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 사이에 유행했다는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즉,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걷는다`는 뜻이다. 요새 말로 사대부들의 ‘아웃도어 활동’이다.
서화에서 향기가 나려면 문향(文香)이 그윽한 산을 찾아야 한다.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던 다산은 남양주 여유당 자택을 떠나 꼬박 하루나 걸려 양주 고현리 흥국사에 도착한 후 절에서 하루 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북한산성 입구에서 기다리던 도반들을 만나 산성 계곡을 따라 깊은 가을 속으로 들어간다.
대동문으로 향하는 계곡을 따라 오르다 용학사 갈림길에서 태고사 방향으로 산길을 도니 중성문이 나온다. 중성문 너머로 노적봉과 산성 주능선 자락은 단풍이 절정이다. 일엽지추(一葉知秋),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 했던가.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을 알고, 그 나뭇잎 하나가 퍼지고 퍼져 만산홍엽을 이룬다.
다산은 어릴 때부터 형제이면서 평생을 신뢰하는 벗이자 서로의 멘토로 살았던 형 약전과 함께 남양주 집 뒷산을 자주 오른다. 율리봉이 있는 예빈산과 예봉산을 올라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을 굽어보고, 적갑산을 거쳐 새우젓고개에서 운길산까지 올랐다가 수종사로 내려와 스님이 석간수로 끓여내는 녹차를 마시며 북한강과 남한강 물길이 서로 조우하는 두물머리의 풍광을 즐기다가 저녁 무렵에서야 조안리 집으로 돌아오는 원행을 자주 하면서 호연지기를 기른다.
그래서 오랜 유배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근력이 여전하여 오랜만에 하는 산행인데도 가볍게 산길을 오른다. 오늘따라 유배지 흑산도에서 유명을 달리한 형 약전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이윽고 비석거리가 보이고 그 옆에 날아갈듯 날렵한 느낌의 누정이 서 있다. 북한산 산영루(山影樓)다. ‘아름다운 북한산의 모습이 물가에 비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정자다.
다산과 친구들은 봇짐을 누각에 내려놓자마자 계곡으로 내려가 반반한 암석 위에 앉아 두루마기를 벗고 갓끈도 풀고 차가운 옥류에 발을 담근다. 역시 단풍놀이의 절정은 냇가에 발을 담가 씻는 탁족(濯足)이다. 계곡에 부는 선뜩한 단풍 바람을 느끼며 즐기는 탁족은 기분 좋게 산뜩하다.
발을 씻은 후 암석 위에 모두 누워서 먼 산과 하늘을 바라본다. 도반 하나가 굴원의 어부사(漁父辭)를 읊는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는다.”
술상이 차려진 누정으로 자리를 옮겨 주석을 즐긴다. 분위기에 취한 다산이 시 한 수를 읊는다.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
십여 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가고
온 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 차가워라
숲 속에 말 매어 두고 얘기 꽃을 피우는데
구름 속에 만난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해 지자 흐릿한 구름 산빛을 가뒀는데
행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오네
- 정약용, 산영루(山影樓)
가을날 해질녘 계곡의 해가 빨리 떨어지자 한기를 느낀 이들은 비석거리 위에 있는 중흥사로 자리를 옮긴다. 실학자인 다산과 유생인 친구들은 중흥사로 올라가서도 승려들과 오랜 시간 토론도 마다하지 않는다.
늦게 잠자리에 든 이들은 절집 앞마당을 가득 채운 달빛과 산사의 풍경 소리, 계곡 물소리와 흥겨운 벌레 소리로 새벽까지 잠을 청하지 못한다.
이튿날, 중흥사에서 공양을 마친 후 근처 태고암으로 올라가 대웅전과 산신각에 들른 후 언덕 위 고려조 태고 보우 대사의 업적을 기려 세운 원증국사부도탑도 친견한다.
태고암을 벗어나 대남문 방향으로 경사가 완만한 계곡을 올라가니 행궁(行宮)이다. 임진왜란 같은 병화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소원하며 숙종이 1711년에 지은 행궁은 서까래가 썩어 지붕이 무너져 내린 집들이 많다. 그 위로 스산한 가을빛까지 내려앉으니 지나는 길손의 마음은 애잔하기만 하다.
대남문으로 오르는 이 길은 북한산성 축조를 명령한 숙종과 중흥사 주지이면서 산성 축조의 책임자였던 승군대장 성릉 스님, 생육신 김시습, 다산과 교류했던 추사 김정희 등이 지나간 길이다.
행궁에서 제법 가파른 산길을 꾸준하게 오르니 지붕이 달아나고 없는 대남문이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반긴다. 대남문을 지나니 문수봉 아래 절벽 끄트머리에 큰 암릉을 등진 작은 암자 한 채가 보인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한 폭이어서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건너편에는 보현봉이 구름 위에 앉아 둥둥 떠간다. 절벽에 가까스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문수봉에 매달리듯 기대고 선 문수사(文殊寺)에 들어서니 문수굴이라고도 불리는 문수천연동굴(三角山天然文殊洞窟)이 산객을 반긴다.
구기동으로 하산하는 길은 지팡이 없이 내려서기가 힘들 정도로 가파르다. 한참을 내려와야 산길이 순해진다. 그냥 내려가기가 심심하여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구기계곡을 내려온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운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산 날머리가 가까워지자 도반 하나가 단풍 원행 느낌을 묻는다. 얼떨결에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지리산 피아골의 단풍절경으로 소감을 대신한다.
‘새빨간 단풍들은 계곡의 물까지 붉게 물들이고, 주황빛이나 주홍빛의 단풍들 사이에서 핏빛 선연한 그 단풍들은 수탉의 붉은 볏처럼 싱싱하게 돋아 보였다.’
후세에 나올 소설 내용임을 알 리 없는 이들은 훌륭한 감상이라고 칭찬한다. 구기동으로 내려오니 사전에 기별을 받은 노복들이 당나귀를 데리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구기동 계곡을 빠져 나와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을 한 후 지하철을 타기 위해 불광역 가는 버스 정거장으로 가는 사이에 나는 혼자다.
200년 전 호접지몽에서 깨어난 탓에 집에 와서도 눈앞이 몽롱하기만 하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