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기자: 전명희 [기자에게 문의하기] /
2021년 10월 1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칼럼 20/20] '외계인, 지구인, 미국 시민' 필자 김완신 논설실장은 "자유와 기회의 땅을 찾아 미국에 온 이민자들이 더 이상 에일리언으로 불리지 않게 됐다"며 "최소한 외계인에서 지구인의 신분을 찾았다. 그럼에도 미국 시민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고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서 배운 것과 다른 용도의 영어 표현으로 당황한 적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에일리언(Alien)’ 이다. 한국에서 ‘외계인’을 뜻하는 말로 배웠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사는 ‘인간 비슷한’ 종족을 뜻하는 단어다.
‘에일리언’을 떠올리면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다. 1979년 개봉된 SF영화 ‘에일리언’이 외계인 비호감 확산에 일조했다. 공격적인 외계생물과 만난 지구 우주선 승무원이 겪는 공포가 영화 줄거리다. 흥행에 성공해 4편까지 속편이 나왔다.
영화의 외계인 모습은 하나 같이 역겹다. 그 영향인지 은연 중 에일리언의 모습은 이전 귀여운 ET에서 흉측한 괴물로 변해버렸다.
미국에 오는 모든 이민자들은 에일리언이 된다. 체류신분 분류에서 ‘에일리언’ 항목에 표시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다르지만 분명 지구에서 왔는데 한순간에 외계인이 되는 것이다. 외계인을 넘어 외계생물이 되는 참담함까지 느끼는 이민자도 있다.
캘리포니아주의 모든 법과 공식 문서에서 ‘에일리언’이라는 용어가 사라진다. 지난 24일 개빈 뉴섬 주지사는 외국인을 지칭하는 ‘에일리언’이란 용어를 퇴출하고 ‘비시민권자(Noncitizen)’ 또는 ‘이민자(Immigrant)’ 사용을 규정한 법안에 서명했다. 용어가 ‘모욕적’이고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는 것이 이유다.
2015년 노동법과 2016년 교육법부터 금지한 것에 이어 이번에 모든 법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지난 4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에일리언 표현 금지를 명령했다. 하버드 대학도 공공 문서에서 이민과 관련해 이 용어를 쓰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미국에서 ‘에일리언’ 표현은 1798년 법령에 정식 등장하는데 학자들은 이전 문서에서도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어원에서 에일리언은 단지 ‘낯선(Strange)', '이방의(foreign)' 뜻만 있었다. 14세기 이후 국가간 이주가 활발해지면서 '타지에서 온 사람'을 지칭하게 됐다. 20세기 이전에는 외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에일리언에 '지구가 아닌 곳'의 의미가 붙여진 것은 1920년대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가장 먼저 시행에 옮긴 정책은 전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되돌려 놓은 것이었다. 상당 부분 성과도 있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다.
바이든 정부의 이민정책은 남부 국경의 불체자 단속 문제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수백만 이민자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3조5000억 달러 예산안도 축소될 전망이 크다.
지난 19일 텍사스주 델 리오 다리 인근의 불법 아이티 난민촌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기마 국경 순찰대가 말 고삐로 난민을 쫓아내는 장면이 공개돼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화당은 무분별한 친이민 정책으로 불체자를 양산했다며 바이든 행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균형 잡힌 이민정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코로나 사태로 이민정책이 뒷전으로 밀리면서 드리머 구제, 불체자 시민권 부여 등의 사안도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이민자들의 헌신과 기여는 미국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이다. 이민정책의 대의와 방향이 정파간 이해관계로 훼손돼서는 안 된다.
자유와 기회의 땅을 찾아 미국에 온 이민자들이 더 이상 에일리언으로 불리지 않게 됐다. 최소한 외계인에서 지구인의 신분은 찾았다. 그럼에도 미국 시민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영국의 이론 물리학 우주론자 Theoretical Physicist/Cosmologist 스티븐 호킹 Stephen Hawing(1942-2018)이 남긴 말 몇 마디 우리 깊이 음미해보자.
"우린 우주의 굼벵이들로 지구란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우주를 즐기는데 만족할 것인가? 그 대답은 '아니오'다. Should we be content to be cosmic sloths, enjoying the universe from the comfort of Earth? The answer is, no."
"지구는 다방면에서 위협받고 있어 나는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가 없다. The Earth is under threat from so many areas that it is difficult for me to be positive."
"어느 날, 우린 이 지구별 같은 다른 행성으로부터 그 어떤 신호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회신함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보다 앞선 문명을 접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미대륙 원주민들이 콜럼버스를 만나는 것처럼 그 결과가 (비참 참혹하게) 안 좋을 테니까, One day, we might receive a signal from a planet like this---But we should be wary of answering back. Meeting an advanced civilization could be like Native Americans encountering Columbus. That didn't turn out so well,"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 내가 가장 시정하고 싶은 건 폭력이다...(원시시대 우리 조상이) 동굴 생활 할 때는 먹을 것을 찾고, 주거지를 확보하며 짝을 지어 자손을 보기 위한 우리의 생존 본능이었겠지만 지금 와서는 이 공격성이 우리 자신을 포함한 자연 만물을 다 파괴하고 있다.The human failing I would most like to correct is aggression---It may have had survival advantage in caveman days, to get more food, territory or partner with whom to reproduce, but now it threatens to destroy us all."
"우린 현재 급변점 - '갑자기 뒤집히는 점'이란 뜻으로 작은 변화들이 기간을 두고 쌓여, 작은 변화 하나만 더 일어나도 갑자기 큰 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상태가 된 단계 또는 순간 - 다다랐다. 기후변화만 하더라도 거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We are close to the tipping point, where global warming becomes irreversible."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신神 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이런 의문에 신의 해답을 찾는) 인간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있었을까? What was God doing before the divine creation? Was he preparing hell for people who asked such questions?”
"총체적인 인공지능 개발은 인류의 종말을 고할 것이다.The development of full artificial intelligence could spell the end of the human race,"
"자신의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화를 낸다면 시간 낭비다. 그런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대로) 난 나쁘지 않고 괜찮은 삶을 살아왔다. 네가 항상 화가 나 있고 불평불만에 차 있으면 사람들은 널 상대해주지 않는다. It is a waste of time to be angry about my disability. One has to get on with life and I haven't done badly. People won't have time for you if you are always angry or complaining,"
"(그에게) 무엇이 가장 강한 흥미를 일으키는 미스터리며 왜 그런가? What mystery do you find most intriguing, and why?"란 질문에 그의 대답은 His answer:
"여성Women.---(그리고) 여성은 미스터리로 남아야 한다. Women.---women should remain a mystery."
그는 사후 내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두뇌가 부품이 작용을 멈추면 작동이 안 되는 컴퓨터 같다고 본다, (따라서) 고장난 컴퓨터에겐 천국도 내세도 없다. (천국이니 내세니 하는) 얘기는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옛날 이야기 동화일 뿐이다. I regard the brain as a computer which will stop working when its components fail,---There is no heaven or afterlife for broken-down computers; that is a fairy story for people afraid of the dark."
최근 2021년 8월 12일자와 지난해 2020년 7월 30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글 우리 반추해보자.
[이태상 칼럼] '우린 모두 외계인Outlier인 동시에 내계인Inlier 코스미안Cosmian이어라'
오늘 2021년 8월 11일자 뉴욕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잠망경] 필자 서량 시인-정신과 의사는 Stupid is as stupid does!'란 제목의 칼럼에서 영어로 'stupid'와 'dumb'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날 병동환자 그룹 치료를 하던 중 그들의 반응을 이렇게 유도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참 ‘stupid’ 하다고 느끼면서 산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은 바보스러울 때가 많아. 너희들도 살면서 가끔 스스로 ‘stupid’ 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겠지?’ 아무도 응답을 하지 않기에 나는 각자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데이비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자기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리처드도 평생 ‘stupid’ 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리처드에게 ‘Really?’ 하며 좀 거세게 다그친다. 그는 잠시 내 눈치를 살핀 후, “But sometimes I feel dumb, you know?” 한다. 평소에 며칠을 말 한마디 없이 지내는 리처드가 이런 말을 하다니!
당신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stupid’가 ‘dumb’보다 더 모욕적인 느낌이라는 것을. 내가 나 자신을 ‘stupid’ 하다고 자기비하를 할 때는 예외 없이 상대의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누가 나를 ‘stupid’ 하다고 말하는 순간 인신공격을 받는 감정이 솟는다는 사실을. 그래서인지 리처드는 두 컨셉 중 ‘dumb’을 선호했다. 어쭙잖은 언성으로, “I have a stupid question, 바보 같은 질문이 있는데요.” 하며 말할 때마다 “There‘re no stupid questions, 바보 같은 질문은 없어요.” 하며 따스하게 반응하는 미국인들의 말 습관을 좋아한다.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했거늘. strong 강하다, strike 때리다, stress 스트레스, stone 돌, 처럼 st- 로 시작하는 영어단어는 거칠고 강한 의미를 풍긴다. ‘stupid’ 또한 음성학적으로 강렬한 파장을 일으킨다. ‘stupid’는 멍청하다는 뜻의 라틴어. ‘dumb’은 고대영어로 벙어리라는 말. 19세기경에 바보스럽다는 의미로 변했다.
오래전 수련의 시절,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서 벙어리 행세를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어도 입을 꾹 다물고 견디는 동안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기분이었다. ‘멍청하다, stupid’와 ‘바보스럽다, dumb’은 거의 같은 의미다. 라틴어는 중압감이 있고 고대영어는 부드럽다. 이런 현상은 한자어가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뒤집어쓴 데 반하여 순수한 우리말은 여성적이라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한다.
톰 행크스가 열연한 ‘Forest Gump, 포레스트 검프’(1994)의 명대사, “Stupid is as stupid does, 바보란 바보스러운 행동이에요”를 기억한다. 이 말은 워낙 ‘Handsome is as handsome does,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운 행동이에요’에서 말 하나를 바꾼 말인데 그 영화 이후로 금언(金言) 수준에 달하는 말이 됐다. 짐 캐리가 주연 한 ‘Dumb and dumber, 덤 앤 더머’라는 코미디 또한 1994년 개봉 영화다. ‘stupid’ 라는 강렬한 컨셉보다 ‘dumb’이라는 코믹한 분위기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당신은 어떤가. 침묵이 금이라는 격언대로 무언(無言)의 신비를 유지할 것인가. “I have a stupid question”이라는 말로 상대의 동정을 살 것인가. 어쨌든 남들에게 ‘stupid’나 ‘dumb’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 그날 내가 배운 교훈이다. 더더구나 ‘smart phone’을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한 일반인들에게는.”
이처럼 흥미진진한 논조에 사족蛇足으로 2020년 4월 25일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 '아웃라이어Outlier와 인라이어Inlier'를 옮겨보리라.
미디어에 자주 뜨는 단어가 있다. 일종의 외계인(外界人)을 의미하는 ‘아웃라이어(Outlier)’를 말한다. 그 반대어는 내계인(內界人) ‘인라이어(Inlier)’가 되겠다. 본래는 지질학(地質學) 용어(用語)로 인라이어는 새로 생긴 지층(地層) 암석(岩石)인 아웃라이어 속에 박힌 암석층(岩石層) 을 지칭하지만,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할 때는 속된 말로 사회적인 ‘또라이’를 이웃라이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이 또라이를 내가 의역(意譯)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또라이’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고 사회적인 통념(通/痛念)을 깨고, 자신의 직감(直感)과 소신(所信)대로 집요(執拗)하게 정진(挺進)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결과에 구애(拘碍)받지 않고 노력하는 과정(過程) 그 자체를 즐기면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39 프로젝트: 세상을 바꿀 39인의 코스미안 이야기 (2017년 자연과인문),' ’69 프로젝트: 지금 여기 이 순간을 뜨겁게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제1회 코스미안 상 공모 입선작품선집 (2019년 자연과인문),' 그리고 '49 프로젝트: 49인의 코스미안이 전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지성의 힘' 공동저자 이야기 - 제2회 코스미안 상 공모 응모작 선집 (2020년 자연과인문) - 필자들 같은 ‘코스미안’이리라.
지난 2008년 출간된 ‘아웃라이어즈: 성공담(Outliers: The Story of Success)’에서 저자인 캐나다 언론인 맬컴 글래드웰 (Malcolm Gladwell, 1963 - )은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 요인들을 분석 검토한다. ‘포레스트 검프(Forest Gump, 1994)’라는 미국 코미디 드라마 영화를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라는 지적(知的) 장애인(障碍人)의 인간승리(人間勝利) 이야기다.
또 한 편의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있다. ‘셰인(Shane, 1953)’은 미국 서부영화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데, 바람처럼 나타나 악당들을 통쾌하게 물리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고독한 사나이로 나를 포함해 수 많은 청소년들의 영원한 로망이 되었다. 모든 남자가 ‘셰인’ 같이 멋진 남성이 될 수는 없겠지만, 아무라도 ‘포레스트 검프’는 될 수 있지 않으랴.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극히 평범하다 못해 평범 이하로 보이는 비범(非凡) 한 사람 말이어라.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을 영어로는 ‘숨은 영웅들(Unsung Heroes)’이라 한다. 이들이야말로 아웃라이어와는 비교도 안 되게, 겉이 아닌 속으로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나는 인라이어들이라고 우리는 극찬(極讚)의 찬가(讚歌)를 부르리라. 그 한 예를 오늘 아침 친구가 전달해준 너무도 감동적인 글 ‘아내의 희생’에서 발견하고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옮겨본다.
아내의 희생(犧牲)
각막 이식수술을 받고 있었다. 마취가 된 눈언저리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으나 의식만은 또렷해서 금속제 수술 도구가 부딪는 소리라든가 주 선생의 나지막한 말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가 있었다. 오른쪽 눈에 이상이 생긴 것은 3년 전의 일이었다. 처음엔 가벼운 염증이려니 여기고 대단치 않게 생각했으나 퉁퉁 부어오른 눈의 부기가 여간해서 내릴 줄을 몰랐다.
결국 타이페이의 3군 총의원(總醫院)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그때는 이미 그쪽 눈의 시력을 잃고 난 뒤였다. 진찰 결과 각막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절망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이미 나의 왼쪽 눈은 지독한 원시(遠視)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수수건 같은 것에서 옮았을 겁니다. 아니면 풀장에서였든가.”
주 선생의 말이었다. 나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수영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 나는 각막 이식 수술을 받으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아내에게 그 말을 했더니 그녀는 얼굴이 환히 밝아지면서 아무 말 없이 예금 통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대만불(臺灣弗)로 2만 달러쯤 들어 있는 통장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내부업으로 아내가 남몰래 모아온 피와 땀의 결실이었다.
“모자라면 또 어떻게 마련해 보겠어요.”
아내는 짐짓 웃어 보였는데 그것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저 같은 것하고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눈뜬장님이니까요. 당신은 눈을 되찾아야 해요.”
주 선생은 대만에서 각막 이식수술의 개척가요 권위자였다. 내 이름은 즉시 수술희망자 명부에 올랐다. 그러고 채 한 달이 못 되어 주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교통사고로 죽은 운전기사가 있는데 죽기 전에 자기 몸의 여러 부분을 팔아서 쓰라고 아내에게 유언했답니다. 아이가 여섯이나 된다니까 그 살림 사정이야 알만하지 않겠어요. 그쪽에서는 각막을 양도하는 대신 1만 달러를 달랍니다. 어떻습니까? 수술을 하시겠습니까?”
수술비용과 입원비를 합쳐 대략 8천 달러 이상은 되지 않겠지 싶어 나는 그 각막을 양도받기로 하고 그 이튿날로 입원을 했다.
나는 매우 행운아인 셈이었다. 각막을 얻기 위해 몇 해씩 기다렸다는 수술희망자들의 이야기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서 들어왔던 것이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 회복실로 들려져 갈 때 딸 소용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모든 게 순조로웠어요. 아빠, 엄마는 오고 싶지만, 왠지 두려워 못 오겠다고 했어요.”
“괜찮다고 하더라고 전해라. 아무 염려 말라고.”
나는 19세 때 부모의 권유에 따라 결혼을 했다. 나의 부친과 장인은 오랜 친구 사이로 만일 두 사람이 각각 아들과 딸을 두게 되면 결혼을 시키자고 총각 시절에 이미 약속을 해두었었다는 것이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결혼 당일이었다. 가마를 타고 온 아내가 신방에 들어온 뒤 머리에 쓰고 있던 금란직보를 벗었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굴이 온통 우박 맞은 잿더미 모양의 곰보인 데다 주먹만 한 들창코, 그 허공으로 뻥 뚫린 두 구멍이 추악하게 벌름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썹은 숫제 이름뿐이었고 눈꺼풀에 난 징그러운 흉터는 두 눈을 퉁퉁 부어오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나와 동갑내기라는데도 40여 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기가 막힌 박색이었다. 나는 얼른 어머니 방으로 도망쳐 나와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울먹였다.
어머니는 운명이려니 하고 체념하라고 얼굴이 반반하면 틀림없이 얼굴값을 하게 마련이므로 결국 불행을 불러들이는 법이며, 오히려 복은 박색한테 붙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뭐라 하든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날 밤을 새웠다. 그 후로 나는 다시는 아내의 방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물론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 직후 나는 학교 기숙사로 갔고, 여름 방학에도 집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아버지의 당부를 받고 사촌형이 나를 데리러 왔다. 내가 사촌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마침 저녁상을 차리는 중이었다. 아내는 나를 보자 사뭇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나는 기겁을 하고 외면을 해버렸다.
저녁이 끝나자 어머니가 나를 넌지시 불러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네가 너무 심한 것 같다. 저 애는 얼굴은 비록 박색이라고는 해도 겪어보니 그렇게 마음이 어질고 착할 수가 없더라.”
“그야 어련하겠어요.”
나는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지 못하고 어머니를 흘겨보며 볼멘소리를 질렀다.
“마음마저 흉측하다면 어찌 부모님께서 저런 계집을 내게 떠안겨 주었겠어요.”
“얘야, 저 애는 참으로 심지가 깊고 식구 누구에게든 헌신적인 여자란 말이다. 네게 소박을 당하고도 조금도 쉴 틈 없이 부지런히 일을 찾아서 하고 또 깔끔하기가 이를 데 없단다. 네 태도가 그렇게 쌀쌀맞아도 원망은커녕 눈살 한번 찌푸린 적이 없다. 눈물을 보인 적도 없고…그렇지만 그 심정이 어떻겠니. 넌 생각해 본 일이 없겠지만 저 애 역시 여자라는 점에서 누구와도 다를 바 없잖니. 한세상 살다가는 걸, 남편 시중 잘 들고 순종하며 자식들 훌륭히 키워준다면 여자로선 더 바랄 게 없는 거야. 생으로 젊은 나이를 과부로 보내는 저 애가 너는 가엾지 않니?”
그 후 나는 눈을 찔끔 감고 아내와 한방에 들기는 했으나 얼어붙은 마음은 여전히 녹을 줄 몰랐다. 아내는 언제나 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어쩌다가 한두 마디 말을 할 때도 모기소리 같은 음성이었다. 내가 짜증을 부리면 잠깐 고개를 들어 배시시 웃고 나서 얼른 고개를 숙여버리곤 했다. 아내는 어려운 살림의 여가를 틈타 밀짚모자를 만들고 돗자리를 짜며 그물을 손질하고 도기(陶器)에 그림을 그려 넣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억척스레 일거리를 맡아했다. 그것은 정말 뼈가 부스러지는 노력이었다. 애들도 무럭무럭 자랐다.
우리는 한 번도 학교 관사에서 살아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상사나 동료들에게 아내의 몰골을 보이기 싫어한 까닭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딸 소용이는 대학을 나와 교원생활을 시작했고 아들 녀석은 육사에 재학 중으로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있는 터다. 수술 후 두 주가 지나 실을 뽑게 되었다. 그 두 주는 불안 속의 나날이었다.
“완쾌한다면 각막을 주신 분의 무덤을 찾아가야겠다.”
나는 딸애에게 말했다. 이윽고 눈에 감긴 붕대가 풀렸다. 나는 눈을 뜨기가 몹시 겁났다. 주치의가 물었다.
“빛이 보입니까?”
나는 눈을 껌벅이며 대답했다.
“네! 왼쪽으로요.”
“그건 전등빛입니다. 성공적입니다. 한 주 후엔 퇴원해도 좋소.”
주 선생은 내 어깨를 툭 치고 힘주어 말했다. 그로부터 1주일,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력 검사를 받았다. 처음엔 시야가 그저 희끄무레하기만 하더니 마침내 주치의가 내밀어 보이는 손가락도 알아볼 수 있게끔 되었다. 퇴원하는 날엔 창문이며 침대,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까지도 모두 또렷하게 보였다.
“엄마가 아빠 좋아하시는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세요.”
퇴원하는 날 소용이가 병원으로 나를 데리러 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택시로 집에 돌아왔다. 택시 안에서 소용이는 웬일인지 그 애답지 않게 새침하니 말이 없었다. 아내는 부엌에서 요리를 내오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무슨 까닭인지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예의 그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오십니까?”
“고마워, 고생 많이 시켰어.”
나는 식탁 앞으로 가 앉았다. 아내는 상을 다 보고 나더니 벽 쪽으로 돌아앉아 훌쩍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조금 전 하신 그 말씀…그 말씀만으로 저는 기뻐요. 제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내는 울먹이며 떠듬떠듬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소용이가 심상치 않은 기세로 방에 뛰어 들어왔다. 그 애의 얼굴도 제 엄마처럼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딸애는 아내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격렬하게 부르짖었다.
“엄마! 아빠에게 모두 털어놔요. 엄마가 아빠에게 눈을 뽑아 드렸다고요. 자아, 얼른 보여드리란 말이에요. 이렇게…”
“얘야, 너무 목소리가 높구나. 엄마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란다.”
아내는 여전히 벽 쪽으로 돌아앉은 채 말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아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어깨를 잡아 얼굴을 돌리게 했다. 아내의 왼쪽 눈의 홍채(虹彩)는 수술 전의 내 눈처럼 흐려 있었다.
“금화! 왜, 이런 짓을 했소.”
내가 아내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아내의 어깨를 쥐어흔들며 소리쳤다.
“당신은, 당신은 소중한 제 남편인걸요.”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격정이 화닥화닥 불꽃을 튀기며 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더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털썩 마룻바닥에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린 모두 대우주macrocosmos에서 사랑의 무지개 타고arainbow of love 잠시 이 소우주microcosmos 지구별로 소풍 온 외계인outlier인 동시에 내계인inlier 코스미안cosmian이어라.
[이태상 칼럼] '우린 모두 별똥별 성신(星神/身) 코스미안이다'
소녀상 앞에서 일본 아베 총리가 무릎 꿇고 사죄하는 조형물을 강원도 민간 식물원에서 곧 공개한다는데, 조형물의 이름은 ‘영원한 속죄,’ 그 작명은 소설가 조정래가 했다고 한다.
문득 흑인 노예 후손인 미셀 오바마(Michelle Obama)의 말이 떠오른다.
“저들이 (상대가) 저질(低質)스럽게 저품격(低品格)일 때 우리는 고질(高質)스럽게 고품격(高品格)을 지니리라.”
“When they go low, we go high.”
코로나 팬데믹으로 벌써 4개월 넘게 격리된 시간이 이어지면서 ‘평범한 일상’ 이 실종된 데다 코로나19가 다시 급격한 확산세를 보이고 있어, 우울증이나 불안증을 보이는 일명 ‘코로나 블루 (Coronavirus Blues or Clinical Depression)’를 앓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다.
‘스트레스(stress)’라는 용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시절 비엔나 출생의 캐나다 내분비학자 (endocrinologist) 한스 셀레(Hans Selye 1907-1982)가 1936년 스트레스 학설을 제창, 처음으로 만들어 쓰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 ‘스트레스’를 “어떤 변화를 필요로 하는 상황과 사태에 대응하는 우리 몸 신체의 특이 사항 없는 비특정 반작용 (the non-specific response of the body to any demand for change)’이라고 정의했다.
이 증후군은 전반적으로 개체가 그 자신을 새로운 상태에 적응시키려는 일반화된 노력을 나타낸 것처럼 보이므로 ‘일반적응증후군’으로 불리기도 한다.(Since the syndrome as a whole seems to represent a generalized effort of the organism to adapt itself to new conditions, it might be termed the ‘general adaptation syndrome.)
그 이후로 수많은 연구 조사 결과로 밝혀진 최상의 의학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물이나 사람에게 공(共)히 ‘감사하는 것(appreciation and gratitude)’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내가 청소년 시절 탐독한 책으로 일본인 쿠라다 하쿠조(倉田百三 1891-1948)가 사랑에 대해서 쓴 짧은 글을 모아서 펴낸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 있다. 일본에서는 1921년 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종로서관에서 1954년과 1961년 펴낸 것을 1963년 종로서관 판에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김봉영 역자의 옮김으로 창원사에서 펴냈다.
이 ‘사랑과 인식의 출발’에서 저자 쿠라다 하쿠조는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을 어떻게 인식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가에 대해 이렇게 한 문장으로 ‘사랑’을 적시(摘示)한다.
“남의 운명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여 이를 두려워하고, 이를 축복하고, 이를 지키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것이 바로 모든 사물과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인식(認識)하고 무한한 감사의 정(情) 곧 사랑을 느끼는 일이리라.
현재 코로나 때문에 ‘평범한 일상’에서 할 수 있던 일들을 못하게 되어 답답하고 무료하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전에 생각도 상상도 못 하던 새로운 일들을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보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 누군가를 또는 그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할 때 생긴다는 암을 치료하고 통증을 해소하는 호르몬 ‘엔도르핀 (endorphins)’의 4,000배 효과가 있다는 ‘다이돌핀(didolphin)은 그 누군가를 또는 그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며 감사하거나 기뻐할 때 우리 몸에서 자연적으로 분비된다고 하지 않나.
우리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이 ‘예언자(The Prophet, 1923)’에서 하는 말도 되새겨 보자.
슬픔이 그 탈을 벗으면
다름 아닌 기쁨이리오.
슬픔이 파고들면 들수록
더 많은 기쁨이 고이리오.
술잔은 불에 구워진 것.
피리는 칼에 깎여진 것.
기쁠 때 깊이 생각하면
지금 기쁨을 주는 것이
일찍 슬픔을 주었던 것.
슬플 때 슬피 살펴보면
한때 즐거움이었던 일.
참으로는 기쁨과 슬픔
둘이 아니고 하나리오.”
Your joy is your sorrow unmasked.
And the selfsame well from which
your laughter rises was oftentimes
filled with your tears.
And how else can it be?
The deeper that sorrow carves into
your being, the more joy you can contain.
Is not the cup that holds your wine
the very cup that was burned
in the potter’s oven?
And is not the lute that soothes your spirit,
the very wood that was hollowed with knives?
When you are joyous,
look deep into your heart
and you shall find it is only
that which has given you sorrow
that is giving you joy.
When you are sorrowful
look again in your heart,
and you shall see that
in truth you are weeping for
that which has been your delight.
Some of you say,
“Joy is greater than sorrow,”
and others say,
“Nay, sorrow is the greater.”
I say unto you,
they are inseparable.
Together they come,
and when one sits alone
with you at your board,
remember that the other
is asleep upon your bed.
Verily you are suspended like scales
between your sorrow and your joy.
Only when you are empty
are you at standstill and balanced.
When the treasure-keeper lifts you
to weigh his gold and his silver,
needs must your joy or your sorrow rise or fall.
깨달음 싸고 있는 껍질
그 껍질 벗겨지는 것이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그 아픔 견뎌야 할 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철 따라 찾아 오듯이
우리 가슴 속 계절도
반겨 맞을 일이리오.
뿌린 대로 거둬들임
모든 것을 바로잡는
보람 있는 일이리오.
Your pain is the breaking of the shell
that encloses your understanding.
Even as the stone of the fruit must break,
that its heart may stand in the sun,
so must you know pain.
And could you keep your heart
in wonder
at the daily miracles of your life,
your pain would not seem
less wondrous
than your joy;
And you would accept
the seasons of your heart,
even as you have always accepted
the seasons that pass over your fields.
And you would watch with serenity
through the winters of your grief.
Much of your pain is self-chosen.
It is the bitter potion by which
the physician within you
heals your sick self.
Therefore trust the physician,
and drink his remedy
in silence and tranquility:
For the hand, though heavy and hard,
is guided by the tender hand of the Unseen,
And the cup he brings,
though it burns your lips,
has been fashioned of the clay
which the Potter has moistened
with His own sacred tears.
다른 사람에게 하는 짓
바로 자신에게 하는 짓.
죄와 벌을 안다는 것이
바로 사람 되는 것이리.
어떤 성자나 의인이라도
우리 모두의 사람됨보다
조금도 더 나을 것 없고
세상의 어떤 죄인이라도
우리 모두의 사람됨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으리니.
나뭇잎 그 어느 하나도
나무 모르게 저 혼자서
단풍 들고 떨어지거나
죄를 짓는 어떤 죄인도
우리 모두의 잘못 없이
어떤 죄도 짓지 못하리.
길 가다 어느 누가 넘어지면
따라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발부리에 걸리는 돌 있다고
조심하라 알려 주는 것이리.
목숨을 빼앗기는 사람도
재산을 도둑맞는 사람도
죽음과 도난당하는 일에
의인도 죄인의 죄 지음에
아무 책임이 없지 않으리.
죄인이야말로 피해자로서
죄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죄 짓고 벌 받는 것이리오.
It is when your spirit goes wandering upon the wind,
That you, alone and unguarded, commit a wrong unto
others and therefore unto yourself.
And for that wrong committed must you knock and
wait a while unheeded at the gate of the blessed.
Like the ocean is your god-self;
It remains for ever undefiled.
And like the ether it lifts but the winged.
Even like the sun is your god-self;
It knows not the ways of the mole
nor seeks it the holes of the serpent.
But your god-self dwells not alone in your being.
Much in you is still man,
and much in you is not yet man,
But a shapeless pigmy that walks asleep
in the mist searching for its own awakening.
And of the man in you would I now speak.
For it is he and not your god-self nor the pigmy
in the mist, that knows crime and the punishment of crime.
Oftentimes have I heard you speak of one
who commits a wrong as though he were not one of you,
but a stranger unto you and an intruder upon your world.
But I say that even as
the holy and the righteous
cannot rise beyond the highest
which is in each one of you,
So the wicked and the weak
cannot fall lower than
the lowest which is in you also.
And as a single leaf turns not yellow but
with the silent knowledge of the whole tree,
So the wrong-doer cannot do wrong
without the hidden will of you all.
Like a procession you walk
together toward your god-self.
You are the way and the wayfarers.
And when one of you falls down
he falls for those behind him,
a caution against the stumbling stone.
Ay, and he falls for those ahead of him,
who though faster and surer of foot,
yet removed not the stumbling stone.
And this also, though the word lie
heavy upon your hearts:
The murdered is not unaccountable for his own murder,
And the robbed is not blameless in being robbed.
The righteous is not innocent
of the deeds of the wicked,
And the white-handed is
not clean in the doings
of the felon.
Yea, the guilty is oftentimes
the victim of the injured,
And still more often
the condemned is the burden bearer
for the guiltless and unblamed.
You cannot separate
the just from the unjust
and the good from the wicked;
For they stand together
before the face of the sun
even as the black thread and
the white are woven together.
And when the black thread breaks,
the weaver shall look into the whole cloth,
and he shall examine the loom also.
If any of you would bring to judgment
the unfaithful wife,
Let him also weigh
the heart of her husband in scales,
and measure his soul with measurements.
And let him who would lash the offender
look unto the spirit of the offended.
And if any of you would punish
in the name of righteousness
and lay the ax unto the evil tree,
let him see to its roots;
And verily he will find the roots of
the good and the bad,
the fruitful and the fruitless,
all entwined together
in the silent heart of the earth.
And you judges who would be just,
What judgment pronounce you upon him
who though honest in the flesh
yet is a thief in spirit?
What penalty lay you upon him who slays
in the flesh yet is himself slain in the spirit?
And how prosecute you him
who in action is a deceiver and an oppressor,
Yet who also is aggrieved and outraged?
And how shall you punish those
whose remorse is already greater
than their misdeeds?
Is not remorse the justice
which is administered by that very law
which you would fain serve?
Yet you cannot lay remorse
upon the innocent
nor lift it from
the heart of the guilty.
Unbidden shall it call
in the night,
that men may wake and
gaze upon themselves.
And you who would understand justice,
how shall you unless you look upon
all deeds in the fullness of light?
Only then shall you know that
the erect and the fallen are
but one man standing in twilight
between the night of his pigmy-self
and the day of his god-self,
And that the corner-stone of the temple
is not higher than the lowest stone in its foundation.
끝으로 오늘 아침 지인으로부터 받은 작자 미상의 글을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아래와 같이 옮겨 보리라.
감사하는 인생
어떤 사람이
아직 동이 트기 전 강가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어둠 속에서
강가를 거닐던 중
그는 무언가
자루 같은 것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채로
자세히 보니
그건 가방이었습니다.
호기심에
그 가방을 열어보니
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그는 강가에 앉아서
가방 속의 돌들을 하나씩 꺼내서
강속으로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던질 때마다 어둠속에서
첨벙 첨벙 들려오는
물소리를 즐기며
그는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한 개의 돌을
무심코 던지려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돌멩이가
떠오르는 태양 빛에
반짝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란 그는
돌을 들여다 보고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침 아침 산책 나온 몇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누가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까?”
그가 통곡을 하다 말고 대답을 합니다.
“여보시오,
이게 뭔지 아시오?
다이아몬드요.
조금 전만 해도
이 가방속에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는데…
나는 그게 다이아몬드인 줄 모르고
한 시간 넘도록 강물 속에
다 던져 버렸단 말이오.
그래서 이젠
한 개밖에 남지 않았소.”
그는 계속 통곡하더랍니다.
이런 모습이
혹 오늘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런지요…
수많은 감사의 조건들
수많은 행복의 순간들
무심코 떠나보내고
또 이러한 것들을
흘러가는 세월이라고 하는 강물에
다 던져 버리고 후회는 않았는지요.
우리 가족들이 건강해서
감사할 수 있어 좋고
우리가 만나는 주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서 좋고
우리가 대접 받기보다
우리가 먼저 섬길 수 있어서 좋은
그런 하루하루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다이아몬드 한 개라도
뒤늦게 갖게 된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간 순간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Life of Gratitude
One went for a walk by the riverside before dawn.
While walking in the darkness, he stumbled over something and fell.
While on the ground, he saw that the object he fell over was a bag.
Curious, he opened the bag;
it was full of little stones.
Bored with nothing else to do, he sat by the bank and began to throw the stones into the river, one by one.
Enjoying the splashing sound made by the water in the darkness, he was waiting for the morning sun to rise.
He was about to cast his last stone without a thought, and he stopped, utterly stunned…
The stone held in his hand sparkled in the first rays of the rising sun.
He took a close look at the stone, and began to wail loudly.
Several people who were taking a morning stroll by the bank gathered around him, asking:
“What’s the matter? Did anyone drown in the river?”
In the midst of his weeping, he replied:
“Do you know what this is? This is a diamond!
And this bag was full of these diamonds a while ago…
And I cast them all away into the river for over an hour, not knowing that they were diamonds!
And now I have only one left…”
Are we not like him in the way we live these days?
We cast away without a thought so many precious moments of gratitude and happiness.
Only to regret later,
having cast them all
into the river of time.
From now on,
let us determine
to make each day precious.
Grateful that our loved ones are healthy,
Happy that we can love our neighbors,
and happy that we can serve
instead of being served,
Living each day
with the gratitude
of knowing finally
the preciousness of
the one last remaining diamond
we possess now.
ㅡ By an anonymous writer
이 우화(寓話)는 우린 모두 별똥별 유성(流星meteor), 성신(星神/身) 코스미안이란 뜻이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