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프로젝트] 영자신문을 읽는 그녀

문국


춘천의 어느 고등학교 앞에서 가겟방을 운영하고 있는 경옥은 꽃을 좋아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러 가겟방에 자주 가는 단골손님이다. 작년 가을에 보일러실 앞에 벽돌을 쌓고 경옥을 위해 작은 화단을 만들어 주었다.


가겟방 앞에 택시를 세워놓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택시기사와 담배를 사러 손님이 오지만, 예전에 비해 가겟방 수입이 적었다. 대형마트와 소형 마트가 생긴 이후로 가겟방은 내리막길이다. 경옥은 가겟방에 딸린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싫어지면 밖으로 나온다. 화단의 꽃을 구경하고 잡초를 뽑아주며 시간을 보낸다.


저만치 애란이 핸드 카트를 밀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경옥이 애란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애란은 생활비가 모자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리고 가겟방에 와서 외상을 그었다. 오늘도 외상을 달라고 할 것이다. 경옥이 한숨을 쉰 것은 외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란은 물에 적신 옷을 비닐봉지에 가득 넣어 핸드 카트에 싣고 허리를 굽혀 힘들게 밀고 다녔다. 왜 짐을 갖고 다니느냐고 물어보면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 한 통을 줘.” 애란이 빛바랜 영자신문을 펼쳐 들고 말했다. 경옥이 애란을 쳐다보지 않은 채 화단의 꽃을 들여다보았다. 애란이 화단 앞으로 다가왔다. 애란의 몸에서 나쁜 냄새가 진동했다. 애란이 낮은 소리로 영자신문을 읽었다. 영어 기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누구를 꾸짖었고, 욕을 했고, 사랑을 고백했다. 미군 부대 앞에서 살았던 할머니가 영자신문을 읽고 있는 애란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오래전에 애란과 동거했던 미군의 기사가 실린 영자신문을 보는 거라고 했다. 애란은 양공주 출신이었다.

애란이 술집과 다방에서 일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 애란이 술집과 다방에서 일한 것은 사실이었다. 가겟방을 찾는 손님 중에 술집과 다방에서 애란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 일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이었다. 애란이 양공주 생활을 하며 한이 맺힌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양공주로 살아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애란을 보면 다른 곳으로 피하곤 했다. 애란이 나를 전남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애란은 결혼을 열두 번 했다고 자랑했다. 열두 번 결혼한 탓인지 남편들을 다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무명작가로 살아오며 주변머리도 없고 돈을 벌지 못해 아직 총각인데, 열두 번 결혼한 여자의 전남편이 되었다. 애란이 먼저 가겟방으로 들어갔다. 경옥이 화단 가꾸는 걸 멈추고 애란을 따라 가겟방으로 들어갔다. 가겟방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경옥뿐만 아니라 손님들도 애란의 냄새를 싫어했다.

애란이 베지밀 한 통과 커피 한 통을 집어 들었다. 월급이 나오면 주겠다며 외상을 달라고 했다. 경옥이 가겟방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어려워서 더이상 외상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애란이 미국에서 돈이 오면 외상값을 한꺼번에 다 갚겠다고 목소리를 높여 침을 튀기며 말했다. 결국 경옥은 애란에게 외상을 주었다. 애란은 달콤한 커피와 초콜릿과 엿을 좋아했다. 앞니가 다 빠지고 썩었는데도 단 것을 좋아했다. 경옥이 애란에게 한 번 사용했던 비닐봉지를 주었다. 애란이 몸을 잘 씻지 않고 옷에 음식 국물을 묻히고 다니며 이상한 행동을 했다. 밖으로 나가 비닐봉지를 탁탁 털었다. 비닐봉지에 나쁜 병원균이라도 잔뜩 묻어 있는 듯이. 애란이 비닐봉지를 여러 번 털고 가겟방으로 들어와 엿 오십 개를 세어 비닐봉지에 넣었다. 물론 그것도 외상이었다.

경옥은 일찍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경옥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연말에 방송국에 돈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지 않았다. 남모르게 누굴 도우며 살지도 않았다. 그런 여자지만 가난한 손님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십여 년 동안 가겟방을 운영하며 외상값을 많이 떼였다. 먹고 살아갈 만큼 돈을 갖고 있으면서 외상값을 갚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무 가난해서 외상값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외상을 주지 말아야 하는데, 마음이 약한 경옥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경옥은 애란의 외상값을 다 받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미리 부조를 한다는 마음으로 외상을 주었다. 애란이 음식을 씹지 못해 마른 장작처럼 삐쩍 말라 있었다. 붉은 옷을 좋아해서 붉은색 윗옷을 입고 다니는 애란은 순식간에 떨어지는 늦가을 잎처럼 언제 죽을지 모른다. 애란이 술을 마시지 않지만, 오늘내일하는 사람처럼 건강이 좋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애란은 어린 시절부터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다. 공장과 가정부와 식당과 다방과 술집에서 일해 돈을 모으지 못했다. 돈을 버는 족족 시골집으로 보냈다. 애란은 미군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잘살고 싶었는데, 마지막 꿈마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곧 연락을 주고 매달 돈을 보내기로 약속하고 미국으로 간 미군의 소식을 오랫동안 기다리던 애란은 끝내 반가운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튿날 오후 애란은 평생 자신을 괴롭힌 거추장스러운 짐을 다 내려놓았다. 경옥이 외상장부를 펼치고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죽죽 그었다. 애란의 죽음을 슬퍼하듯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경옥이 가겟방 의자에 앉아 슬픔에 젖은 눈빛으로 비 내리는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빛바랜 영자신문을 읽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애란의 삶을 세상은 어떻게 평가할까? 신문에 애란의 죽음을 알리는 글이 한 줄도 실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전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착한 여자, 경옥. 그녀는 애란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애란의 전남편으로 소문난 무명작가도 신산스러운 고비마다 죽음 대신 초라한 삶을 택한 여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의 슬픔을 생각할 때마다 불쌍한 애란을 기억해 주리라. [글=문국] 


이정민 기자
작성 2021.05.29 12:22 수정 2021.05.29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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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