다 20여 년 전 사찾사회 기사(199261일자 중앙일보)가 있었다. 사찾사는 사람을 찾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헤어져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의 가교역할을 하고자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아직 찾지 못한 또는 되찾을 제 짝을 찾아줄 짝찾사회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내가 젊었을 때 시인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1894-1963) 선생을 서울 명동 어느 다방에서 뵙고 여쭤봤었다. 어째서 평생토록 결혼 안 하고 독신으로 사셨느냐고. 그랬더니 오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러했다.

 

젊은 친구, 답답한 소리 좀 그만두게. 난들 외롭게 살고 싶어 그랬겠나. 내가 좋다고 하는 여자는 다 날 싫다 하고, 날 좋다고 하는 여자는 하나같이 내 마음에 차질 않았으니 어쩌겠나?”

 

이 말씀이 그 당시에도 남의 말 같지 않았었다. 그 후로 유엔사무총장 닥 함마슐트(Dag Hammarskjold 1905-1961)의 전기를 보니 한번은 어느 신문기자가 왜 결혼 안 하고 독신으로 사느냐고 그에게 묻자 그의 대답이 19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티 에스 엘리엇(T.S. Eliot1888-1965)의 시()를 이해하는 여성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찾는 이상적인 여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었으리라.

 

나 또한 나의 자작시 바다코스모스를 이해해주는 여자를 못만나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고 차라리 혼자 살리라 굳게 마음 다졌었다. 그런데도 어쩌다 결혼했다가 두 번씩이나 이혼까지 하고 말았다.

 

결혼에 한두 번 실패했다고 을 찾는 인생 최대 아니 유일한 목표를 포기할 수 없어 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하는 비장한 각오와 절박한 자세로 궁여일책(窮餘一策)을 써보았었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미주판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세계일보에 6개월 동안 다음과 같은 구혼광고를 냈었다.

 

제 진짜 짝을 찾습니다. 인생의 가을철을 같이 즐길 코스모스 같은 여인을 찾습니다. 정력왕성하고 낭만적인 50대 남성 연애지상주의자가 지적(知的) 대화 가능한 미모(美貌) 미심(美心) 미혼(美魂)30대나 40대 독신여성으로 비() 기독교 신자를 찾습니다

 

그랬더니 미국 각지에서 수백 명의 여성으로부터 전화가 있었고, 그중에서 수십 명을 만나 봤다.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이 왜 미국에 사느냐, 덤벼들어 물고 늘어지는 여자를 비롯해 장난삼아 전화하는 사람, 돈이 얼마나 있느냐, 집이 있느냐, 미국 시민권자이냐, 아니면 영주권자이냐, 어떤 차종 자동차를 모느냐, 직업은 무엇이고 애들은 몇이나 되며, () 부인과는 왜 어떻게 헤어졌느냐, 키가 얼마나 크며 몸무게는 얼마나 나가느냐, 고향은 어디며 학교는 어딜 나왔느냐, 혈액형은 무엇이냐 묻는 여자가 많았다.

 

그밖에도 그냥 전화로 말벗이나 하자는 유부녀와 처녀들도 있었고, 남자 망신 그만 시키라며 노발대발하시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도 광고를 내 볼까 하는데, 광고 내면 그 반응이 어느 정도냐고 솔직히 물어오는 남자도 있었다.

 

그 당시 또 20여 년 전 영국신문에서 60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옛 연인을 다시 만나 결혼한 여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1931년 영국 웨스트 요크셔에서 한 집에 하숙하고 있던 두 청춘남녀가 사랑에 빠졌으나 여자 쪽 부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그다음 해인 1932년 처녀 앨룬드 그리피스는 총각 베이질 타이트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60년간 앨룬드는 단 한시도 베이질을 잊은 적이 없으며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그 최근에 있었던 결혼식에서 밝혔다.

 

84세가 된 엘룬드는 죽기 전에 그를 찾아보리라 마음먹고 은퇴한 노인들을 위한 잡지에 사람 찾는 광고를 냈는데 광고가 나간 지 일주일도 안 돼 옛 애인 베이질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로부터 몇 번의 연서를 교환한 끝에 이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결정, 드디어 생애 최고의 행복을 맛보며 늙은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젊은 날 내가 어머니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내 생애는 너무나 비참했었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베이질과 같이 살게 되었으니 지난날의 보상을 다 받은 셈이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 전부인 까닭이다

 

이렇게 지난날을 회고하고 노신부 엘룬드는 행복한 결혼식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각성할지어다.

, 명심할지어다.

세상의 부모들이여,

세상의 자식들이여,

천하의 선남선녀들이여,

우리 가슴 뛰는 대로만 살자.

 

세상에 못 할 짓 가운데

가장 못 할 짓이 있다면

가슴에 못 박는 일 아니랴!

 

그 누가 책임질 수 있으리오.

하늘도 땅도 조상도 부모도

그 아무도 책임질 수 없으리.

너와 나의 모든 행과 불행을.

 

천당과 지옥이 따로 없다.

너와 내가 같이 가는 곳이면

너와 내가 함께 있는 곳이면

너와 내가 같이 하는 순간이면

그 어디 언제라도 다 천국이지.

 

천사와 악마가 따로 없으리라.

너와 나를 갈라놓는 사람이면

우리 가슴에 못박는 사람이면

부모와 형제자매이든 벗이든

다 적이요 원수요 악마이리라.

 

너와 나를 남과 북, 동과 서로

너와 날 선과 악, 백과 흑으로

너와 나를 남과 여, 노와 소로

너와 날 분리시켜 놓는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 다 악마이리라.

 

세상에 누구 말을 들으랴.

세상에 누구 뜻을 따르랴.

진리는 언제나 가까이 있고

우리 각자 자신 속에 있으리.

 

네 숨은 네가 내 숨은 내가

네 삶은 네가 내 삶은 내가

네 가슴 네가 내 가슴 내가

네 사랑 네가 내 사랑 내가

쉬고 살고 뛰고 오를 것이리.

 

사랑이 모험 중의 모험이라면

용기와 신념만 있으면 족하리.

20119.11 직후 뉴욕타임스에 희한(稀罕)한 전면광고가 실렸었다. 지면 한가운데 고인의 사진 한 장과 출생과 사망 일자와 함께 그 밑에 아직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남긴 놀이를 즐기라(Enjoy the Game)’유언이었다.

 

우리가 구름잡이라 할 때는 그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가 구름(clouds)’이라 할 때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기보다 데이터 구름(data clouds)’이나 네트워크 구름(network clouds)을 말할 정도로 자연계와 기술계가 구분이 분명치 않게 되었다.

 

2015년 출간된 경이로운 구름(The Marvelous Clouds: Toward a Philosophy of Elemental Media)’에서 미국 아이오와 대학 커뮤니케이션 교수 존 다럼 피터스(John Durham Peters, 1958 - )는 클라우드가 우리의 새로운 환경으로 가까운 미래에 잡다한 모든 것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인간의 몸이 단말기가 되어 구름과 우리 몸 사이에 문서와 영상이 흐르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우리는 흔히 매체(media)가 환경 (environments)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역()도 또한 진()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2015년에 나온 모든 것의 진화: 어떻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성되는가(The Evolution of Everything: How New Ideas Emerge)’붉은 여왕(The Red Queen: Sex an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 1994) 그리고 유전체(遺傳體) 개놈(Genome, 1999)’합리적인 낙관주의자: 어떻게 번영이 이루어지는가(The Rational Optimist: How Prosperity Evolves, 2010)’ 등 베스트셀러 과학명저의 저자이면서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매튜 리들리(Matthew White Ridley, 1958 -)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과학이란 사실을 수집해 나열해 놓은 카탈로그가 아니고, 새롭고 더 큰 미스터리를 찾는 일(Science is not a catalog of facts, but the search for new and bigger mysteries.)이라고 말한다.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비숍 버클리라고도 불리는 George Berkeley/Bishop Berkeley 1685-1753)세상은 다 우리 마음속에 있다(The world is all in our minds.”라고 했다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뜻이리라.

 

우리 선인들은 인생이 하늘의 한 조각 뜬구름 같다고 했다. 구름이 있으면 천둥번개도 있게 마련이다. 달라이 라마의 육성이 담긴 음악이 최근 빌보드 뉴에이지 앨범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앨범은 그 제목이 내면세계(Inner World)’라는 만트라(Mantra) 진언(眞言)을 암송하는 명상음악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시선을 안으로 돌려 마음을 돌아보고 우주로 비전을 넓히라는 뜻이리라.

 

네 세상은 너, 난 내 세상(Your world is you. I am my world.)”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979-1955)소나무 숲속 작은 닭들(Bantams in Pine-Woods)’에 나오는 한 시구(詩句)이다. 스티븐스는 낮에는 직장인 보험회사 일을 보면서 밤에는 어떻게 자신과 세상이 서로에게 의지하는지, 어떻게 자신이 경험하게 되는 세상을 자신이 창조하게 되는지, 평생토록 시작(詩作)을 통해 천착(穿鑿)했다고 한다.

 

2016년 출간된 미국 시인 폴 마리아니(Paul Mariani, 1940 - )의 평전 ‘The Whole Harmonium: The Life of Wallace Stevens”에 따르면 스티븐스에겐 뭣보다 신()의 죽음이 추상적인 개념이나 진부한 문구가 아닌 영구적인 도전으로 이를 그는 예술과 윤리적인 문제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뤘다.

 

우리가 스폰서로서의 신()의 후원 없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의의를 우리가 찾아 만들어 낼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있다는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스티븐스 시()의 주제가 되었다. 그의 해법이란 한 때 종교가 맡았었던 역할을 이젠 시() 혹은 더 넓게 우리의 상상력이 수행해야 한다는 거다. 이를 스티븐스는 예술지고의 픽션 (supreme fiction of art)’이라 명명한다.

 

이 최상 지고의 픽션(supreme fiction)은 신화가 청소 제거되었으나 시어(詩語)로 승화된 현실로 우리를 돌려준다고 그의 최고 픽션을 위한 노트(Notes Toward a Supreme Fiction)’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와 우리 이미지를 추방한 하늘의

더할 수 없이 아득히 먼 청결함으로

깨끗이 씻긴 해맑은 해라는 생각으로

바라볼 때 태양은 얼마나 깨끗한가.

 

How clean the sun when seen in its idea,

Washed in the remotest cleanliness of a heaven

That has expelled us and our images.”

 

눈사람(The Snow Man)’에서 그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거기에 있지 않은 아무것도

그리고 있는 아무것도

 

Nothing himself beholds

Nothing that is not there and

Nothing that is.”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하듯 초연한 경지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관조한 스티븐스는 시인이라기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하나의 우주를 창조한 마술사 아니 어쩌면 신()이었으리라.

 

이것이 어디 스티븐스뿐이랴. 우리 모두 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각자는 각자 대로 각자의 현실, 곧 자신만의 세상과 우주를 시시각각으로 창조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우린 모두 코스모스바다에서 출렁이는 성신(星神/) 코스미안임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어라.

 

1938년에 출간된 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하우징아(Johan Huizinga 1872-1945)호모 루덴스(Homo Ludens)’란 책이 있다.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을 뜻한다. 인간의 본질은 유희를 추구하는데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창조 활동 곧 문화 현상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어차피 인생이 소꿉놀이 소꿉장난 같다면 이렇게 놀면 어떻고 저렇게 놀면 어떠리.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놀이와 장난을 할 필요도 없고 같은 길을 갈 이유도 없으리라. 그리고 매사에 너무 심각할 것도 없지 않을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겠지만 그래도 각자는 각자 제멋대로, 제 마음대로, 제 가슴 뛰는 대로 살아보는 것 이상 없지 않을까?

 

좀 더 비속하게 상징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각자 제 몸과 마음 꼴리는 대로 살아보는 것 말이어라.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도 성욕(性欲) 애욕(愛慾)을 의미하는 리비도(libido)’가 삶의 원동력이라고 했다지 않는가. , 그래서 ‘(다투려면) 벗고 다투라(Argue Naked)’ 하는 것이리라.

 

세상천지에 남녀같이 숨 쉬는 호() () 이상 없으리. 이것이 반쪽님들이 하나님 되는 천로역정(天路歷程) 아니 우로역정(宇路歷程)에 오르는 것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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