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우리가 볼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족하리

이태상

 

2021년 9월 23일자 미주 뉴욕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삶과 생각] 칼럼 '괜찮아, 연습이야' 필자 이수진 프리랜서 작가는 "숨을 쉬고 있는 한, 예외 없이 실패는 찾아 올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 삶의 여행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자문한 후 이렇게 자답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익숙한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하고 화살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리듯 미국으로 던져진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바로 실패라는 과녁이었다.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이 무엇인지, 선생님의 이름은 무엇인지,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나의 눈과 입과 귀는 한꺼번에 깊은 바다 속에 잠겨 매일 낙담하고 좌절해야 했다.

7학년 여름, 그날도 나는 여전히 실패 중이었다. 문학 수업에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는 과제가 있었는데, 어렵고 긴 이 소설에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코피가 흘러 교실 바닥까지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 참았던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놀란 선생님이 나를 교실 밖으로 불러내 돌돌 말은 휴지로 코를 막아주는데, 일 년 내내 눌러오던 설움과 울분이 비집고 나왔다. “친구들이 나를 자꾸 놀려요. 나는 이렇게 긴 책을 영어로 읽을 수가 없어요. 한 문장을 쓰는 것도 불가능해요. 배도 고프고 집이 그리워요. 저는 못 하겠어요. 이렇게 실패하는데 무슨 의미예요.”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시끄러운 내 불평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의미가 있지, 연습이라면. 이 과제를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네가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해보면 어떨까?” 그날 밤, 나는 다 낡아버린 단어 사전을 뒤적이며 책을 겨우 정독하고, 주인공들의 모습과 감정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큰 도화지 두 장에 글이 아닌 그림을 그렸다. 다음날 선생님은 소리를 크게 한번 지르고 교실 중앙에 내 그림을 걸었고, 그 다음해부터 나는 미국 아이들에게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 상위권 반에서 당당히 영어 수업을 들었다. 새롭고 더 좁아진 실패의 과녁을 마주하며.

우리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것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칙이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진부한 새해 다짐을 할 때도, 내일 시험을 위해 밤을 새울 때에도, 처음 배우는 악기를 손에 잡을 때도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우리의 자아가 속삭인다. 숨을 쉬고 있는 한, 예외 없이 실패는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 삶의 여행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우리에게 매일같이 찾아오는 실패의 순간들이, 앞으로 더 많이 다가올 찬란하고 어려운 과녁들을 향해 용기 있게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연습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수진 / 프리랜서 작가>

오늘 아침 지인으로부터 카톡으로 받은 글을 옮겨본다.

괜찮아질 겁니다

굳이 괜찮은 척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질 겁니다. 

모두가 서툴더라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서툴더라도 좋은 사람이 되고픈
마음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정말 괜찮습니다. 
걱정이 있고
그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고민이 있고 그 안에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괜찮아지지 않더라도, 

우리 오늘 괜찮습니다. 
괜찮아지고 싶어도 괜찮지 않을 때,

그럴 때 우리는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위로와 희망 같은 걸 찾아냅니다.

- 정영욱의《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중에서 -

* 요즘은 노력해 봐도
노력대로 안 되는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일이 꼬이고 꼬여 깊은 한숨을 쉬었죠. 
그러나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보게 되고, 동질의 아픔을 나누고, 펑펑 울고, 조금은 기분이 풀리고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직도 삶은,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 괜찮다고 감히 말해 봅니다. 

마음만큼 생각만큼 다 되진 않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치유와 희망을 얻습니다

지난 2010년 9월 4일자 뉴욕타임스 [토요일 프로필The Saturday Profile] 고정난에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된 최상헌기자의 특종기사가 실렸었다.  

그 내용은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960 번이나 시험을 보고 또 본, 서울에서 112마일 남쪽으로 떨어져 있고 산으로 둘러싸인 완주군 신청이란 마을에 사시는 69세의 할머니가 659 번 떨어진 후 960 번째 합격하셨다는 기사였다.  

혼자 사시는 차사순이이란 이 할머니는 60세가 넘도록 애들 넷 키우느라 농사일과 야채장사 하시느라 정신없이 지내시다가 2005년 4월부터 매일 두 시간에 한 번 오는 시골버스를 타고 전주시까지 나가 필기 시험에서만 949번 떨어지고 950 번째 100점 만점에 가까스로 60점을 받아 합격한 다음 또 실기 시험에서 계속 떨어지다 드디어 960 번째 합격하셨다는데 손자 손녀 애들 동물원에 차 태워 데려가고 싶어 운전면허를 따게 되셨다고 한다.  

이 소식이 널리 전해지자 현대 기아 그룹에서 미화 $16,800짜리 SOUL 자동차 한대를 할머니에게 기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다짐했었다.  나는 차사순 할머니보다 두 배 이상 노력해봐야겠다고.  그 당시 나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내 애들에게 물려줄 유일한 유산으로아빠가 살아온 삶을 간략히 동화 형식으로 작성해본 짤막한 원고를 한국의 여러 출판사에 문의하고 있을 때였다.  천여 군데로부터 거절당한 끝에 2011년 6월 1일 자연과인문에서 '어레인보우: 무지개를 탄 코스미안'이란 제목으로 책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영문으로 새로 써서 2 천여 미국 출판사에 문의해온 끝에 2013년 가을 '코스모스 칸타타: 한 구도자의 우주여정 Cosmos Cantata:  A Seeker's Cosmic Journey'이란 제목의 영문판이 Mayhaven Publishing, Inc. 에서 출간되었다.  

자, 이제 지난해 (2020년 5월 26일자와 12월 28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우리 다시 한 번 반추해보자.

[이태상의 항간세설] '지상의 삶은 우리 모두의 갭 이어(gap year)'

“린든 존슨 대통령 같은 사람이 그랬을지 모를 정도로 이 백악관 자리를 탐내지 않은 나로서 결코 잃지 않은 것은 내가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 난 국민건강보험 법안에 서명한 것이나 유엔에서 연설한 것이 아니고 내 딸들과 보낸 순간을 기억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The one thing I never lost, in a way somebody like L.B.J. might have – who was hungry for this office in a way I wasn’t – is my confidence that, with my last breath, what I will remember will be some moment with my girls, not signing the health care law or giving a speech at the U.N.”
 
2016년 5월 초에 백악관에서 영화와 브로드웨이 쇼에서 미국 제36대 대통령(1963-1969)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1908-1973)으로 분한 배우 브라이언 클랜스턴(Bryan Cranston, 1956 - )과 가진 대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한 말이다.
 
이 말에 청소년 시절 읽은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의 단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ich, 1886)이 떠올랐다.
 
모범생으로 법대를 나와 판사가 되고 러시아의 상류사회로 진입, 출세가도를 달리던 40대 이반 일리치가 새로 장만한 저택 커튼을 달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면서 마지막 순간에 그가 기억하고 위안받는 건 다름 아닌 그의 어린 시절 벗들과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 서리해온 설익은 자두를 입에 물었을 때 그 시고 떫은 맛을 감미롭게 떠올리는 것이었다.
 
숨을 거두는 순간 나는 뭘 생각하게 될까. 얼핏 떠오르는 건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진 않았어도 2008년 9월 25일 조산아로 태어나면서부터 내 외손자 일라이자(Elijah)와 지난 12년 가까이 같이 보낸 순간순간들일 것 같다. 천국이 따로 없었음을 너무도 절실히 절감하게 되리라.
 
최근 3, 4년 전부터 ‘갭 이어(gap year)’란 단어가 미국에서 매스컴의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큰 딸 말리아가 하버드대 진학을 1년 미루고 갭 이어를 갖는다는 뉴스때문 이었다.
 
이 ‘갭 이어’란 고교 졸업생이 대학 진학을 늦추고 한 학기 또는 1년간 여행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회경험을 통해 진로를 모색하는 기간을 말한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선 일반화된 제도이지만 미국에는 2000년대 들어 하버드대, 예일대 등 아이비리그를 중심으로 도입되어 실시되어 오고 있다.
 
1978년 여름, 나의 세 딸들이 여섯, 일곱, 아홉 살 때 영국을 떠나 우리 가족이 하와이로 이주, 한국과 미국 각지로 6개월 동안 여행하고 애들 음악교육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한 학기 학교 수업을 몽땅 빼먹었는데도 애들 학업성적이 뜻밖에도 전보다 뒤지기는커녕 더 좋아져서 놀란 적이 있다.
 
어떻든 우리 달리 좀 생각해 보자. 이 지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얼마 동안 이 지구별에 머물게 되든,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으로서 우리 모두의 삶이 ‘갭 이어’라 할 수 있지 않으랴. 이 지구촌에서 수도(修道)의 세상 경험을 쌓으며 각자의 우주적 진로를 탐색해 보라고 주어진 기회가 아닌가.
 
최근 역사에서 극히 대조적인 삶을 살다 간 한두 사례를 생각해보자. 같은 서유럽이라는 공간(영국과 오스트리아)과 엇비슷한 시간(1889년 4월 16일과 20일)에 출생한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과 아돌프 히틀러(1889-1945), 그리고 일제 강점기인 식민지 치하 조선 인으로 1917년 태어난 윤동주와 박정희 말이다.
 
‘천국은 네 안에 있다’고 예수도 말했듯이, 우리가 이 지상에서 천국을 보지 못한다면 지구 밖 우주 어디에서도 천국을 찾을 수 없으리라.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여기에 있다고 하고 저기에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누가복음 17장 21절에 쓰여있다.
 
조물주 하느님이 지구를 포함해 우주의 모든 별들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지구란 별 자체가 하느님 나라이고 인간은 물론 만물이 다 하느님의 분신(分身/分神)들이 아니면 무엇이랴!
 
흥미롭게도 이 하느님의 분신이었을 히틀러를 소년 크기의 조형물로 표현해 뒤에서 보면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이 형상이지만, 앞에서 보면 두 손을 맞잡고 콧수염을 기른 우울한 모습의, 이탈리아 행위예술가이자 조각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Maurizio Cattelan, 1960 - )의 작품이 지난 2016년 5월 8일 뉴욕 경매에서 1,719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00억 8,500만 원에 낙찰됐다.
 
인간을 포함해 만물이 하느님의 분신이라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히틀러나 김정은 같은 폭군이 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이 모두가 착하게만 살도록 미리 프로그램이 되어 있었다면, 그건 결코 하느님의 분신이 아닌, 너무도 재미없는 로봇에 불과할 것이다.
 
다른 모든 우주 만물과 달리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전과 특혜가 있다면 우리 각자가 각자의 삶에서 성군도 폭군도 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 아닐까. 인간 이상의 신격神格으로 승화될 수도 아니면 인간 이하의 수격獸格, 아니 짐승만도 못한 그 이하로 전락할 수도 있는, 다시 말해 각자의 삶을 천국으로도 아니면 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는 자유 말이어라.
 
그럼 어떤 삶이 천국이고 어떤 삶이 지옥일까? 모름지기 후회 없는 삶이 천국이라면 후회스런 삶은 지옥이 되리라. 깊은 이해와 용서와 사랑의 삶이 후회 없는 것이라면, 오해와 분노와 증오의 삶은 후회만 남기는 것이리라.
 
친구가 보내준 ‘순간의 분노가 평생 후회를’이란 글을 통해 그 한 예를 들어보리라.
 
“중국을 통일하고 유럽까지 정복한 칭기즈칸은 사냥을 위해 매를 한 마리 데리고 다녔다. 그는 매를 사랑하여 마치 친구처럼 먹이를 주며 길렀다. 하루는 사냥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매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자신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다. 가뭄으로 개울물은 말랐으나 바위틈에서 똑똑 떨어지는 샘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을 잔에 받아 마시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바람소리와 함께 자신의 매가 그의 손을 쳐서 잔을 땅에 떨어뜨렸다. 물을 마시려고 할 때마다 매가 방해하자 칭기즈칸은 몹시 화가 났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주인의 은혜를 모르고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한쪽 손에 칼을 빼 들고 다른 손으로 잔을 들어 물을 다시 받았다. 잔에 물이 차서 입에 대자 또 다시 바람 소리와 함께 매가 잔을 들고 있는 손을 치려고 내려왔다. 칭기즈칸은 칼로 매를 내리쳤다. 그가 죽은 매를 비키면서 바위 위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죽은 독사의 시체가 샘물 안에 썩어 있었다.”
 
우주의 축소판이 모래 한 알이고, 물 한 방울이며, 영원의 축소판이 한순간이라면, 우린 모두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자신이 사랑하는 그 대상을 통해 온 우주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지상의 ‘갭 이어’를 잘 활용해 그 더욱 경이로운 우주 여정에 오르게 되는 것이리.

[이태상 칼럼] '청춘별곡 3곡(曲)'

“넌 동물이야”란 말이 왜 모욕적일까 하고 나는 의아(疑訝)해한다. 왜냐하면 만일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너는 인간이야”라고 하는 게 그들이 가장 즐기는 모욕적인 말일 테니까. I sometimes wonder why “You’re an animal” is an insult; it seems to me that, if animals could talk, “You’re a human” would be one of their favorite insults.”
 
미국의 마술사(magician) 리처드 E. 터너 (Richard Edward Turner, 1954 - )의 말이다.
 
“어떻게 동물들이 사물들을 이해하는지 난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들이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에겐) 말 아닌 언어가 있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언어를 알아듣는지 모를 일이다. 어쩜 모든 사물엔 영혼이 있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른 영혼에게 언제나 말할 수 있는가 보다. How it is that animals understand things, I do not know, but it is certain that they do understand. Perhaps there is a language which is not made of words and everything in the world understands it. Perhaps there is a soul hidden in everything and it can always speak, without even making a sound to another soul.”
 
이것은 영국 태생의 영국계 미국인 작가 프란시스 호지슨 버넷 (Frances Hodgson Burnett 1849-1924)의 아동 소설 작품 ‘어린 공주(A Little Princess, 1905)’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 인간도 이렇게 서로 소통에 별문제 없고 자급자족(自給自足)하는 동물의 일종인데 어쩌다가 별종(別種)의 코로나 변종(變種) 바이러스 같은 존재로 진화(進化) 아닌 퇴화(退化) 타락(墮落)하게 되었을까. 모름지기 ‘잘못된 가정/학교/사회 교육’ 때문이리라. 따라서 청춘별곡(靑春別曲) 3곡(曲)을 아래와 같이 우리 다 함께 불러볼거나.
 
제1곡(曲): 경애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에게 띄우는 제3신(信)
 
안녕하십니까.
 
오늘 (2020년 12월 7일자 ) 코스미안뉴스에 인용 보도된 다음과 같은 글을 접하고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7일 자신의 트위터에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다’라는 진리이다."라고 밝혔다.
 
뜻밖에 하루키 작가님 같은 동지(同志 kindred spirit)를 글로나마 만나 뵙게 되어 너무도 기쁜 마음과 감격에 벅차 지난 12월5일 코스미안 뉴스에 올린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에게 띄우는 제2 신(信)에 이어 이렇게 제3신(信)을 또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진짜 ‘학교’는 인생 아니 우주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 애담스(Henry Adams 1838-1918)도 “카오스는 자연의 법칙이고 질서 -제가 의역(意譯/義譯)해 단어를 좀 바꿔 쓰자면-코스모스(Cosmos)는 인간의 꿈이다. (Chaos was the law of nature; Order was the dream of man.)라고 했다지 않습니까.
 
보스턴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에서 교육받고 역사를 가르친 그는 ‘헨리 애담스가 받은 교육(The Education of Henry Adams, 1907)’이란 그의 자서전 머리말에서 그가 받은 학교 교육의 결점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교육은 쓸데없을 뿐만 아니라 해(害)로운 것이었다고 했지요.
 
“우린 한 번의 기회가 있을 뿐이다. 하루하루 날마다 선행(善行)을 하면 저 세상 영(靈)의 세계로가 다른 선인(先人/善人/仙人)들 을 만날 것이다. 그곳에 있는 저울에 네가 한 모든 일들을 달아 보고 네 악행(惡行)이 선행(善行)보다 무거우면 넌 그만이다. 바람에 흩어지는 숨 일 따름이다. 사는 동안 동정심(同情心)을 가져야 한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거든 자선(慈善)을 베풀라. 네가 주는 동냥으로 걸인(乞人)이 술을 사 마신다고 해도 네가 걱정할 일 아니다. 술 마시는 것이 네가 아니고 너는 이미 너의 선행을 한 셈이니까. 이 바쁜 세상에서 너는 긴장을 풀어야 한다. 잠시 앉아서 생각하는 동안 너는 사물(事物)을 똑바로 제대로 볼 수 있다. 삶이 무엇인지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네가 정말 꼭 필요로 하는 것을 기도로 말하고 네 머리가 나쁜 생각 하지 못하도록 네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그리고 조물주(造物主) ‘와칸 탄카(Wakan Tanka)’와 접촉을 해야 한다. 그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계시고 그는 다 보고 계신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너는 너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삶이 뭐냐?’는 물음에 네가 답하는 것이다. 남이 나를 인도하고 지도할 것을 기대하지 말라. 너 스스로 해야할 일이다. 네 행동, 네 생각(生覺)과 사고(思考)로  사는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은 바로 네 자신 속에 있다.”
 
이것은 미국 남 다코타주(州) 우뚝 선 바위란 뜻의 인디언 보호 지역 스탠딩 록(Standing Rock Reservation)에 살던 한 다코타 인디언 마법사의 말이지요.
 
또 다음은 미국의 세균학자로 소아마비 예방접종 백신을 개발했고 후천면역결핍증후군 에이즈(AIDS) 예방접종약을 만들어 내기 위한 연구에 전념했던 조너스 솔크(Jonas Salk 1914-1995)의 말입니다.
 
삶의 의미란
인간관계를 통해 느껴지는 것…
 
다른 사람들
나의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 아닌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태어나는 순간의
나로부터 어떻게
한 아이로서 한 어른으로
한 부모로 한 조부모로
그리고 결국 끝장에 이르러
한 조상으로
얼마만큼 성장하고
발전하며 변하는가
그런 관계에서
 
삶의 의미는
모든 관계를 통해
꽃처럼 피어나는 것
 
자식 낳아 키우고
가르치고 봉사하고
창조하고 그러는 데서
 
뿐만 아니라
배우는 데서
자연으로부터
현자(賢者)로부터
벗과 동배(同輩)들로부터
그리고 그 누구 무엇보다
그 언제까지나
끝없는
자아완성(自我完成)
자아실현(自我實現)
과정(過程)을 통해
날로 새롭게
성장하는 자신으로부터
 
지난 2019년 11월 2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愚生)의 졸문(拙文) 하나 하루키 작가님과 나누고 싶어 아래와 같이 옮겨 드리오니 망중투한(忙中偸閑)으로 일독해주십시오.
 
인생보고서

지난 2008년 미국 카네기 멜런 대학의 컴퓨터과학 교수 랜디 파우쉬(Randy Pausch 1960-2008)는 췌장암으로 47세에 타계하기 10개월 전 행한 그의 마지막 강의(The Last Lecture)에서 뭣 보다 동심(童心)의 경이로움을 강조했다.

의학적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았다 해도 이 세상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생물학적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태어났지만 그래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 입장에선 누구나 다 후손과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스(David Brooks)는 2011년 11월 29일자 칼럼에서 그의 요청에 응답한 수많은 70세 이상의 독자들이 보내온 ‘인생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된 교훈을 도출했다.
1, 연속과 단절

불행한 사람들은 시간을 연속된 흐름으로 보고 표류해왔나 하면 그 반대로 행복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몇 장으로 분류해 챕터 (Chapter)별로 각자의 삶을 재설정 정립,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거나 개척해왔다.
2. 반추와 성찰

불행한 사람들은 언짢은 일들을 계속 반추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가 하면 그 반대로 행복한 사람들은 궂은일들은 속히 잊어버리고 용서하며 좋은 방향으로 되돌려 왔다.
3. 도로(徒勞)와 포기

불행한 사람들은 포기할 줄 모르고 전혀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는가 하면, 행복한 사람들은 아니다 싶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가능성에 도전한다. 특히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다.
4. 안일과 모험

미인은 용자(勇者)의 차지라는 말처럼 안일을 도모한 사람은 모험 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 한 사람들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만족해한다.
5. 반골(反骨/叛骨)과 수용(受容)

가정이든 회사든 사회든 제도권 밖에서 ‘이방인’으로 떠돈 사람 들은 불행하고 제도권 안에서 노를 젓는 사람은 행복하다.

얼마 전 (2013년 1월 20일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ZL Technologies 회사 공동창립자 겸 대표인 콘 리옹(Kon Leong) 씨는 젊은이들에게 아주 적절한 조언을 했다. 

“자기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Try to find your sweet spot...The sweet spot is the intersection between what you’re really good at and what you love to do."

또 얼마 전 (2013년 2월 10일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Live Person 회사의 창립자 겸 대표 로보트 로카시오(Robert Lo Cascio) 씨는 자기 회사 사훈(社訓)에 철저하게 입각해 신입 사원을 채용한다며 두 가지 사훈이 있는데 그 하나는 ‘공동소유인이 되는 책임감(Being Owners)’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봉사 정신(Helping Others)’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신입 사원은 이 회사 사훈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직하더란다.
 
일정시대 내가 국민(초등)학교 1학년 때 일본인 여자 담임 선생님이 첫 수업시간에 해주신 말씀을 나는 평생 잊지 않고 살아왔다. 학생으로서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인으로서도 말이다. 그 말씀이란 세 가지 학생이 있는데 숙제나 공부를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낙제생, 시키는 대로 하는 모범생, 그리고 시키기 전에 본인 자신이 알아서 잘하는 우등생이라고 하셨다.
영어에 최선을 희망하되 최악에 대비하라(Hope for the best, prepare for the worst)는 말이 있다. 최선을 희망하는 낙관론자이다 보면 실망할 일이 다반사고, 최악에 대비하는 비관론자이다 보면 자칫 패배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낙관론자나 비관론자가 되기보다는 ‘만족론자(contentist)’가 되기로 작심했다. 결과가 어떻든 내 최선을 다해보는 그 자체에 만족하기로.
삶 그 자체가 목적이고 어떤 삶이든 열심히 살아보는 인생예술가(Artist of Life) 외에 다른 예술가가 있을 수 없으며 성공이란 결코 행선지 종착점이라기보다 여정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여정 그 자체가 전부로 곧 보답이고 보람이며 보상(Journey is the reward)이 아니랴. 따라서 언제나 어떤 경우에도 승자는 노력하고 패자는 불평(Winners Practice and Losers Complain) 하지 않던가. 

대학 가야만 사람노릇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인생대학’의 학생으로 평생토록 자신의 인격을 닦고 자아완성의 길을 가는 구도자(求道 者)가 될 생각을, 그리고 취직보다는 창직(創職)할 생각을 해볼 수 없을까.

언젠가 한국에서 ‘공부가 인생의 전부냐’는 항변의 유서를 남기고 남녀 중3생이 동반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뉴스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 두 어린 목숨을 끊게 한 병들대로 병들고 삐뚤어진 우리 한국사회에 분통이 터졌다. 경기도 용인 N중학교 3학년생 15세의 유 모 군과 같은 반 14세의 한 모양이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쓸모없는 2차 방정식의 값을 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의 사랑을 잃었습니다. 우리들의 시체를 같은 곳에 묻어주세요. 행복이 성적순으로 되는 세상, 공부만 하면 인간입니까? 저희들은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가 아닙니다. 이제 하늘 높이 날고 싶습니다.”
이 두 어린 소년 소녀의 유서에서 우리는 그 어떤 철인 현인의 도통한 경지 이상의 해탈을 볼 수 있다. 이 순수하고 용기 있는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속물근성에 물들고 동화되기를 죽음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들은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절규하면서 공부벌레로 살기보다는 인간으로 죽기를 선택했다. 그것도 서로 좋아하는 남녀로서 동반자살, 정사(情死)하면서 시체를 같은 곳에 묻어 달라고 했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 행복하게 죽는 길을 택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너무도 애처롭고 안타까운 것은 이 어린이들 보고 죽을 용기로 더 좀 용감하게 독창적으로 파격적으로 비세속적으로 살아보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이들 주위에 없었음이다. 이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의 사랑을 잃었을지언정 서로 사랑하는 짝끼리 죽음의 동반자가 되기 전에 삶의 동반자가 되어보라고 이들에게 일러주는 사람이 이들 주위에 하나도 없었음이다. 누가 타이르지 않아도 이들 본인 스스로가 그런 마음 먹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다고 두 학생은 유서에서 말한다. 예부터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자식더러 부모 행복하게 해달라고 강요하기보다 자식의 마음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게 부모 된 도리일 텐데 세상이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된 것 아닌가. 진정으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길이 학교 공부보다 인생공부와 인간수업을 잘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보람되게 잘 살아주는 것이라고, 무엇을 하든 저 좋은 대로 저하고 싶은 대로 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고 격려해주는 것이 참된 어버이 마음이란 것을 이 두 어린 마음속에 왜 진작 좀 더 일찍이 심어줄 수 없었을까.
세상사는 길이 이 세상사람 수만큼이나 다 다른 여럿인데 어떻게 이처럼 한 길밖에 없는 것 같이 이들을 세뇌시켰더란 말인가. 아무리 사(ㅅ)자 좋아하는 세태요 사회라지만 그 사(ㅅ)자라는 것이 다 시대착오적인 남존여비 관존민비사상의 잔재가 아니던가. 

저 아일랜드의 노벨문학상(1925) 수상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1856-1950)가 갈파했듯이 오늘날 ‘모든 전문적인 직업인들이란 일반 대중을 등쳐먹는 공모자들이다. All professions are conspiracies against the laity.’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사(ㅅ)자’님들을 떠받드는 세상 사람들이 또 한 공모자들 아닌가.
‘저희들은 새장 속의 갇혀있는 새가 아닙니다. 이제 하늘 높이 날 고 싶습니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자연스럽고 건전한 소망과 꿈이었나. 그렇다면 이들을 입시지옥 성적순으로 도배된 공부방에 가둬두지 말고 밖에 나가 씩씩하게 신나도록 뛰어놀면서 이들의 날개가 어서 크고 튼튼해져 세상을 높이 나는 법을 배우도록 해줬어야 한다.
타락한 어른들이 순수한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어른들이 가르친다는 교육이 고작 각종 편견과 화석화된 고정관념뿐이니 우리 사회가 바로 되자면 어린이들이 어른을 깨우쳐 가르치는 역교육 현상이 일어나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 현존하는 몰인격 몰인성 몰개성 교육이 판치는 한 이솝 우화에 나오는 애꾸눈 원숭이들이 두 눈 가진 원숭이의 멀쩡한 눈 하나를 빼서 생 애꾸눈 원숭이로 만드는 결과밖에 없지 않겠는가. 프랑스의 비행작가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 1900-1944)의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나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의 동화 ‘황제의 새 옷(The Emperor’s New Clothes,’에 나오는 아이와 같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제2곡(曲): ‘허깨비 굿타령'을 졸업하자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트로트 가수 김수희가 불러 히트한 노래 '애모' 가사 일부다. 이 가사를 노벨상을 비롯한 모든 상에 적용해보자. 지난 2018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트럼프 대통령이 거론되고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선정하지 않기로 했다는 비보(?)에 수많은 작가와 출판사들이 비명을 질렀다는데 도대체 '상'이란 게 뭐기에 이렇게 야단법석일까.

어떤 '선물'이나 '상'은 받을 때보다 줄 때가 더 즐겁고 흐뭇하며 행복하지 않던가. 그래서 선물이나 상은 언제나 남에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애인이든 배우자든 자식이든 손자손녀든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사람이면 다 느끼는 일이다. 궂은일은 차라리 내가 겪고 좋은 일만 네가 누리기를 빌면서 아무리 주고 또 줘도 부족해 더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우리가 어느 누구의 추천으로 상을 받아 남의 인정과 평가를 받아 야만 자신의 존재 이유와 존재가치가 비로소 생기는 게 결코 아니다. 

'예술 작품'이란 것도 굳이 말하자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자연과 삶의 '모조품'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실물'보다 그 '그림자'를 더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 않는가.
그뿐만 아니라 있는지도 없는지도, 설혹 있다 해도, 어떤 분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중성인지 무성인지 모를 '신(神)' 이란 존재에 대해 누구도 절대적으로 확실히 알 수가 없는데 그 누가 감히 주제넘게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으랴. 

자신을 포함해 우주만물을 제대로 순간순간 사랑하고 섬기지도 못하면서 '허깨비' 같은 독선 독단적인 존재를 모시고 경배한다는 게 말이 될 법이나 한 일인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온갖 '허깨비 굿타령'을 졸업하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홍익만물(弘益萬物)의 '인생학업(人生學業)'에 매진하는 일이 이 우주에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Why Am I Being Diminished When I Stand Before You?”

This is part of the lyrics for Korean singer Kim Soo-hee’s hit song 'Sad Love'.
 
Let’s apply this question to all kinds of prizes including the Nobel Prizes. Many publishers, writers and readers were reported to have been greatly disappointed by the earlier news that there would be no Nobel Prize for Literature to be awarded in 2018.
 
I was prompted by this little brouhaha to think about prizes in earnest.
 
Whatever the presents or the prizes might be, wasn’t it much more gratifying to give them than to receive them?  Come to think of it, giving them out to somebody is really giving them to oneself. Isn’t it?
 
Whoever your sweetheart is, be it your parents, siblings, friends, lovers, spouses, children and grandchildren, if you’ve ever really loved someone with all your heart and soul, you’d rather bear all the burden yourself to alleviate it from your loved ones whom you could never love enough.
 
Be that as it may, your self-worth and raison d’etre is not bestowed upon yourself only when you are recommended for recognition to be presented with a prize. Does it?
 
As it were, no matter how great they may be, for example, all works of art are nothing more than imitations of nature and life. How could we then value the shadow more than the real thing?
 
Furthermore, nobody knows for sure whether there is such a thing called God or not. Even if such a divine super-being does exist indeed, nobody is sure whether it’s male, female, neuter, asexual, or what. How then could anyone say this or that about such an unknown and unknowable being?
 
How then could one worship such an unreal phantomlike beingㅡindoctrinated as all-knowing, almighty, all-present, all self-righteous ㅡ while failing to love and serve all things including oneself of the Cosmos from-to-in-the moment?
 
It behooves us, then, to mind our immediate business of learning diligently as life-long students of the School of Love. Thus enlightened altogether, we all may graduate to become Cosmians Arainbow of Love.
 
제3곡(曲):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코넬대 경제학과 교수 Robert H. Frank가 쓴 ‘Success and Luck: Good Fortune and the Myth of Meritocracy’는 2016년 나온 책이다. 이 책이 2018년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란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 출간됐다.

노력했다고 다 성공하는 게 아니고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걸 여러 사례와 경제학적 모델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노력’이냐 ‘운발’이냐의 문제인데 나는 제3의 ‘대응방식’을 내가 적용해온 대로 제시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 84년 동안 오늘 같은 날이 있을 줄은 꿈도 못 꾼 일이다. 돌이켜 보면 60여 년 전 내 첫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나 자신이,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아니 우주 만물이 ‘코스미안’임을 깨닫게 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어린 소년이 한 송이 아주 작은 소우주 코스모스 꽃을 사랑하다가 대 우주 코스모스를 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노라면 우연히 전화위복이나 전복위화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복(福)’이나 ‘화(禍)’가 닥쳤을 때 이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대응하고 대처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가 나지 않던가. 성공의 정상에서 자만하다가 추락하는가 하면 실패와 절망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비상할 수 있다. 그 예로 내가 직접 최근 겪은 한두 사례를 들어 보리라.

2017년 9월 자연과인문 출판사에서 ‘39프로젝트’와 ‘태미사변(泰未思辨)’이란 책 두 권이 동시에 나올 수 있도록 모든 기획을 총괄한 아주 유능한 서울대 재학 중이던 여학생에게 2018년 3월 옛 ‘사상계(思想界)’ 같은 지성 계간지 ‘코스미안’ 창간 프로젝트를 맡겼었다. 그런데 어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인지 몰라도 이 새로운 프로젝트가 허무하게 무산(霧散)되는 바람에 훨씬 더 의미 있는 새로운 글로벌 인터넷 신문 ‘코스미안뉴스’ http://www.cosmiannews.com 를 2018년 7월에 창간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삶을 소재로 '자연과인문' 출판사와 코스미안 뉴스 대표 전승선 시인이 2018년 6월 출간한 소설 ‘코스미안’의 영문번역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영국의 데보라 스미스에게 적극 의뢰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게 되는 바람에, 내가 직접 영문으로 내용 일부를 수정 번역하면서 새로운 영문원고가 완성되었다. 이를 처음으로 ’Cosmiannews’에 연재하다가 영문판 ‘Cosmian’이 2019년 가을 그리고 그 후속편 ‘Cosmian Rhapsody’가 2020년 올가을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 출간되었다. 그리고 2019년 10월 27일 ‘코스미안뉴스’ 제1회 코스미안 상 시상식이 서울 세종 문화회관에서 열렸고 올해 2020년 가을에 있을 예정이던 제2회 코스미안상 시상식은 코로나 사태로 비대면으로 거행되었다.

세상사 세옹지마(塞翁之馬)/새옹득실(塞翁得失)이라고 영어로 표현해서 'If not this, someone or something better'를 찾다 보면 찾아지는 것 같다. 2018년 85세로 타계한 인도계 영국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V S 나이폴이 생전에 한 말이 떠오른다.

“난 내가 열고 싶은 문이 어떤 문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문을 두드렸다. I knew the door I wanted, I knocked.”
이 말을 이렇게도 바꿔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엔 수많은 문이 있을 테니 이 문이 안 열리면 저 문, 아니면 또 다른 문을 노크해 보리라. 어떤 문이 열릴 때까지. There must be so many doors. If one door doesn’t open, I will knock another. If another door still doesn’t, I will knock yet another until one opens.’

스티브 잡스의 좌우명인 '여정 자체가 보람이자 보상이다(The journey is the reward.)라는 말처럼 우리도 여정 자체를 보람 으로 삼으면 긍정하지 않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이를 내가 달리 표현하자면 ‘세상에 어떤 일이 언제 어디에서든 일어나려면 온 우주가 공모 해야 된다. For anything to happen anytime anywhere, the whole Cosmos has to conspire.’가 되리라.
 
To the Successful by the Virtue of Competence and Endeavor

‘Success and Luck: Good Fortune and The Myth of Meritocracy’ by Robert H. Frank that came out in 2016 was translated into Korean and published in 2018 entitled (in Korean) ‘To the Successful by the Virtue of Competence and Endeavor.’

In this book, the author, a professor of economics at Cornell University, argues that the successful tend to underestimate the role that chance plays. The issue is whether it’s hard work or luck that decides the outcome. This may sound like there’s no other option, but I’d present the third option one can take. Whatever and how many options there are, what you decide to take is up to your choice. Isn’t it?

All the while living my life for eighty four years, I’ve never even dreamed that there would be a day like today, one day. Looking back, had I not lost my first love sixty years ago, I could not have come to realize that I and all others, all beings are ‘cosmians born ‘arainbow of love' from the Cosmos. A young boy who happened to fall in love with the micro-cosmos of a flower ended up embracing the whole macro-cosmos.

Although everyone encounters from time to time both blessings and curses in disguise, doesn’t it make all the difference depending, no matter whether it’s a ‘fortune’ or a ‘misfortune’, on what one makes it to be, after all.

We see all the time the fall of the most powerful and successful from the pinnacle of power and success, while some ‘hopeless’ and ‘helpless’ losers rise from the ashes of despair and failures, like a phoenix.

I’d like to share a bit of my most recent experience.

Following the publication of two books in September 2017, ‘39 Project’ and ‘Tae-Mi Sa-Byun (Dialectic Dialogue - Thought Romance Between An 80-Year-Old Man and A 24-Year-Old Girl)’, l commissioned this very promising young entrepreneur who had pulled off these two great surprise feats of publishing success to launch a new quarterly ‘Cosmian’ in the same spirit and vein of the now defunct very popular intellectual magazine ‘Ssassanggye (The World of Thoughts) in March 2018.

For totally unaccounted reasons, this new project was aborted. Instead, another much more meaningful and visionary global online newspaper The Cosmian News http:www.cosmiannews.com was launched in July 2018.

Early in 2018, my Korean publisher, Ms. Jeon Seungseon, Poet, Novelist and Playwright, started writing a non-fiction narrative of my life, ‘코스미안(Cosmian)’ in Korean, and it was published in June 2018. So I contacted Ms. Deborah Smith, the English translator of Korean novelist Han Kang’s novel ‘The Vegetarian’, which won The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in 2016.

Since my approach was unsuccessful, I decided to trans-late it into English myself, revising and rewriting it in my own words. It was being serialized in the Cosmian News and the English version ‘Cosmian’ was published in the fall of 2019 and ‘Cosmian Rhapsody,’ the sequel to ‘Cosmian’ came out this past fall, both in England and the U.S.

Furthermore, The First Cosmian Prize Award ceremony was held at Sejong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 in Seoul in October 2019 and The Second Cosmian Prize Award ceremony took place on line in October 2020 due to the current Corona pandemic.

Therefore, as the saying goes, if not this, someone or something far better will turn up, sooner or later, if one never ceases to look for what one wants. I’m reminded of a comment confided by the late V. S. Naipaul (1932-2018), winner of the 2001 Nobel Prize for Literature.

“I knew the door I wanted, I knocked.”

He must have meant to say that there are so many doors. If one door doesn’t open, I’ll knock another. If another door still doesn’t, I’ll knock yet another until one opens.

At the same time, we’d better recall Steve Jobs(1955-2011)’s motto:

“The journey (itself) is the reward.”

It is tough to accept the hard truths of life but we all have to accept them anyway. One is that for anything to happen anytime anywhere, the whole Cosmos has to conspire. Won’t it be?!

하지만 어떻든 1993년 노벨문학상 수상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1931-2019)이 남긴 이 말에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으리라.

"인생 (지로역정地路歷程) 어느 한 지점에선 세상의 아름다움으로 족함을 느끼게 되리.  At some point in life world's beauty becomes enough."

이는 맨 앞에 인용한 이수진 작가의 칼럼 글 제목 그대로, 우리 모두 하나같이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으로서 잠시 이 지구별에 머무는 동안, 아무래도 다 '괜찮아, 연습이야'란 뜻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9.26 10:46 수정 2021.09.2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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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