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는 민족자존의 입장에서 중국을 바라본다는데, 이런 면에서 이데올로기에 굴절된 미국관, 중국관에서 벗어나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가 싱하이민 주한 중국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홍콩 문제를 언급한데 대해 뜨거운 댓글 성원이 답지하고 있다는 보도다.
지난 2021년 4월 15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글을 우리 다 함께 되새겨 보자고 아래와 같이 옮긴다.
[이태상 칼럼] 습근평(習近平) 중국(中國) 주석께 드리는 간언(諫言)
안녕하십니까.
잘 알고 계시겠지만 요즘 이곳 미국에선 반아시안 정서로 촉발된 피해 사례가 늘어가고 있습니다.강택민(江澤民)과 호금도(胡錦濤) 주석 님들 뒤를 이어 2013년 3월 14일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하셨을 때 나 또한 열광했습니다. 습(習) 주석 님의 인후지덕(仁厚之德)이 풍기는 인상부터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중국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 세계의 모범적인 지도자가 되실 것을 확신하고 기대가 컸습니다. 우리 한국의 백범 김구 선생님은 ‘인후지덕’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어지러이 걸어가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 사람들의 이정표가 될지니!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즐겨 쓰셨다는 이 표현은 1948년 남북협상으로 38선을 넘으며 인용한 것으로 유명한 문구이기도 합니다. 후손들에게 물려질 대한민국을 걱정하시던 그는 모든 것은 내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강조하며 조상 때부터 강조해오던 인후지덕을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든 일은 내가 앞서 행하니, 그것은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이는 사랑하는 자가 잘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이 추구했던 인후지덕이란 그런 것이다!”
예(禮)를 숭상했던 공자도 살고 싶어 했던 우리나라입니다. 물론 지금의 한국이 아니라 먼먼 옛날 우리가 ‘동이東夷’로 불렸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안희왕 10년 공자의 후손 공빈이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의하면 공자는 우리나라에 살고 싶은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지요.
“나라는 컸어도 다른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고 군대가 강했지만 침략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하여 다니는 이들이 길을 양보했으며(행자양로行者讓路), 먹는 이들이 밥을 미루고(식자추반 食者 推飯),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남녀이처이부동석男女異處而不同席)”는 것입니다.
길을 걸을 때도 “먼저 가시지요” 하며 길을 양보했고, 음식을 먹을 때 이웃이나 손님이 온다면 먼저 밥 먹기를 권했으며, 남녀가 하늘이 준 직분에 충실하다 보면 함께 섞일 겨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춘추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난국을 한탄한 공자는 ‘군자의 나라’ 동이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합니다.
제자가 ‘그곳은 누추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문화선진국에 누추가 웬 말이냐’고 일축했다고 전해집니다(是故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상대에게 저지른 무례의 만행을 돌아보며 스스로 반성해 봅니다. 우리 자신에게 주는 위안이고 격려이기를 바라면서 김구 선생님의 명문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꽃을 심는 자유다.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자유가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주는 것을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습(習) 주석님께서 집권하신 이후로 ‘동북공정도 모자라 김치에, 한복도 중국이 원조라며 중국의 검색 엔진들은 세종대왕, 시인 윤동주, 김연아 등 한국이 자랑하는 인물들을 모두 조선족으로 표기하고 한민족을 통째 중국 내의 한 변방 소수 민족으로 편입시키려는 것을 보면서 한국인의 부정적인 반중 정서가 악화하고 있습니다. 한(漢)지상주의를 내건 문화제국주의 행태라 할까요. 그 뻔뻔함에 질려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한국인의 반중감정은 반일감정 이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해마다 미세먼지가 날아든다, 꽃게 철이면 불법어로 중국어선이 서해바다를 까맣게 뒤덮는다, 그 중국이 툭하면 동북공정이니 어쩌니 하며 영토적 야욕을 드러내면서, 중국의 뻔뻔한 본색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시기는 2016년 북 핵 위협에 대비해 한국이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제(THAAD 사드)를 배치하자 중국이 온갖 보복 조치를 발동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기억이 생생한데 북경은 ‘중국스러움’을 계속 과시해오고 있습니다. 홍콩에서의 민주화운동 탄압, 신강성 위구르자치구에서의 인종청소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 은폐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바라보는 한국인을 포함한 모든 세계인의 시선은 점차 혐오로 변질되면서 반중감정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중국이라면 진저리를 내고 있다’는 세계 여론이 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중국 화교 출신으로 첫 주중 미국대사를 지낸 게리 로크(당시 64세)씨가 지난 2014년 3월 1일 퇴임에 앞서 중국 관영매체의 원색적인 비난을 받았었지요. 중국신문사(中國新聞社)는 2월 28일 “잘 가시오, 게리 로크”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그를 ‘썩은 바나나’로 지칭했지요. 겉은 노랗고 속이 하얀 바나나는 생김새와 달리 자신을 서양인으로 생각하며 사는 아시아인을 비하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이 사설은 “바나나는 오랫동안 놔두면 껍질은 썩고 하얀 속살도 까맣게 변한다”며 “화교 3세인 로크 대사가 미국 입장만 대변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를 내가 같은 동양인의 입장에서 풀이를 좀 해보자면 인(仁)과 덕(德)을 으뜸으로 삼는 동양왕도(東洋王道) 대신 인의(仁義)를 경시하고 무력(武力)과 금력(金力)을 중시하는 서양패도(西洋覇道) 패권주의의 앞잡이 광대라고 조롱한 것이었습니다.
노자(老子)가 ‘도덕경(道德經)’에서 밝힌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교훈처럼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접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말이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습니다.
“위인(偉人)은 그가 소인(小人)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의 위대(偉大)함을 보여준다. A great man shows his greatness by the way he treats little men.”
2013년 9월 12일자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페이지에 실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글 ‘러시아로부터 미국의 주의(注意)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읽고 나는 극히 외람되나마 전 세계 인류 가족에게 드리는 편지를 이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9월 10일 미국 대통령이 전 미국 국민에게 행한 연설문을 신중히 검토해본 결과, 미국 정책의 ‘예외성’을 강조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그 동기야 어떻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예외적이라고 생각하도록 독려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의 적절한 지적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 나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존재물이 동물, 식물, 광물 할 것 없이 다 같은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나는 굳게 믿습니다. 유사 이래 인류 대부분의 비극은 두 가지 사고방식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 하나는 독선독단적인 ‘선민사상(選民思想)’이고 또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세뇌되고 주입되어 온, 백해무익한 ‘원죄의식(原罪意識)’이라고 나는 봅니다. 우리 동양 선인들의 지혜로운 말씀대로 ‘피아일체(彼我一體)’와 ‘물아일체(物我一體)’ 곧 너와 내가, 모든 물체와 내가 하나임을 진작부터 깨달았더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좋아졌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너를 해치거나 도우면 나 자신을 해치거나 돕는 것이고, 자연을 파괴하거나 헤아릴 때 이는 나 자신을 파괴하거나 헤아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비주의자 야콥 뵈메 (1575-1624)가 말했듯이 “영원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 그 자체가 되는 그 일순간’인가 봅니다.
나 자신의 얘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1936년 12월 30일 지금은 북한 땅이 되어버린 평안북도 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차대전 종전으로 36년간의 일제식민지통치가 끝나면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때 나는 남쪽에 있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연방 미-소 냉전 긴장의 분출구로 동족상잔의 한국동란이 일어났으며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요행과 ‘죽기 아니면 살기’의 생존본능에 따라 모든 행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오다 보니, 세상에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2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나 현재 유일한 생존자로,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한국전쟁 당시 나이 열셋에 집 없는 거리의 소년이 된 나는 어린 나이에 길을 떠났습니다. 삶의 의미와 나 자신의 진정한 자아의식을 찾아서.
동양-서양, 남쪽-북쪽, 어디 출신이든 큰 그림에서 볼 때 우리는 우주라는 큰 바다에 표류하는 일엽편주(一葉片舟)와도 같은 아주 작은 별 지구에 사랑의 무지개를 타고(arainbow of love) 내려와 잠시 머무는 우주의 나그네 ‘코스미안(Cosmian)’입니다.
현재 있는 것 전부, 과거에 있었던 것 전부, 미래에 있을 것 전부인 대우주를 반영하는 소우주가 모래 한 알,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입니다. 이런 코스모스 우주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사람이라면 그 어느 누구에 게나 다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을 위해 우리 모두 하나같이 인생순례자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이 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 다 함께 ‘코스모스 칸타타(Cosmos Cantata)’ 합창을 부르며 하늘하늘 하늘에 피는 코스모스바다가 되기 위해…
16년 전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나는 다섯 딸에게 남겨 줄 유일한 유산으로 아빠가 살아온 삶을 짤막한 동화 형식으로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리 힘들고 슬프고 절망할 일이 많다 해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실연당한다 해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다는 것이 사랑 못 해보는 것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사랑하며 사노라면 우리는 비상(飛翔)하게 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43세가 되도록 제 눈에 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해 혼자 살아오던 내 둘째 딸은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특수부대 비행기 조종사로 의병 제대한 피부암 말기 환자로 암환자 기금 모금을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올린 블로그를 보고 교신 끝에 지난해 2월 16일엔 그의 임박한 장례식 대신 그의 삶을 축하하고 기리는 파티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성(城)에서 열었고, 3월 16일엔 에든버러 아카데미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 결혼식에서 나는 아래와 같은 시 한 편을 낭송했습니다. 이 시는 2013년 미국에서 출간된 우생(愚生)의 졸저(拙著) ‘코스모스 칸타타: 한 구도자의 우주여행(Cosmos Cantata: A Seeker’s Cosmic Journey)’의 출판사 대표이자 시인 도리스 웬젤이 써준 축시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남녀 한 쌍에게
내가 만난 적은 없어도 이 두 젊은 남녀는
이들을 아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이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네.
내가 만난 적은 없어도 이 젊은 연인들은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똘똘 뭉쳐 오롯이
호젓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의 축배를 높이 드네.
내가 만난 적은 없어도 이 두 사랑스런 영혼들은
저네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전 세계에 여운으로
남는 감미로운 멜로디를 창조하네.
결혼식을 올린 지 5개월 후 8월 24일 46세로 남편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딸에게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딸 수아에게
사랑하는 남편 고든이 평화롭게 숨 거두기 전에 네가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다 하고 그가 네 말을 다 들었다니 그 영원한 순간’이 더할 수 없도록 복되구나. 난 네 삶이 무척 부럽기까지 하다. 너의 사랑 너의 짝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 삶과 사랑을 그토록 치열하게 시적(詩的)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이 장수하여 백 년 이상을 산다 한들 한 번 쉬는 숨, 바닷가에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에 불과해 우주라는 큰 바다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니. 그러니 우리는 우리 내면의 코스모스 바다를 떠날 수 없단다.
사랑하는 아빠가
다음은 딸 아이의 조사(弔辭) 일부입니다.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도록 크나큰 행운이었는지, 우리가 같이한 13개월이란 여정에서 아무런 후회도 없고, 나는 내 삶에서 완벽을 기하거나 완전을 도모하지 않았으나 어떻게 우리 자신 속에서 이 완전함을 찾았으며, 우리는 불완전한 대로 완전한 사랑이란 절대균형을 잡았습니다.
(In September 2013, I wrote “An Open Letter: The Sea of Cosmos,” which was sent to U.S. President Obama and Russian President Putin.)
The Sept. 12, 2013, Op-Ed article in The New York Times: “A Plea for Caution From Russia” by Vladimir V. Putin, president of Russia, prompted me to write this letter to all my fellow human beings all over the world.
In concluding his plea, Mr. Putin says that he carefully studied Mr. Obama’s address to the nation on Tuesday (September 10, 2013) and that he disagreed about the case President Obama put forth when he stated that the United States’ policy is, “What makes America different. It’s what make us (the United States) exceptional.”
I, for one, concur with President Putin’s apt comment that “it is extremely dangerous to encourage people to see themselves as exceptional, whatever the motivation.”
From time immemorial, most, if not all, human tragedies have been visited upon us, in my humble opinion, by two major mindsets: One is the self-serving “chosen-species-racist” view, and the other is the harmful concept of “original sin” instilled in childhood.
I firmly believe in the truth that we, not only human beings, but all things in Nature are one and the same. We’d be far better off if we were enlightened early on to realize that we are related-part of each other-as the ancient aphorism goes: ‘피아일체’ “pee-ah-il-che” in Korean phonetic alphabet and ‘彼我一體’ in Chinese characters, meaning that “we (you and I) are one and the same.”
Another aphorism goes: ‘물아일체’ “mool-ah-il-che” in Korean phonetic alphabet and ‘物我一體’ in Chinese characters, meaning that “all things and I are one and the same.”
Simply put, when I hurt or help you, I’m hurting or helping myself; when I destroy or divine Nature, I’m destroying or divining myself.
Perhaps that’s why and how it’s possible that eternity consists of a flash of a lightning-like moment when we become the very object of our love, as the German mystic Jakob Boehme(1575-1624) believed.
Let me further present my case in point. Born in now-North Korea on December 30, 1936, I happened to be in the south when the country was divided at the end of World War II, which ended the 36-year-old colonial rule of Korea by Japan; hence the Korean War in the heat of the Cold War tension between the two super- powers, U.S.A. and Soviet Union, and its ongoing aftermath.
By virtue of serendipity and survival instinct of “sink or swim,” I’ve always counted every stroke of luck as a blessing and believed nothing was to be discarded.
Eleventh of 12 children and the last one still alive, I became fatherless at the age of five and homeless when I was thirteen during the Korean War, Consequently, I went on a journey at an early age, in search of the sublime in our human condition, seeking my cosmic identity in the greater scheme of things.
No matter where one is from, if we look at things from the big picture, we all are “cosmians arainbow of love” passing through as fleeting sojourners on this tiny leaf-boat-like planet earth floating in the sea of cosmos.
If each one of us, be it a grain of sand, a drop of water, a blade of grass, or a human being, is indeed a micro-cosmos reflecting a macro-cosmos of all that existed in the past, all that exists in the present, and all that will exist in the future, we’re all in it together, all on our separate journeys to realize that we all must sing the Cosmos Cantata together. No one is exceptional and all of us are exceptional.
When I was diagnosed with prostate cancer sixteen years ago, I started to compose a short, true story of my life in the form of a fairy tale for my five daughters as my only legacy. All I wanted to say in my writing was this:
Always changing and impermanent though life is,
Troubled and sorrowful though life is,
What a blessing it is to be born than not be born at all!
What felicity it is to love somebody,
Even if you may be crossed in love and heartbroken!
Isn’t it such a beautiful, blissful and wonderful experience?
To live and to love!
By so doing we learn to fly and to soar.
And a small portion of my daughter’s recent eulogy to her husband reflects those sentiments:
I spoke of how ridiculously lucky I felt to have met him.
How I had no regrets about anything on our journey.
I told him that I had never sought for perfection in anything in my life.
But that somehow, I had found it.
I had found it in “us.”
We were perfect.
Perfect in our imperfections too.
Our imperfectly perfect balance.
And Doris Wenzel, the American poet and publisher of my book Cosmos Cantata: A Seeker’s Cosmic Journey (2013), reflected on their exceptional lives in:
To The Couple I Do Not Know
I have never met those two young people,
Impressing those who know them,
Inspiring those who don’t.
I have never met those two young lovers,
Wrapped in devotion to one another,
Celebrating life alone and with others.
I have never met those two sweet souls,
Securing a world of their own
While creating a lingering melody for the world.
After I learned of his (Gordon’s) passing at the age of 46, I emailed the following short message to my daughter:
Dearest Su-a,
It is good to know that Gordon listened and understood what you had to say for an “eternal” hour before he stopped breathing and he was gone so “peacefully.”
Su-a, you are such an amazing girl. I’m even envious of you, not only for having found “the love of your life” but more for living it to the best, to the fullest, so intensely, so poetically, very short thought it was only for 13 months.
Even if one lives to be over a hundred, still it will be nothing but a breath, a droplet of waves breaking on the shore, returning to the sea of cosmos. Thus we never leave “the sea inside.”
Love, DadXX
어떻든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자연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해 온 서양 물질문명의 ‘원죄의식’과 ‘선민사상’에서 어서 탈피하여 한국의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홍익만물(弘益萬物), 다시 말해 천도교(天道敎)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온 세상에 펼치는 것이 답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우주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 말입니다.
우리 동양 몽고족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신앙처럼 받드는 다음과 같은 말을 깊이 되새겨 봅니다.
"강물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따 먹지 않는다.
햇빛은 스스로를 위해 비추지 않고
꽃들은 스스로를 위해 향기를 내뿜지 않는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이다.
네가 행복할 때 네 삶은 좋다.
하지만 너 때문에 남들이 행복하면
그것이 훨씬 더 좋은 삶이다.
남을 위해 살지 않는 자는
삶을 살 자격이 없다.
우리의 본질은 봉사하는 것이다."
"The rivers don’t drink their own water.
The trees don’t eat their own fruits.
The sun doesn’t shine for itself;
the flowers don’t give their fragrance
to themselves.
To live for others is nature’s way.
Life is good when you are happy;
but life is much better when others are happy
because of you.
Who doesn’t live to serve,
doesn’t deserve to live.
Our nature is service."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의 참된 소명이고 친인파(親人派/波) 친지파(親地派/波) 친천파(親天派/波) 친우파(親宇派/波)로서 상생(相生)과 공생(共生)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내가 나이 열 살 때 지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을 동시(童詩) ‘바다’와 또 내가 70여 년 전 소년시절 그려본 우리 모두의 자서시(自敍詩) ‘코스모스’를 습(習) 주석님과 나누고 싶습니다.
바다
영원과 무한과 절대를 상징하는
신(神)의 자비로운 품에 뛰어든
인생이련만 어이 이다지도 고달플까.
애수에 찬 갈매기의 고향은
정녕 출렁이는 파도 속에 있으리라.
인간의 마음아 바다가 되어라.
내 마음 바다가 되어라.
태양의 정열과 창공의 희망을 지닌
바다의 마음이 무척 부럽다.
순진무구한 동심과 진정한 모성애 간직한
바다의 품이 마냥 그립다.
비록 한 방울의 물이로되
흘러흘러 바다로 간다.
The Sea
Thou, symbolizing
Eternity, infinity and the absolute,
Art God.
How agonizing a spectacle is life
In blindness tumbled into Thy callous cart
To be such a dreamy sod!
The homeland of the gull
Of sorrow and loneliness full.
Where would it be?
Beyond mortal reach would it be?
May humanity be a sea of compassion!
My heart itself be a sea of communion!
I envy Thy heart
Containing passions of the sun
And fantasies of the sky.
I long for Thy bosom
Nursing childlike enthusiasm
And all-embracing mother nature.
Although a drop of water,
It trickles into the sea.
코스모스
소년은 코스모스가 좋았다.
이유도 없이 그냥 좋았다.
소녀의 순정을 뜻하는
꽃인 줄 알게 되면서
청년은 코스모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철이 들면서 나그네는
코스미안의 길에 올랐다.
카오스 같은 세상에서
코스모스 우주를 찾아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노인은
무심히 뒤를 돌아다보고
빙그레 한번 웃게 되리라.
걸어온 발자국마다
무수히 피어난
코스모스 발견하고
무지개를 좇는
파랑새의 애절한 꿈은
정녕 폭풍우 휘몰아치는
저 먹구름장 너머 있으리라.
사랑의 무지개배 타고
코스모스바다 위로
하늘하늘 날아보리
코스모스 칸타타 부르며
모두 다 아름답고
모두 다 경이롭고
모두 다 좋다고…
This is the Cosmian Song I’ve been singing all my life.
Cosmos
When I was a boy,
I liked the cosmos,
Cozy and coy
Without rhyme or reason to toss.
Later on as a young man,
I fell in love with the cosmos,
Conscious of the significance
Of this flower for me sure,
The symbol of a girl’s love pure.
As I cut my wisdom teeth,
I took on the Cosmian path,
Traveling the world far and near
In my pursuit of cosmos
In a chaotic world.
Upon looking back one day,
Forever longing, forever young,
Never aging and never exhausted
By yearning for cosmos,
I’d have found unawares numerous cosmos
That had blossomed all along the road
That I had journeyed.
The dreamland of the bluebird,
Looking for a rainbow,
Where could it be?
Over and beyond the stormy clouds,
Lo and behold, there it is,
The wild blue yonder
Where you can sail and soar
In the sea and sky of cosmos
Arainbow, chanting Cosmos Cantata:
All’s beautiful!
All’s wonderful!
All’s just well!
습(習) 주석님께서 강녕(康寧)하시기를 기원하면서 망언다사(妄言多謝)입니다.
2021년 4월 13일
미국 뉴저지주(州) 테나플라이에서
코스미안뉴스 회장 이태상 드림
“(미국) 공화당원들은 (트럼프) 그가 (지난해 첫 번 토론 때처럼 짐승이나 야만인같이 먹지 않고 식사용) 포크와 칼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그가 먹은 것은 여전히 똑같은 음식이었다.”
Republicans were relieved that he was eating with a knife and fork,” David Axelrod cracked about the debate. “But it was still the same meal.”
지난해 10월 22일의 미국 대선 전 마지막 TV 토론에 대해 오바마 선거 참모였던 데이빗 액샐로드(David Axelrod)가 한 이상과 같은 촌평을 인용하면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 (Maureen Dowd)는 2020년 10월 25일 자 칼럼 ‘킹 콩 트럼프, 정신을 잃다(King Kong Trump, Losing His Grip)’에서 그 근본적인 까닭을 이렇게 분석한다.
“트럼프는 (누가 봐도) 명백히 지진아(遲進兒)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기회주의와 냉소주의를 주입(注入), 세뇌시켰다. 네가 원하는 걸 잡아채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라. 너한테 유리하지 않은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그런 짓은 남의 밥이나 봉이 되는 패배자(敗北者)들의 몫이다.”
“Trump is clearly stunted. His father encouraged his opportunism and cynicism: Do what you need to do to grab whatever you want. And never do anything that is not in your own self-interest. That’s only for suckers and losers.”
그러면서 그녀는 그 당시 트럼프가 플로리다 유세에서 한 말 “정상적인 삶, 우리가 원하는 건 그 게 전부다. Normal life. That’s all we want.”를 인용하고 이렇게 칼럼을 끝맺는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정상이란 카오스일 뿐이다. (But his only normal is chaos.)”
그렇다면 이 명쾌한 진단과 결론이 어디 트럼프만의 문제인가. 우리 모두 온 인류의 자업자득으로 자초한 것이 오늘의 기후변화와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아닌가. 너 죽고 나만 잘살자 하다 보니 상리공생(相利共生)하지 못하고 너도나도 다 상해공멸(相害共滅)할 지경에 이른 게 아닌가.
그러니 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를 극복하고 카오스 같은 세상을 개명천지(開明天地) 밝고 아름다운 코스모스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지금 바로 우리 앞에 도래(到來)하였어라.
이웃을 착취하고 자연을 오염 우주질서를 파괴해온 서구 문명의 선민사상(選民思想)에 뿌리 박힌 인본주의(人本主義)와 자본주의(資本主義) 알을 깨고 부화(孵化)해서 우리의 본래 천성을 되찾아 자본주의(自本主義) 아니 우본주의(宇本主義)의 홍익만물(弘益萬物)과 인내천(人乃天)의 코스미안으로 우화(羽化)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말이어라.
뇌 중심 훈련방법과 프로그램인 뇌교육을 개발한 기업인이자 명상가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대학교 총장,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과 한국뇌과학연구원의 원장이며, 유엔글로벌콤팩트 (UN Global Compact)에 가입한 NGO인 국제뇌교육협회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사단법인 국학원과 명상교육기관인 주식회사 단월드, 그리고 기업교육인 유답을 설립한 호는 일지(一指) 이승헌(李承憲, 1950 - ) 박사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본래의 천성을 되찾아
양성養性이란 타고난 성품을 넓혀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타고난 천성은 원래 착하나
다만 사람 성품이 서로 섞여
물욕이 틈을 타 기승을 부리니,
본래의 성품 속에 깃든
착함을 잃고 욕심 쪽으로만 기울게 됩니다.
사람은 진실로 타고난 천성을 넓혀서
충실하게 하지 않으면
욕심으로 인해 천성이 점점 닳아 없어지니
그 근본을 잃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참전계경參佺戒經 제132事 양성養性
한민족의 창세신화 마고 이야기에서는
지금 인류의 역사가 ‘복본의 맹세’를
이루어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합니다.
본래 타고난 밝고 환한 양심을 회복하여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흔히 양심은 ‘좋은 마음’이라는 한자로 사용합니다.
여기에는 좋고 나쁘다는 판단과 가름이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비춰 태양처럼 밝고 환한 마음,
양심陽心을 회복하는 운동을 제안합니다.
단군의 홍익인간은 21세기 인류의 근본사상이라고 밝히는 그야말로 홍익인간의 해설서나 다름없다는 ‘신(神)과 나누는 대화(Conversations with God, a series of 10 books written by Neale Donald Walsch, 1943 - )가 지난 몇 년간 (137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었다.
미국 서부 세도나에서 열린 ‘세계명상축제’에서 이승헌 박사의 단학(丹學) 수련에 대한 강의를 듣고 단군사상에 매료되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전직 신문기자 도널드 월쉬는 그가 심취한 홍익인간을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 서울에 있는 사직공원의 단군사당을 찾아 참배했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킨 10권으로 된 이 책들은 37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이를 통해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을 연구하는 스터디그룹이 5백여 개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 골 빈 서구 사대주의 사상을 어서 졸업하고 우리 동양의 피아일체와 물아일체 사상으로 돌아가 자중자애(自重自愛)할 때가 왔어라.
한국에서 12년 동안 공연해 온 끝에 2013년 막을 내린 연극 ‘보지의 독백(The Vagina Monologue)’은 미국 극작가 겸 사회운동가 이브 엔슬러(Eve Ensler, 1953 - )가 1996년 200여 명의 여성을 인터뷰해서 여성의 성기를 소재로 쓴 작품으로 1996년 뉴욕 초연 이래 파키스탄 등 회교권 4개국을 포함해 전 세계 30여 나라에서 공연됐고, 한국에는 2001년 소개되었다.
여성 스스로 당당해지길 바랐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이 작품을 계기로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고 피해 여성을 돕는 ‘보지 날/ 브이데이(V Day)’ 운동으로 발전했지만 한국에서는 동양 최장기 12년 공연을 하고도 그걸 이루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고 국내 연출가 이지나 씨는 술회했다. 성경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기보다 힘들다고 했는데 고향을 잊어버린 사람들도 남녀불문하고 마찬가지 아닐까.
노래를 잊어버린 카나리아는 카나리아라고 할 수 없듯이 고향을 잊어버린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랍어로 낙타를 지칭하는 말이 700개가 있다는데 우리 모두의 고향을 가리키는 말은 세계 인구만큼 많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각자의 고향 어머니 모태 말이다.
그렇다면 ‘버자이너 모노로그’는 우리 모두의 고향고곡(故鄕呱曲 /故鄕古曲)이 아닌가. 세상에 반어법(反語法)이란 것이 있음을 나는 일찍 어려서부터 깨달았다.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고 하는 욕(辱) 아니 축복(祝福) 말이다.
2004년에 제작 상영된 멜 깁슨(Mel Gibson, 1956 - )의 미국 영화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 선풍적인 인기로 그 당시 어딜 가나 화제였었다. 예수의 수난은 그렇다 치고 우리 모두의 수난을 한 번 생각해보리라.
우리 모두 어려서 처음 배운 말이 어른들이 쓰는 ‘나쁜’ 말이 아니었을까. 우리말뿐이 아니고 일본어 영어에서도. 우리말로는 쌍시옷 자가 들어간다면 영어로는 사자성어(Four-Letter-Word), 게다가 못내 어머니까지 들먹이는 ‘제 에미 씹할’이란 ‘욕’이 왜 생겼을까.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몹시 의아스러워 궁금해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대오일번(大悟一番) 나는 각(覺)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아빠의 몸이 엄마의 몸속으로 들어가 춤을 추다 가장 황홀한 찰나에 애가 생기고 또 이 아이가 엄마 몸속에 서 신나게 차고 놀며 자라서는 아빠 몸이 출입했던 그 옥문(玉門)을 통해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런 욕이 생겼나 보다는 깨달음이었다.
구약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하늘 아버지와 땅 어머니 사이에서 난 아들딸이었다면 이 두 남매가 근친상간해서 인류의 후손이 퍼진 것 아닌가. 또 창세기에 보면 딸 자매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인 후 번갈아 윤간해서 애를 가졌다. 그렇다면 이것을 원죄(原罪)라기보다 윈복(原福)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인류의 모든 불행이 이 원리 때문에 생긴 것인지 모를 일이다. 어린애보고 넌 착하다 하면 착한 아이 되고, 나쁘다 하면 나쁜 아이가 되는가 하면 넌 못한다고 하면 못하고 잘한다고 하면 잘하게 되지 않든가. 시작도 끝도 모를 원죄로 자기혐오심만 키워 줘 자신을 미워하다 보니 남까지 다 미워하게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이웃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이제 때는 바야흐로 자칭 ‘선민(選民)’이란 서양 유대인이 아닌 동양 한국인의 창세기 ‘단군할아버지와 곰할머니 신화’로 돌아가 사랑의 무지개 타고 이 지구별로 잠시 놀러 온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과 본성을 깨닫게 해주는 코로나로 캄캄한 카오스의 시대가 저물고 밝고 아름다운 코스모스의 코스미안 시대가 밝아오고 있는 것이어라.
아, 그래서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도 일찍이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으리라.
The short quatrain reads: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t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of the East."
2020년 10월 24일 자 코스미안뉴스에 소개된 신간 ‘화제의 책’ <한반도에서 시작한 인류문명>에서 저자 최용완 씨는 한국인이야 말로 동아시아의 뿌리이며 세계 문명을 이끌어 온 인류문명의 어머니로서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역사를 가진 민족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슬프고 아픈 과거만 기억하는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시작한 문명과 문화는 서쪽으로 돌고 돌아 다시 동아시아로 돌아오고 있다. 그는 자랑스러운 한반도 민족의 정체성과 우리 선조들의 자부심을 이어받아 우리가 다시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며, 인류는 미성숙한 사춘기를 지나 예술과 과학, 정보의 힘으로 성숙하고 건강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반도 민족의 저력이 빛을 발하고 세계를 이끌어갈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고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지난해 여름 미국 플로리다주 제3선거구 출신 공화당 하원의원 테드 요호(Ted Yoho, 65세)가A.O.C.(Alexandria Ocasio-Cortez, 30세) 뉴욕 제14선거구 민주당 하원의원과 수도 워싱턴 국회의사당 청사 건물 층계에서 범죄와 경찰 행위에 대한 언쟁을 벌인 후 떠나면서 "개00/ 개00(a fucking bitch)"이라고 욕하는 걸 한 기자가 들었다.
미국 의회 역사상 최연소 여성 하원의원이 된 그녀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역사적인 순간이 아니었다. 2020년 7월 23일 목요일 미 국회의사당에서 요호 씨 같은 몰상식하고 저질스러운 (남성) 족속(族屬)들에게 그녀는 일장 훈시(訓示)를 했다.
"요호 씨는 아내와 두 따님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요호 씨의 작은 따님보다 두 살이 어립니다. 나 또한 어떤 누구의 딸이지요.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나의 부모님께 내가 두 분의 딸이고 내 부모님께서 내가 남자들의 언어폭력을 포함한 성폭력을 용납하도록 키우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Mr. Yoho mentioned that he has a wife and two daughters. I am two years younger than Mr. Yoho's younger daughter. I am someone's daughter, too…I'm here because I have to show my parents that I am their daughter, and that they did not raise me to accept abuse from men."
2015년 출간된 우생의 졸저(拙著) ‘무지코 칸타타’ 첫 장에서 내가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고(告)하는 글을 아래와 같이 옮겨 본다.
요즘 한국에서 여성 비하와 여성혐오가 전염병 번지듯 한다는 기사를 보고 팔십 노인이 같은 남성 동포 여러분에게 간곡히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남녀성별 불문하고 우리 모든 생물의 고향은 하늘(아버지)과 그 정기(精氣) 받은 땅(어머니) 바다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늘님’과 ‘땅님’이 결합한 ‘하나님’이 설혹 성별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라 하기보다 ‘하나님 어머니’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인류학적으로 고찰해 볼 때 여성을 여신(女神)으로 숭배하고 모계사회로 출발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돌연변이의 자폐아(自閉兒)가 태어나 ‘여신은 없다’고 선언하자 초심(初心)을 잃게 된 인류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퇴행(退行) 퇴화(退化)하면서 평화롭던 세계가 폭력과 전쟁으로 파괴되기 시작했다고 하지요.
우리 모두 남성의 씨를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여성의 모유를 먹고 자랐습니다. 물론 부성애도 필요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부성애라도 하찮은 모성애의 억만 분의 일도 못되고, 아빠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엄마 없으면 살 수 없는 게 아이들입니다.
이것은 인간세계뿐만 아니라 동물세계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얼마전 지인이 보내준 유튜브 영상을 보니, 수탉은 저 혼자 먹기 바쁜데 암탉은 모이를 쪼아 병아리 먹이느라 정신없더군요. 그런데 어찌 우리 남성이 우리의 영원한 엄마, 누이, 딸, 애인, 연인, 여신을 욕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정말 참으로 천벌(天罰), 지벌(地罰), 인벌(人罰)을 발을 일이지요.
그러니 우리 모두 고향을 잊지 말고, 연어처럼 회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궁창 오물통에 빠진 채 문전걸식(門前乞食)하다 문전객사(門前客死)하지 말고 사랑이라는 무지개를 올라타고 하늘하늘 코스모스바다로 돌아가십시다. 정, 남성들이 끝끝내 개과천선(改過遷善) 못 하겠다면 최후의 방책(方策)으로 극약처방(劇藥處方)이라도 있어야 하리라.
그래서 2016년 출간된 졸저 <가슴은 사랑으로 채워라(Fill Your Heart With Love)>의 28장(Chapter 28): ‘윤동주와 마광수, 사마귀 타령’을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특히 간절히 빌고 바라건대 교미 후에 수놈을 잡아먹는 사마귀 (praying mantis)처럼 전쟁과 폭력을 일삼는 모든 남성을 성교(性交) 후엔 인정사정(人情事情)없이 잡아먹어 치울 여성들의 출현을 죽도록 고대해 마지않는다.”
그러다 보니 정말 진실로 ‘꿈은 이루어지는 것일까.’ 2019년 9월 2일 코스미안뉴스 [항간세설]에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릴 수 있었다.
‘여성인류(Womankind)’가 부활하는 ‘코스미안시대’
2012년 출간된 ‘남성의 종말과 여성의 천지개벽 (The End of Men: And the Rise of Women)’이란 책이 오늘의 시대상을 정확히 진단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지성 월간지 ‘애트랜틱 (The Atlantic)’의 칼럼니스트인 한나 로진(Hanna Rosin, 1970 - )이 쓴 이 책은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1921-2006)의 ‘여성의 신비성(Feminine Mystique)’이나 시몬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의 ‘제2의 성(The Second Sex)’ 그리고 나오미 울프(Naomi Wolf, 1962 - )의 ‘미의 신화(Beauty Myth)’를 무색케 할 역사적인 저서로 지금까지 수천 년 지속되어 온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권력 이동의 맥을 짚어 부계사회가 끝나고 모계사회가 도래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섹스는 세상살이를 흥미롭게 하는데 필요한 전부를 제공한다며 2004년에 나온 서적 ‘여성의 성과 진화론(Sex, Time and Power: How Women’s Sexuality Shaped Human Evolution)’의 저자 레오나드 쉬레인(Leoanrd Shlain 1937-2009) 박사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욕망의 부조화를 탐구해 보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약 15만 년 전부터 인간 두뇌가 커지고 다른 동물들처럼 기는 대신 일어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우리 신체구조가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남자에겐 별 문제가 안 되지만 여자에겐 큰 위험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임신 후 몸보다 머리가 큰 아이를 협소한 질을 통해 출산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이 생기게 되었고 따라서 여성은 배란 주기에 섹스를 본능적으로 기피하게 되고 남성은 정반대로 더 굶주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쉬레인 박사는 그의 첫 저서 ‘예술과 물리학(Art & Physics: Parallel Visions in Space, Time & Light, 1991)’ 에서 예술이 언제나 과학에 앞선다며 피카소 같은 예술가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실마리를 풀어주었음을 그 한 예로 든다. 그 다음으로 쓴 그의 두 번째 저서 ‘알파벳 대 여신(The Alphabet Versus the Goddess: The Conflict Between Word and Image, 1998)’에서 저자는 더욱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둘러보라. 무엇이 제일 큰 문제인지 곧 알게 된다. 그것은 곧 배타적인 종교의 폐쇄성이란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한 권의 책 속에 일자일획의 오류도 없이 기록되었다고 사람들이 굳게 믿게 되자 인간은 이 ‘말씀’ 때문에 서로 죽이기 시작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인류는 본래 여성을 여신으로 경배해 왔다. 그러나 한 뿌리에서 생긴 고대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나타나 ‘여신이란 없다’고 선언하자 문화가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공격적이 되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 때문에 ‘사랑’을 빙자한 살육지변(殺戮之變)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문자가 서구문화에 끼친 엄청난 해독을 분석하면서 저자는 그 해독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절망하고 비탄만 할 일이 아니며 희망의 서광이 비치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최근에 와서 TV와 예술, 그림, 화상, 영상, 조각상 등 이미지의 폭발적인 파급으로 추방됐던 여신이 돌아오고 시각적으로 구전적으로 인류사회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편다.
지난 20세기의 대표적인 중국 문필가 임어당(林語堂Lin Yutang 1895-1976)이 지적했듯이 서양문명이 남성적이고 동양문화가 여성적이라면 평화와 사랑의 화합작용으로 생명을 만드는 동양의 음기가 전쟁과 폭력의 파괴행위로 목숨을 앗아가는 서양의 양기를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유치하고 상스러운 남성인류 (mankind)가 어서 사라지고 성숙하고 자비롭고 고상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여성인류(womankind)가 부활하는 코스미안시대(Cosmian Age)를 열어보리라.
1993년 바티칸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조치를 받은 신학자로 미국의 도미니코 수도회(Dominican Order within the Catholic Church) 신부 매튜 폭스 (Matthew Fox/Timothy James Fox, 1940 - )는 그동안 68개국어로 번역되어 수백 만 권이 팔린 ‘원복(原福 Original Blessing: A Primer in Creation, 1983)’과 ‘우주 그리스도의 도래(The Coming of the Cosmic Christ, 1988)’를 포함한 35권의 저서를 통해 신(神 God)을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라 부르며 인간의 ‘원죄(原罪 Original Sin)’가 아닌 본래 면목(本來面目), 본래성불(本來成佛)로서의 본래축복(本來祝福)인 ‘원복(原福 Original Blessing)’을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주된 관심사는 공해(公害)로부터 자연환경 보호와 사회정의(社會正義)를 구현(具現)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인류와 자연의 신비로운 기원과 내력을 부정하는 남성지배, 인간중심, 그것도 백인위주의 권위와 특권이란 보수적인 전통을 보존코자 했었다면 유감스럽게 생각 했을 것” 이라고 파계승(破戒僧)이 된 데 대해 그가 한 말이다.
“습기(濕氣), 그것이 바로 삶이며 생명이다. 늘 축축하게 젖어 있고 변하는 것이. 사람이고 집단이고 간에 건조해지면 굳어져 금이 가고 부스러진다. 그러면 파시즘(fascism)이 기어든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민속신앙의 마법을 쓰는 마녀나 아프리카 토인부락의 북치는 고수(鼓手)나 아메리카 인디언 마법사나 동양의 무당들을 서양의 신부나 목사와 동일시하고 이들 모두 다 인간의 영적 (靈的)인 영성(靈性)을 다루는 사람들로 서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문화인’과 ‘미개인’이 따로 없다며 어쩌면 ‘미개인’이 되레 인간 심신(心身)의 공해(公害)를 모르도록 축복받아 개명한 사람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런데 그 더욱 신기하게도 그의 첫 저서로 그의 처녀작 (총각작 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지만)은 그 제목이 ‘음악적으로 신비한 곰 한 마리가 되는 것: 미국식 영성(靈性) On Be- coming a Musical, Mystical Bear: Spirituality American Style, 1972)’이다.
아, 옳거니, 우리 모두 어서 단군신화로 돌아가야 하리라. 세계 인류 모두가 말이어라. 아, 정녕, 단군 할아버지, 아니 우리 곰 할머님, 곰 어머님, 곰 따님 만세, 만만세로다..
‘검은 고라니 사슴(Black Elk)’이라 불린 북아메리카 인디언 마법사(Hehaka Sapa, commonly known as Black Elk, 1868-1950)가 병든 사람이나 동식물을 위해 외던 주문(呪文) 가운에 이런 것이 있다.
‘땅 할머니시여,
내 말 좀 들으시오.
당신 품 안에서
우리는 관계를
맺고 있지요.
두 다리, 네 다리, 날개 달린 짐승,
그리고 당신 몸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 다 당신의 자손들이지요.
그러니 우리 모두 다
서로 친척임을 알지라오.
미대륙의 원주민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우리 한민족과 같은 몽고족이라 하지 않나. 그렇다면 단군 할아버지 아니 우리 곰할머니께 빌어 볼거나.
비나이다
비나이다
물아일체
피아일체
홍익인간
홍익만물
인내천
우주인
나그네
코스미안
동식광물
하늘과
별들과
바다와
그 속에
숨 쉬는
모든 것
숨 멈춘 듯 한
무생물까지도
나 자신으로
느낄 수 있게
깨우쳐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모두 어서 원초적으로 축복 받은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임을 깨닫도록...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