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프로젝트] 삶의 여정에서 사랑을 돌아보며

박두빈

사진=코스미안뉴스


부지런하고 열심히 세상을 살아온 아내의 여정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은 영원히 잠들었으나 살아생전 좋은 추억을 많이 남긴 아내. 80여 년의 경로는 희로애락의 굴곡도 많았기에, 나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 쏟은 아내의 얼굴이 자주 떠오른다. 참 고생이 많았는데 이웃으로부터 항상 좋은 평을 듣고 살았던, 그 환한 얼굴이 눈에 선하다.

 

나의 집사람은 그 사람의 어머니께서 인연을 맺어주셨다. 선을 보러 갔더니 나를 보시고 저 사람은 귀가 커서 밥술깨나 먹겠으니 시집을 가도록 해라하여 곧 약혼하게 되었고, 1959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나는 집을 떠나 군에 입대하였고, 집사람은 아들을 낳고 시부모를 모시며 많은 고생을 했다.


나는 부모님과 시골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농촌에서 나셔서 생의 대부분을 농업에 종사하셨다. 어머니는 10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의료혜택을 보지 못한 시골에서 결국엔 12녀만을 기르게 되셨다. 나는 외아들로 겨우 대를 잇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내가 태어날 때 거꾸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부모님은 늘 이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아주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고 하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참 다행스럽고 부모님이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나는 군복무를 하고 1962년도에 제대를 했다. 그 후 부모님과 농사일을 하다 보니 너무 힘들어 대학 입학시험을 봤는데 합격통지가 왔다. 이 당시에는 시골에서 대학 가려면 하늘의 별따기인데 그래도 나는 다행히 합격하여 대학진학을 하게 됐다. 대학에 가게 된 것은 좋으나 부모님에게 너무나 죄송했다. 그래서 부모님은 이때부터 매일 허리띠를 졸라매고 끼니도 가끔 거르시며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집에서 기르는 소도 팔고, 때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논과 밭도 팔아서 등록금을 대주셨으니 나는 지금도 그 은혜를 영영 잊지 못한다.


나는 중. 고교 시절부터 체육에 소질이 있어서 체육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졸업 후엔 00시에 있는 사립 중. 고등학교에 체육 교사로 발령을 받아 첫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내는 내가 대학재학 시절에도 4년간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재학 내내 청량리에서 한복을 만들어 팔기도 하며, 월세를 살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모든 힘을 다해 내 뒷바라지를 했다. 그 후에도 내가 첫 직장을 잡았으나, 집을 장만하지 못해서 계속 셋방살이를 해야만 했다. 근무하는 학교가 사립이어서 그곳에서 20년을 봉직한 뒤에야 20년 퇴직금을 일시불로 해서 당시의 교장 사택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동안 아내는 많은 봉사를 해왔고, 학교 옆에 있던 00교회를 다니며 나와 더불어 신앙을 키워갔다. 집사람은 교회에서 권사 직분을 받은 뒤 약 1,000명의 교인 식사를 준비하는 등 많은 봉사를 해왔기에 두 사람이 함께 장로와 권사의 직분을 받게 되었다. 00시에서도 봉사를 많이 하여 83년도에는 시장으로부터 효부상을 받았으며, 87년도에는 고부회장의 공로패도 받았다. 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95년에 장로 임직패를 받으며 균형을 이루려 애쓴 기억이 난다. 성경에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듯이 사회와 이웃을 위해 선행과 봉사로 살아온 아내이기에, 지금도 아내에게 향했던 칭찬의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집사람은 평시에도 식사를 많이 하지 않았으며 몸도 좀 허약한 편이었다.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으나 늘 아쉬움이 컸다. 그러던 중 2015년 한 해가 저물 무렵 갑자기 악원이 닥치게 되었다. 아내는 신장이 나빠져서 급히 수술하게 되었고, 그다음 해부터 신장내과에서 투석을 받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성장해서 가정을 꾸렸기에, 아내의 투석은 내가 전적으로 맡게 되었다.


나는 시에서 노년층에 제공하는 노인 일자리를 하면서도 집사람이 투석하러 가는 날에는 같이 가서 끝까지 있다가 아내를 데려오곤 했다. 투석은 1주일에 3번 가야 하고 한번 받을 때 4시간여가 걸리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아내는 입맛이 없어서 때로는 점심도 먹지 않고 투석에 임할 때가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점점 허약해지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또다시 악재가 생겼다. 어느 새벽 누군가 집 초인종을 자꾸만 눌러서 아내는 침대를 내려서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고관절을 다쳐 그 즉시로 병원에 가니 수술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아들과 딸이 이때부터 아내를 보살피느라 나보다 더 고생을 많이 했다. 고관절 수술을 했지만, 원래처럼 걷기란 요원했다. 식구들 모두가 애썼지만 회복은 더디었는데, 2개월여 지난 어느 날 밤 급히 응급실을 찾아야만 했다. 한밤까지 진행된 검사에서 당분간 입원을 하라는 의사의 말이 있어서 새벽까지 임시병실에 대기하다가, 새벽에 그만 갑작스런 혈당 저하와 패혈증 쇼크로 숨을 거두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내가 42개월을 고통 속에 살았으니 그만 천국에 가서 안식과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께 칭찬받고 평안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생은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이제 나머지 인생을 내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또 자식들을 위해 주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먼저 떠난 아내의 삶을 돌아보니, 늘 겸손한 마음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 봉사해왔다. 궂은일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또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열심히 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사람의 선행을 따라갈 수는 없으나, 나의 남은 삶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보려고 한다. 집사람이 나로 인해 십자가를 먼저 지고 갔다고 생각하면 너무도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내가 섬김이 부족했고 우둔하여 평시에 아내를 잘 돌보지 못한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용서를 구한다. 나도 이승에서 삶을 마감하고 천국에 가면 집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함께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라고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선한 여정을 살아갈 것을 다짐해본다. [글=박두빈]

 

 

이정민 기자
작성 2021.06.12 11:48 수정 2021.06.12 12:08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정민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