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복혜숙의 <종로행진곡>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가수 노래

딴따다~딴 딴따다~... ‘붉은 등불 푸른 등불~’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행진곡이 아니다. 1930년대 종로 네거리, 보신각이 자리하고 있는 근처 선술집 각시(색시)들의 습생풍경을 서사한 노래. 멜로디는 재즈, 노랫말은 그 당시의 종로거리를 말()그림으로 그려놓았다.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 40071, 재즈송 번안 곡 <그대 그립다>와 같은 음반에 실렸다. 작곡은 시오지리 세이하치(鹽尻精八). 작사가는 미상이다.  

붉은 등불 파란 등불 사월 파일 밤에
거리거리 흩어진 사랑의 붉은 등
등불 타는 등불 좀이나 좋으냐  

마음대로 주정해라 고운 이 만나면
음전한 맵시 보소 선술집 각시
종로 네거리를 어떻다 이르료  

안타깝다 우리 님이 거의 오실 이때
흐늘거려 놀잔다 노래도 부르고

서울 밤 그리운 밤 종로의 네거리  


종로(鐘路) 네거리, 종이 있는 4거리다. 이곳에 언제부터 종이 있었을까. 창건자는 조선 초대임금 이성계(1335~1408). 종루(鍾樓)를 세우도록 승인한 사람. 이를 구상한 사람은 정도전(1342~1398)이다. 삼봉은 1393년 한양천도 설계를 할 때, 유학의 5대정신인 인····(仁義禮智信)을 품은 도성(都城)을 구상했었다.  

그 산물이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홍지문(弘智門), 보신각(普信閣)이다. 이를 경계로 둘레 안의 면적을 합치면 514만 평, 여의도의 5배 정도이고 20만 명 정도가 주거할 수 있는 터다. 700년 전 정도전의 배포를 짐작할 수 있는 단면이다. 이에 따라 최초의 보신각은 1396년에 창건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건된다.  

보신각종은 원각사에 있던 것으로 세조 때에 주조한 것. 중종 때 숭례문 안으로 옮겼다가 선조 때 명례동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전한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나 화재와 중건이 있다가 1895년 고종 임금이 종각에 보신각이란 편액을 걸면서 보신각종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종은 아침을 여는 04시에 파루(罷漏)33회를, 성문을 닫으며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22시에 28회를 타종했다. 33은 불교의 제석천을, 28은 별자리수다.  

노래는 4월 초파일 시절을 묘사하고 있다. 양력으로 5월 중순, 꽃이 만발한 절기다. 붉은 등불과 푸른 등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묘사했다. 1930년대는 서울인구의 1차 팽창기이며, 1960년대가 2차 팽창기이다. 1863년 서울인구는 204, 1909년 인구는 23, 1930년 인구는 30만 명을 돌파한다. 이것이 1960년대 300, 1980년대 1천만 시대로 이어진다.  

이때의 서울은 조선인과 일본이이 뒤섞인 도시. 1934년 서울 인구통계는 394천여 명. 조선인 279, 일본인 1만여 명, 기타외국인 6천여 명이었다. 당시 서울은 청계천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으로 나뉘었으며, 청계천 이남은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며 상가를 이루고 있었고, 지명도 마찌 또는 정으로 붙여서 본정(本町:충무로 일대), 명치정(明治町:명동일대)으로 불렸다.  

이곳 종로 네거리는 18943월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이 그 해 12월 옛 부하 김경천·한신현의 밀고로 체포,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가 이듬해 424일 교수형에 처해져서 주검이 효시 되었던 곳. 당시 41세였다.  

녹두장군이 처형된 지 35년째가 되던 1930, 나라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겨 백성들은 식민(植民)이 되었고, 종로에는 기생들의 물항라 저고리가 붉은등 푸른등 아래 팔락거렸다. 그 시절 노래가 바로 <종로행진곡>이다.  

그로부터 88년이 흐른 20184월 녹두장군 참살(慘殺) 123년 추모일을 기하여 녹두장군 전봉준 좌상동상이 그 자리에 섰다. 종로 네거리 영풍문고 앞. 장군을 처형한 의금부 전옥서(典獄署)가 있던 자리. 서울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과 6번 출구 사이. 순창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던 당시의 그 꼿꼿한 자세, 그 눈의 광채가 21세기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을 노려보는 듯하다.  

복혜숙(卜惠淑, 1904~1982)은 영화배우·성우·대중가수·연극인을 겸했다. 봉건과 근대문명의 충돌지대, 대중문화예술은 때로는 기형적으로 혹은 사생아처럼 탄생되고 전이되었다. 이런 세월을 더하면서 그녀는 <방송 아가씨·방송 아주머니·방송 할머니>로 통칭되었었다.  

그녀는 1930년대 초반 종로 인사동에 <비너스>다방을 운영했다. 다방 한 가운데 비너스 상이 놓여 있고 탁자 몇 개를 펼쳐 놓은 주간다실야간주점(晝間茶室夜間酒店). 이곳에는 그녀가 속했던 동극좌와 청춘좌의 동료 배우 심영·서월영·황철·차홍려·지경순 등과 문학인 현진건·노심유·구본웅·이청전 등의 출입이 잦았다.  

보령 출신 본명은 복마리(卜馬利). 아버지는 감리교 목회자.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예(手藝)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영화연극인의 꿈을 안고 귀국한다. 귀국 후에 몸을 지탱한 일이 단성사의 허드렛일. 그러던 중 극단 신극좌의 <! 천명>을 통하여 신파극 배우로 데뷔했다.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1904~1933)와 비슷한 시기다. 이후 조선배우학교와 토월회를 거쳐 <장화홍련전·춘향전·카추샤·인형의 집> 등에 출연하였고, 1926년 조선키네마의 창립 작품 <농중조> 주연을 맡는다. 농중조(籠中鳥), 새장 속에 갇힌 새라. 이후 <낙화유수·세 동무·지나가(支那街)의 비밀> 등에 출연하였다.  

복혜숙이 첫 음반을 낸 것은 1929년 <장한몽>, 이어진 것이 <쌍옥루>, <부활>, <낙화유수>, <숙영낭자전>, <불여귀>, <심청전>, <춘희> 등. 1930년에는 <그대 그립다·종로행진곡·목장의 노래·애(愛)의 광(光)>을 발표하였고, 이 시기 ‘시대요구의 재즈’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재즈라는 말이 도입된 것이다.

유차영 선임기자(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1.10 07:51 수정 2018.11.14 15:53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2025년 6월 11일
2025년 6월 10일
2025년 6월 10일
2025년 6월 10일
2025년 6월 9일
샤브올데이, 김우빈 전속 모델로 발탁 #샤브올데이 #김우빈 #전속모델 ..
[ESN쇼츠뉴스] 롯데콘서트홀 감동 무대”“조윤성 트리오·비키효, 감동의..
[ESN 쇼츠뉴스] 가짜뉴스 척결 국회언론인연대회의 출범… 정초신 영화감..
2025년 6월 9일
2025년 6월 8일
2025년 6월 8일
2025년 6월 8일
머스크폭로 "트럼프가 앱스타인 파일에 있다!" 제프리 앱스타인은 누구? ..
트럼프와 일론 파국! 트럼프의 반응은? #트럼프 #일론머스크
악마의 선동방식, 이렇게 엮는다! #괴벨스 #선동
2025년 6월 7일
2025년 6월 7일
2025년 6월 7일
2025년 6월 7일
"저는 잡초입니다. 뽑아주세요." [알쓸신톡 EP.02]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