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3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에 이장근 ‘바닥을 모시는 자들’에 대한 반칠환 시인의 다음과 같은 멘트가 실렸다.
‘바닥을 모시는 자들’
머리에 밥 쟁반을 이고 가는 여자
손으로 잡지도 않았는데
삼층으로 쌓은 쟁반이
머리에 붙은 것 같다
목은 떨어져도
쟁반은 떨어질 것 같지 않은
균형이 아닌 결합이 되어 버린 여자
하늘 아래 머리 조아릴 바닥이 있다면
바로 저 여자의 머리
머리를 바닥으로 만든 머리
바닥에 내려놓고 파는 물건이
대부분인 시장통을
그녀가 간다
채소 가게 앞에 다다르자
주인 내외가 다가와
쟁반 하나를 내려 놓는다
바닥을 모시는 자들의 단합이랄까
그녀의 바닥에서 그들의 바닥으로
따끈한 밥 쟁반이 옮겨 간다
보통사람들은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지만, 목수는 바닥부터 그린다고 한다. 주추를 놓고,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놓는 그들은 하늘이 집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땅이 실어주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높은 것들은 낮은 데서 시작한 것이다. 삼층 쟁반탑을 이고 붐비는 시장통을 자재로이 통과하기까지 여자의 발바닥은 얼마나 많은 바닥을 디뎠을까. 바닥이 없으면 하늘이 없고, 바닥을 잊으면 바닥에 넘어진다. 그러나 바닥은 언제라도 제게 넘어진 자가 되짚고 일어서도록 어깨를 내어준다.
-반칠환 시인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영어를 배우면서 ‘사랑에 빠지다’는 뜻으로 ‘falling in love’란 말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사랑’이 좋은 것이라면 긍정적으로 ‘오르다 rising’라고 하는 대신 왜 부정적인 ‘떨어지다/빠지다 falling’라고 하는 것일까. 혼자 궁리에 궁리를 해봤다.
‘사랑love’의 상징적인 글자 ‘ㅇ’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다 보면 온몸이 열을 받아 충만해져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하늘로 치솟아 올라 물방울이 온 우주가 되듯 하늘과 땅이 하나 되어 그야말로 구멍 ‘hole’이 전부/전체 온통 ‘whole’이 되나 보다고 내 나름의 풀이를 했다.
히브리어로 ‘타~하~’하면 갓 태어난 어린애가 처음으로 눈을 뜨고 세상 모든 것에 놀라워하는 경이로움이란 뜻이라고 한다. 아, 그래서 노벨문학상(2013) 수상의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Alice Munro(1931 - )도 “행복한 항심恒心은 호기심이다 The constant happiness is curiosity”라고 했으리라. 그러니 ‘오르기’ 전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으랴.
술 취한 취객들 앞에서 악기로 흘러간 옛 노래를 연주하는 악사가 발견하듯 예술가의 진짜 고향은 창조물 창작품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찾을 수 있다고 체코 출신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 )는 그의 작품 ‘익살The Joke’ (1967)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이 노래들 속에서 행복했다. 슬픔이란 것이 가볍지도, 웃음이란 것이 구긴 얼굴도, 사랑이란 것이 우습지도, 그리고 미움이란 것이 겁먹은 것도 아닌,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곳이다. 이 노래들이 내 고향이었다. 그리고 이 고향을 내가 버리고 떠났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이곳이, 이 노래들이, 그 더욱 애틋하고 애절하게 잊힐 수 없는 노래, 돌아가야 할 내 고향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들은 오직 기억과 회상일 뿐,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우리가 상상으로 보존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자, 이 내 고향 집이 서 있는 땅이 내 발밑에서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따라서 나도 함께 세월이란 깊은 강물 아니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사랑은 사랑이었고 아픔은 아픔이었던 곳, 깊고 더 깊은 못 심연 속으로.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고향 집은 바로 이 하강下降, 이 추구의 열망 가득 찬 추락墜落이라고. 이 향수에 젖은 낙향落鄕의 감미로운 혼미상태昏迷狀態로 빠져들어 갔다.”
아, 이것이 참으로 역설逆說의 진리였구나.
떠나와야 돌아가게 되고 떨어져야 떨어질 수 없지.
아, 그래서, 그리하여서, 잃는 것이 얻는 것 되고
주는 일이 받는 일 되며 가는 길이 오는 길 되고
내리막이 오르막 되며 먼저 비워야 채워지게 되고
낮춰야 높아지게 되며 낙엽이 져야 새잎 돋아나고
해와 달도 져야 또 뜨며 내쉬는 숨 들이쉬게 되고
내리는 비구름 되어 오르며 마음에 담아야 꿈도 꾸게 되지.
아, 그렇군, 정말 그렇군. 기쁨이 슬픔의 씨앗 되고
아픔 끝에 즐거움 있지. 태어남이 죽음의 시작이고
죽음 너머 새 삶 있겠지. 적어도 영원한 기억으로 남아.
아, 정말 정말로 그래서 떨어져 떨어져 봐야 임이고
떠나와 떠나와 봐야 고향이지. 그래서 임도 고향도
다름 아니고 못내 사무치는 그리움이지. 임도 고향도
너와 나 우리의 그리움 뿜어내는 사랑의 길고 긴 숨이지.
우주 만물 모두 다
‘나’ 코스모스이어라.
숨을 쉬고 있는 생물이든
숨을 멈춘 듯한 무생물/무기물이든
모두다 하나같이 소우주 코스모스로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 코스미안이어라.
All things in the Cosmos,
no matter whether they appear
to be breathing organisms or
Inorganic/inanimate matter
that seem to have stopped breathing,
are none other than 'I' the microcosm
of the Cosmos, namely, Cosmian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