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7일자 미주 뉴욕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삶의 향기] 칼럼 '오래된 인연에 감사하며' 필자 청룡암 주지 스님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 겪어보고 느끼는 것이 더 강렬해서 자신도 모르게 '혹, 그 인연인가' 하게 되는 일이 더러 있다"며 "내 삶의 편린들만 돌아보아도 인연이란 참! 알 수가 없다"고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적고 있다.
며칠 전 한 스님과 통화하다 환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스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 동생이 결혼을 해서 조카가 태어났는데, 얼굴 생김새는 물론이요, 커갈수록 하는 행동이 어머니와 꼭 닮았다는 얘기였다. 말투와 행동이 어머니 살아생전처럼 똑같이 하는데, 아마도 모친의 환생인 듯싶다며 스님은 신기해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코웃음 칠 소리겠지만, 사실 이런 얘기는 불가에 흔하다. 환생을 따지지 않아도 먼저 떠나간 소중한 인연이 다시 태어나 내게 온 것 같다는 얘기 말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 겪어보고 느끼는 것이 더 강렬해서 자신도 모르게 ‘혹, 그 인연인가’ 하게 되는 일이 더러 있다. 내 삶의 편린들만 돌아보아도 인연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전생 일은 금생을 보면 알 수 있고, 내생 일도 금생을 보면 알 수 있다던데, 전생의 나는 뭐였으려나? 빙글빙글 또 망상 속을 서성였다. 전생까지는 모르겠고, 얼마 전 기이한 인연을 만나긴 했다. 일본 유학시절, 우연히 내 이삿짐을 날라준 유학생들을 20년 만에 다시 만났다.
내가 사는 청룡암에 별채를 개조하여 최근에 다실로 꾸몄다. 이름하여 ‘환희당(기쁘고 행복해지는 집)’이다. 다실이 완성된 후, 이곳에 옛 신중탱화(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그림)를 꺼내 모셨다. 예전에 살던 스님이 오래된 탱화를 떼어내고 새로 조성하여 법당에 모시는 바람에, 옛 탱화는 천에 싸인 채 벽 뒤에서 삭아가고 있었다. 요사채(스님들 처소) 보수공사를 하다가 궁금하여 꺼내보았는데, 과연 복원작업이 시급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는 스님께 탱화 봐줄 분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함께 온 교수님들이 놀랍게도 20년 전 내 이삿짐을 날라주었던 그 유학생들이었다.
반가움에 한참을 추억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들이 처음 그린 작품이 우리 절에 모신 새 신중탱화였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탱화 밑을 살펴보니, 과연 그분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자신들이 처음 그린 불화가 이곳 신중탱화였고, 이제 다시 복원할 불화 역시 자신들이 직접 떼 낸 이 암자의 신중탱화인 셈이다.
게다가 무슨 인연인지 20년 전 딱 한 번 만나 이사를 도와준 스님이 하필이면 이 절을 맡고 있으니, 인연이 기이하다.
요즘엔 세상이 하도 빨라서 과보도 LTE, 아니 5G 속도로 받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전생에 지어 이생에 받는 과보가 아니라, 돌아서면 받는 그런 신속한 인과의 시대를 우리가 산다고 말한다.
물론 20년이면 그리 빠른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게 무슨 인연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피천득 선생의 유명한 ‘인연’도 있지만 요즘엔 다들 냉철해서 그런지 만남과 이별도 폐기처분하듯 빨리 흘려버리는 듯싶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들어야 할 품이 작지 않듯, 좋은 인연에도 많은 공이 필요하다. 인과가 빠르든 느리든 적어도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가 필요할 테고, 그래야 인연의 끝도 좋은 법이다.
현대인들은 고운 인연을 맺으려 해도 퍽 예민해한다. 농담 건네기도 쉽지 않고, 운치 있는 망상을 나누기도 어렵다. 물론 번거로운 일들과 코로나에 대한 스트레스, 아름다운 산과 강·바다도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어 답답할 테니, 이해는 간다.
달라이라마 존자께서 이르길 “우리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작은 일에 과민하게 반응하며, 가끔은 모든 것을 너무 개인적인 지적으로 받아들여 아픔과 고통을 가중시킨다”고 했다.
맞다. 나만 보아도 인생의 많은 날들을 피로에 지쳐 까다롭게 굴었던 것 같다. 신경초처럼 과민해서 좋은 일이 없는데, 가시 돋친 채 산듯하다. 우리 모두 따사롭게 만물을 보듬는 저 맑은 해처럼, 풍요로운 가을 달처럼 넉넉하게 서로를 비추며 살았으면 좋겠다.
<원영 청룡암 주지 스님>
내가 겪은 에피소드 일화逸話 셋 간단히 적어보리라.
제1화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6.25 동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1.4 후퇴 때 피난 갔던 대전 장터에서 양키물건 장사를 할 때 미군 PX에서 나오는 물건 사러 당시 대전에 주둔해있던 미1군단 동네로 갔다가 마침 그날 북쪽으로 이동하는 부대를 따라가게 되었다.
부대 사령관의 '하우스 보이'로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귀여움을 많이 받다가 한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그의 입양 제의를 사절하자, 그의 소개로 당시 어머니가 계시는 대전에 있던 유엔 한국 원조 기구 CAC의 영국인 부사령관 숙소 하우스 보이가 되었다. 그러다 이 영국인 부사령관이 영국으로 귀국 날자를 6개월 앞두고 암으로 사망하게 되어 나는 서울로 돌아와 전에 다니던 경복중고등학교에 복학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던 미군 사령관 따라 '서당 개 풍월'하는 내가 기특했었는지 그는 나를 입양해 뉴욕에 있는 줄리아드에 보내주겠노라 했었고, 영국인 부사령관은 귀국할 때 나를 영국으로 데려가 옥스퍼드대학에 보내주겠노라고 했었다.
사람 일 정말 알 수 없는 것일까. 내가 꿈도 꾼 일 전혀 없었는데, 너무도 뜻 밖에 아빠가 갈 뻔 했었던 옥스포드와 줄리아드를 내 첫 딸과 둘째가 나오게 되었다.
제2화
젊은 날 군복무 시절 펜팔하던 소녀와 제대후 서울에서 단 세 번 만난 후 소녀 어머님의 반대로 헤어졌던 여인을 25년이 지난 뒤, 20년 살던 내 첫 아내와 헤어진 직후, 또한 뜻밖에 뉴욕에서 다시 만나 재혼, 10개월 후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런 다음 만나 30여 년째 살고 있는 내 세 번째 아내 이야기를 하자면 '세 어머니' 이야기가 되겠다.
94세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말년에 나는 시설 좋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대인 양로원(Nursing Home)에 모셨는데 별세하시기까지 정신도 말짱하셨다.매주 한두 번 방문했는데 어머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한 주 전에 “태상아, 네 외할머니 너한테 안 오셨니?”라고 물으시는 게 아닌가. 그 당시 나는 흑인들이 많이 사는 뉴저지주(州) 오렌지시(市)에서 가발(假髮)가게를 하나 하면서 가게 뒤에 있는 헛간 같은 곳에 군용(軍用) 야전침대(野戰寢臺)를 하나 놓고 혼자 지낼 때였다.
“어머님,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나는 반문(反問)할 수밖에 없었다. 외할머니를 뵌 적도 없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분이었으니까. 그랬더니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 외할머니가 내게 오셨길래 난 괜찮으니 태상이한테 가셔서 수발 좀 들어주시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다시 찾아뵈었을 때 어머님께서 ‘네 외할머니께서 다시 오셨기에 난 정말 괜찮으니 제발 태상이한테 가서 좀 돌봐주시라’고 했다는 말씀이셨다. 그런지 이틀 만에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셨다.
병원에 계신 동안 어머님을 극진히 간호해준 한국인 간호사가 내가 세 번째로 결혼해 32년째 같이 살고있는 현재 나의 아내다. 어쩌면 내 외할머니께서 XX이라는 여인으로 나에게 나타나 주셨는지 모를 일다.
XX는 인천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오빠 한 명이 있었지만 장녀(長女)로서 어머님과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 둘을 돌보는 소녀가장(少女家長)이 되었다. 고학(苦學)하며 중학교를 마치자 학비가 안 드는 간호고등학교에 진학해 간호사가 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줄곧 반장을 하던 똑똑하고 예쁜 XX은 부반장을 하던 남학생을 그가 공군사관학교에 다닐 때부터 사귀게 되었다. 그러다 XX이 서독 파견 간호사로 2년 계약하고 떠나게 되었다. 서독에 가서도 휴일도 없이 낮번 밤번 이중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버는 돈을 다 한국으로 송금했고 남자친구와는 편지로만 서로의 그리움을 달래면서…
계약 기간이 끝나가자 XX는 큰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오면 공군 소위와 결혼하게 될 텐데 남자 쪽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지라 더 이상 친정을 도울 수 없는 까닭에서였다고. 더구나 바로 밑의 여동생이 사춘기 때부터 정신이상이 생겨 경제적인 부담이 커지고 있을 때였다. 깊은 고민 끝에 그야말로 심청이가 따로 없다고 가족을 위해 자신의 첫사랑까지 포기하고 친구의 소개로 (그 당시) 서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병사를 만나 결혼해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후일담(後日談)이지만 깊은 실연(失戀)의 늪에서 빠져나온 남자친구는 XX를 이해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민 후 다시 XX를 만나보고 평생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 공군소장까지 되었다가 퇴역했다. 한편 XX는 결혼한 남편이 미군에서 제대하고 직장을 가지려 하는 것을 만류해 대학에 진학시켰다. 영어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미국의 간호사 자격증도 없이 간호사가 아닌 간호사 보조원으로 밤낮으로 일하면서 딸 둘을 낳아 키우다 보니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였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 신문 기자가 된 남편이 술친구 부인과 바람이 났다.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XX는 어린 딸 둘을 데리고 뉴욕으로 올라와 머리 싸매고 영어사전으로 단어 하나하나 뒤져가면서 의학서적을 독학으로 외우다시피 해서 정식 간호사 Registered Nurse가 되었다. 이혼하면서 전(前) 남편으로부터 받기로 된 양육비도 한두 달 받다 말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큰딸은 정신과 전문의 그리고 작은딸은 교육자로 아주 훌륭하게 키웠다. 애들한테는 어려서부터 아빠에 대한 좋은 점만 얘기해주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빠와 가까이 지내도록 방학 때마다 아빠의 새 부인한테 줄 선물까지 들려 보내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 남편 시댁 식구들 경조사까지 꼭 챙기면서 친하게 지내오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에 있는 친정 식구들을 다 미국으로 초청해 오빠와 남동생은 세탁소를 경영케 하고 막내 여동생은 공부시켜 시집 보내고 바로 밑의 동생은 정신장애자들 보호시설에서 잘 지내고 있다.
이쯤 해서 지지난해 가을 (날짜는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하루키 무라카미 작가님에게 드리는 제1신(信)으로 지난해 가을 출간된 영문판 ‘코스미안 랩소디 (Cosmian Rhapsody)’에 실린 글 ‘An Open Letter to Mr. Haruki Murakami’를 아래와 같이 옮겨 본다. (관심 있는 독자를 위해)
Dear Mr. Haruki Murakami,
Today I read your interview article with Sarah Lyall of The New York Times (October 10, 1018) and I was impressed. I agree with you that “a book is a metaphor.” You expressed my cherished thoughts so poetically.
I do like your statement very much : “If you close your eyes and dive into yourself, you can see a different world. It’s like exploring the cosmos, but inside yourself.” Wow, you were speaking for me too!
All the while, living my life for eighty-two years, I’ve never dreamed that there would be a day like today, one day. Looking back, had I not lost my first love almost sixty years ago, I could not have come to realize that I, and all others, all beings, are “cosmos” born “arainbow of love” from the Cosmos. A young boy who happened to fall in love with the micro-cosmos of a flower ended up embracing the whole of the macro-cosmos.
Your answer was: “I don’t have to dream, because I can write,” when you were asked at the end of the interview: “What do you dream about?” You said: “I’m a realistic person, a practical person, but when I write fiction, I go to weird, secret places in myself. What I am doing is an exploration of myselfㅡ inside myself.”
In my case, I didn’t have to write fiction, because I’ve been living my dreams, being aware from early on that facts were stranger than fiction and that life itself was but a dream.
As published author of 27 books (including 5 translations: Thomas Mann’s ‘Transposed Heads’ and Kahlil Gibran’s ‘The Prophet,’ ‘The Garden of the Prophet,’ ‘Spirits Rebellious,’ and ‘The Nymphs of the Valley”) ㅡ all in Korean except three in English, ‘Cosmos Cantata (2013),’ ‘Cosmian (2019),' and ‘Cosmian Rhapsody’ (2020) ㅡall based on my own life.
I couldn’t agree more with Ralph Waldo Emerson when he said:
“Use what language you will, you can never say anything but what you are.”
Ever since my earliest child- hood, I aspired to write on the invisible sheet of life with the pen of living in the ink of blood, sweat and teardrops of love, and I’m still striving on.
I am writing this letter, seeking your help, perchance, through your huge readership, in reaching out to find a Japanese lady whom I have forsaken almost fifty years ago and to whom I’m dying to extend my belated apologies and explanation before I expire, if I could by any remotest chance.
Unlike you, I’ve usually been an unrealistic and impractical person except as to this lady, which became my lifelong regret and shame. I don’t know if there is a similar saying in Japan as in Korea: ‘Make sure you build a Great Wall with a lady even if you sleep with her only for one night.’
In 1970, I visited Japan for the first time to attend a business conference in Tokyo. Capitalizing on my off duty free time for a couple of days, I went to Kyoto and Nara for sightseeing after visiting the Osaka Expo. Upon arriving at the Kyoto train station, I approached a young lady in the plaza and making use of my poor Japanese, I asked her for some directions.
As it turned out, she was at the train station plaza to meet her sister, and saying a goodbye to her sister, to my infinite surprise, she offered to be my guide for the day. How could I resist this undreamed of ‘romantic tour’ with such an attractive young lady? As if in a sweet dream, the whole day passed by in a blink of an eye. Even more surprising was her kind invitation for dinner at her home. After dinner with her friends and me, she accompanied me to the train station. She even came down to the platform to see me off after buying me some cookies and candies from the gift shop at the station.
I was taking the night train for Tokyo to fly back to Seoul the next morning. During the short flight, I was in agony, not knowing what to do. It may have been just a friendly goodwill kindness on her part, nothing more and nothing less. But as far as I was concerned, this was a case of ‘all or nothing’ and ‘now or never.’
I did not let her know that I was a married man with two children. Since she didn’t ask me, I felt it’d be presumptuous and rude of me to tell her I was not available. More likely, though, how I wished that I were a ‘free man!’ After much struggle between my head and my heart, just moments before disembarking from the airplane, I tore up and threw away the note she handed me with her name and address written on it. I justified and rationalized my action by telling myself:
“It’s all for her. I don’t want to give her any ‘false hope.’ The sooner she forgets about me, the better off she will be to find a suitable, unattached, eligible bachelor.”
Burning that bridge to her once and for all had to be the best decision that I could make for her, even though it was the worst for me, I thought.
Tragi-comically enough, soon after my return home, my wife and I got divorced due to our irreconcilable differences. Our marriage was an accident in the first place. We had sex under the influence of alcohol one night without having had a date. In those days, ‘one-night-stand’ was unheard of. I felt responsible and we married.
As soon as we got divorced, we learned that she was pregnant with our third child. So we remarried for the sake of the children. After trying harder eighteen more years, we got divorced again for the second time, twenty years after our first wedding.
In my earliest days, I started devouring great people’s biographies and reciting their sayings. Thus brainwashed and hypnotized, I convinced myself that I was a big fire, not a small one easily extinguished even by a breeze, like an eternal star that starts to shine as soon as the sky is dark enough, or like a kite that rises highest against the wind, not with it.
I forced myself to live by ‘sollen’ in Geman meaning ‘ought to be’ in English. However, I’ve come to realize, only after so many trials and errors, that one cannot go against the nature of things, that is, ‘sein’ in German meaning ‘to be’ in English. What will happen, will; what will not, won’t, no matter what. I’v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for anything to happen anytime anywhere, the whole Cosmos has to conspire.
If I had failed to build the Great Wall of our blink-brief romance half a century ago, I pray, with your assistance, I might be able to rebuild the bridge between us, at long lastㅡ even if it may be between our tombstones with a copy each of the Japanese edition of my book in Korean ‘우린 모두 성신(星身/神) 코스미안이다 We all are Cosmians born as star body/soul (2020) and of ‘Cosmian Rhapsody’ in English (2020) to be laid at hers for a bouquet, if you are so kindly inclined to translate these two books, my 26th and 27th.
Gratefully,
Lee Tae-Sang
제3화
16 년 전 나는 전립선 암 진단을 받고 다섯 딸들에게 남겨 즐 유일한 유산으로 아빠가 살아 온 삶을 짤막한 동화 형식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원고를 천 여 군데 한국 출판사에 문의해보았으나 거절만 당하다가 2011년 자연과인문 출판사에서 '어레인보우 Arainbow: 무지개를 탄 코스미안'이 출간되었고, 또 이를 영문으로 다시 써 2천 여 미국 출판사에 알아 본 끝에 2013년 영문판 'Cosmos Cantata: A Seeker's Cosmic Journey'가 나오게 되었다.
한글판 '어레이보우'를 지극정성껏 만들어주신 자연과인문 출판사 전승선 대표님 이름만 보고는 남자분으로, 성함姓銜의 함자銜字 한자漢字가 이길 '승勝' 착할 '선善'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만나 뵈니 여자분에다 오를 '승昇' 신선 '선仙' 자字子라고 해서 너무도 신기 神奇 절표絶妙한 인연因緣이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무지개를 쳐다보거나 좇는 대신 올라타리라는 뜻으로 세상에서 내가 처음 으로 만들어 쓰기 시작한 영어 사전에도 없는 ARAINBOW란 단어와 우주 너그네 코스미안이란 단어가 정확하게 딱 맞아떨어지는 이름이라니 너무도 신비롭고 기이할 뿐이어라.
정녕, 별들의 만나고 헤어짐이 그 누구의 뜻과 섭리에서인지 알 수 없어도, ‘인연因緣’이란 것이 ‘우연偶然’이라 해야 할지 ‘필연 必然’이라 해야 할지 몰라도 어쩜 둘 다 포함한 단어가 있다면 ‘요행僥’ 영어로는 ‘Serendipity’이라 할 수 있으리라.
자, 그럼, 우리 이 ‘요행Serendipity’에 대해 지난해 2020년 5월 22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 칼럼 옮겨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요행(僥倖)의 요술(妖術)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감에서일까, 우리 모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 이든 간에 한 가지 개념에 매달리게 되는가 보다. 이 개념을 대표 하는 것으로 요행(僥倖), 영어로는 세런디피티(serendipity)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몇 년 전 런던에서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단어로 serendipit가 뽑혔다. 예수와 돈이라는 단어는 공동 10위였다.
19년 전(2001년) 개봉한 미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 ‘세렌디피티 (Serendipity)’는 피터 첼섬(Peter Chelsom) 감독, 존 쿠삭(John Cusack), 케이트 베킨세일(Kate Beckinsale) 주연으로 뉴욕에 있는 고급 백화점 블루밍데일에서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 중 필연인지 우연인지 간의 ‘요행’으로 만난 두 남녀의 운명적인 로맨스 러브 스토리이다. 두 사람은 각기 이미 애인이 있는 처지였는데….
자, 그럼, 이 단어의 뜻과 그 유래를 좀 살펴보리라.
‘세런딮의 세 공주(Three Princesses of Serendip)’에 나오는 이야기 로 저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 실론(Ceylon, 1972년 Sri Lanka로 개칭됨)으로부터 세 공주가 이상한 나라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낙타를 찾고 있는 남자를 만났다.
오는 길에 낙타를 보진 못했지만 그들은 낙타의 주인 남자에게 물었다. 찾고 있는 낙타가 한쪽 눈이 멀지 않았느냐고, 이가 하나 빠져있지 않느냐고, 다리를 절지 않느냐고. 놀랍게도 대답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다 사실이라고. 그러자 그 낙타가 등 한쪽에는 버터를, 다른 한쪽에는 꿀을 짊어지고 있을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한 여인이 그 낙타를 타고 있는데 그 여인은 애를 밴 상태일 것이라 고 짐작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확히 알아맞히는 것을 보고 낙타 주인이 이 공주들을 자기 낙타를 훔친 도둑으로 몰자 자신들은 단지 길을 주시하면서 길 양옆으로 고르지 않게 풀을 뜯어먹은 흔적과 풀을 씹다가 흘린 장소며 낙타의 발자국 모양과 불편한 자세로 낙타를 타고 내린 동작이며 개미와 파리 떼들이 몰린 방향을 감지했을 뿐이라고 그들은 대답했다.
이 민속동화에서 하나의 대단한 개념이 싹텄다고 미국 프린스톤 대 출판부에서 2004년 출간된 로버트 킹 머튼(Robert King Merton)과 엘리노 바버(Elinor G Barber) 공저의 ‘세런디피티의 여정과 모험 (The Travels and Adventures of Serendipity: A Study in Sociological Semantics and the Sociology of Science)’은 밝히고 있다.
실론의 고대 이름이 세런딮(Serendip)이고 앞에 언급된 동화 ‘세런딮의 세 공주(Three Princesses of Serendip)’가 영국의 문인 호레이스 월포울(Horace Walpole 1717-1797)에 의해 서구사회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가 1754년 이 ‘엉터리 같은 이야기’ 를 읽고 나서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세런디피티 (serendipity)’라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단어를 만들어 쓰게 되었노라고 적었다. 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이 말의 뜻은 동화 속의 공주들이 찾지도 않았던 사실을 우연히 발견 한 방법을 의미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세런디피티란 ‘영리(怜俐)한 우연’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이 단어의 오해, 무시, 부활, 왜곡, 찬사, 논쟁 등으로 점철된 전설 같은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이 책의 저자는 흥미진진하고 재치 있게 많은 사례를 들어가면서 세런디피티의 유래를 추적하고 그 미래를 점치고 있다.
우연한 발견이 과학에 있어서도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필수 적인 것으로 인식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물리학 자 빌핼름 뢴트겐 (Wilhelm Ro”ntgen 1845-1923)은 우연히 사진판 에 나타난 현상을 보고 X-rays를 발견했고, 알렉산더 플레밍 (Alexander Fleming1881-1955)은 배양된 곰팡이를 보고 페니실린 (Penicillin)을 발명하게 되었다고. 그러니 실험실이나 제약회사 등도 우연한 발견을 위해 많은 여지를 남겨둘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이 어디 과학에 한해서뿐이랴.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이 요행이 란 요소는 예외적이라기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필수, 필연적인 것으로 순간순간 우리가 발견, 감사히 누릴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우리가 흔히 ‘요행(僥倖)’이라 하면 막연히 바라거나 뜻밖에 얻는 행복을 말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찾지 않던 행운을 우연히 발견하는 요술(妖術)을 우리가 개발할 수 없을까. 벌써 몇 십년 째 이런 의문을 품고 그 답을 찾아 연구해온 학자가 있다.
크로아티아(Croatia) 출신 미국 시몬즈 대학(Simmons University) 의 정보 과학자 샌다 에르델레즈(Sanda Erdelez, Ph.D, the Director of the Simmons School of Library and Information Science)박사이다.
그녀는 1980년대 풀부라이트(Fulbright U.S. Scholar Program) 장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세런디피티(serendipity)’란 영어 단어를 접했다. 크로아티어에는 이처럼 기대하지 않았던 예상 밖의 행운을 발견하는 ‘스릴’을 표현할 말이 없다고 한다.
1754년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이 단어는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듯 우연히 굴러떨어진 행운이란 뜻이 아니고 하나의 특별한 재주나 기술 또는 기능을 의미했다는 걸 알게 된 그녀에게는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이 재능을 계발할 수 있을까가 지대한 관심사가 되었다. 이 세런디피티는 의식하든 안 하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이라고 보고, 그녀는 1990년대부터 연구 대상으로 100명을 선별해서 어떻게 그들이 자신의 세런디피티를 만드는데 성공했는지 아니면 실패 했는지를 연구 조사해 왔다.
그녀가 관찰한 바로는 조사 대상자들이 세 그룹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비접촉자들(non-encounterers)’로 어떤 정보를 찾아 수집할 때 자신들의 조사 목록에만 주목하고 난외 여백으로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그룹은 때때로 세런디피티를 접하게 되는 ‘수시접촉자들(occasional encounterers)’이며, 세 번째 그룹은 남이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보물을 찾는 사람들로 매사에 열린 눈과 머리 그리고 가슴을 갖고 호기심에 찬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을 그녀는 ‘초접촉자들(super-encounterers)’이라고 부른다. 이런 ‘초접촉자들’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안테나를 가진 것처럼 남들이 못 보는 걸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감지력과 인지능력의 소유자들이란다.
인류 역사를 통해 발견된 수많은 진리와 발명품들이 우연한 행운이 가져다준 게 아니고 인간정신 과 인간혼의 산물이라고 많은 과학자 들이 동의한다. 사람들이 미지의 세계를 탐색할 때 극히 창조적인 작업을 하게 되고, 한 발명가가 발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란 말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자유 재즈(free jazz)’ 방식을 선호한다. 예술이든 학문이든 어떤 기존의 방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때 그때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대응하고 임한다는 얘기다.
유럽의 특허권 소지자 발명가들을 조사한 서베이(survey)를 보면, 특허품 50%가 일종의 세런디피티 적인 과정 (serendipitous process)을 통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노벨상 수상자들도 수많은 우연과 접촉의 연결고리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세상에 바를 규칙 정도도 올바른 길 정도(正道)도 없으려니 와 오로지 자신의 요행(僥倖)을 만들어 찾는 요술(妖術)을 익혀야 하리라.
나 자신을 포함해 우주 만물이 모두 다 요행의 산물이 아닌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한다는 것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순간순간이 요행이 아니고 무엇이랴.
몇 년 전부터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된 ‘헬조선’이란 단어가 자신들이 태어나 살고있는 대한민국이 지옥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그 후로 ‘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인 ‘이생망’이 유행이라고 한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휘청거렸던 한국 경제, 60년대 많은 국민이 겪은 보릿고개, 6.25로 잿더미가 되었던 50년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와 일제의 수탈, 그리고 18, 19세기에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려야 했던 우리 조상 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휴전선 바로 위에 있는 진짜 ‘헬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주민들인 우리 북한 동포들을 잠시 라도 생각해 본다면 어찌 이토록 자포자기하는 절망적 발상의 망발이 있을 수 있을까.
얼마 전부터 미국에선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란 단어가 조명을 받아오고 있다. 과학자들의 연구 조사로 판명된 바로는 수많은 신제품과 성공적인 기업들이 ‘디자인 사고’의 결과물이란 것이다.
스탠포드대학의 저명한 엔지니어링 교수로 ‘성취 습성(The Achievement Habit: Stop Wishing, Start Doing, and Take Command of Your Life, 2015)’의 저자인 버나드 로스(Bernard Roth, Ph.D)박사는 이 디자인 사고가 무엇이든 어떤 문제도 풀고, 어떤 목적도 달성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역설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현재의 자신과 전혀 다른 새로운 너(a Whole New You)’를 이 디자인 사고로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아닌가. 정말 참으로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말부터 바로 잡아 써야 할 것이다. ‘헬(Hell)’을 ‘헤븐(Heaven)’으로 바꿔보는 것이다. 그런 긍정적인 도전정신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긍정의 힘은 부정의 힘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기때문에 흥분과 기쁨과 스릴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 현실 을 어떻게 보고 대응하는가에 따라 똑같은 현실이 ‘화(禍)’가 되기 도 하고, ‘복(福)’이 되기도 하지 않던가.
그 한 예로,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마쓰시다 고노스께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세 가지 유리한 점을 가지고 태어났다. 첫째는 집안이 가난해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었다. 둘째는 학교 를 다니지 못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 셋째는 몸이 약해 부지런히 운동해야 했고 그 결과 몸도 건강해졌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곧 진정되고 끝나더라도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고 불확실성이 지배 하게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내다보면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이 불확실성이 언제 어디서나 삶의 정석이 아니었 던가.
이 예측불허야말로 삶의 묘미가 아니랴. 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소설책을 읽거나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때도 우리가 그 스토리나 경기의 결과를 미리 안다면 그 무슨 재미가 있겠으며, 김이 팍 새는 일 아니랴.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의 기독교 신학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예정설이 있는데, 이는 인간 개개인의 구원은 인간의 선행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신(神)의 의지로 미리 정해져 있다는 교리다. 그런 신학적(神學的)인 교리는 그렇다고 논외로 하고, 우리 순전히 ‘인학적(人學的)’으로 좀 살펴보자.
해마다 신년 연초가 되면 사람들이 토정비결이나 일 년 신수를 보며 평생 사주팔자가 궁금해 역술가나 점쟁이를 찾지만, 내일 일을 모르게 망정이지 사전에 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얼마나 싱겁고 지겹고 지루한 일이겠는가. 내일을 모르는 것이 긴장감 있게 스릴만점으로 행복한 게 아니랴.
오늘에 충실하고 내일이라는 여백을 남겨두는 편이 훨씬 더 살 맛과 살 멋이 있으리라.
어디 또 그뿐이랴. 사람도 세상도 애초부터 완전무결하다면, 신(神) 처럼 완벽하고 천국처럼 더 바랄 게 없는 지경이라면, 그야말로 무미건조하고 매력이라곤 털끝만 치도 없는 로봇 같은 인간일 테고, 그런 천국이 바로 생지옥이 아닐까.
부족함이 있기에 채움이, 내리막이 있기에 오르막이, 어둠이 있기 에 빛이, 죽음이 있기에 삶이, 배설을 할 수 있기에 먹을 수 있고, 숨을 내쉴 수 있기에 들이쉴 수 있으며, 줘야 받을 수 있고, 떨어져 야 그리움이 싹트며, 떠나와야 고향이 생기지 않던가. 그러니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생망’은 이번 생은 흥했다는 ‘이생흥’이 되지 않겠는가.
최근 미국에서 삶을 막살기 시작할 나이 37세에 폐암으로 사망한 신경외과 전문의 폴 카라니티(Dr. Paul Kalanithi 1977-2015)가 22개월 동안 투병 중에 힘들게 집필한 원고가 그의 사후에 ‘숨이 공기로 변할 때(When Breath Becomes Air, 2016)라는 제목의 책 으로 출간되었다.
구도자의 집념으로 스탠퍼드 대학에서 두 개의 학사와 문학 석사 학위 그리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철학 석사를 받은 후 예일 대학 을 우등으로 졸업해 유능한 신경외과 전문의가 된 2013년 5월 그는 불치의 시한부 암 선고를 받게 된다. 칼라니티 박사의 스토리가 너무도 안타깝고 애처로운 것은 일편단심 신경외과 전문의의 경력 을 추구하는 동안 그는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배우는 일을 미루 어 왔는데, 그의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그는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워야 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끈 노래가 ‘백세인생’이었다. 이 히트곡은 김종완이 가사와 멜로디를 직접 써 25년 동안 무명으로 살았던 트로트 가수 이애란의 인생을 바꿔놨다고 했다. 한 인터뷰 에서 ‘백세인생’ 뒤 그가 내놓을 신곡은 어떤 곡일까라는 물음에 김종완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백세인생’ 속 150세가 돼선 죽는걸로 해석하는데 노랫 말 속 극락세계는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란 뜻도 있다. 그래서 저승 으로 넘어갔다 다시 이승으로 건너오는 환생의 이야기를 다뤄볼까 생각 중”이라며 그는 웃었단다.
어제가 전생이고 오늘이 이승이며 내일이 저승이라면, 우리는 오늘을 어찌 살아야 할까. 어제의 꿈이 오늘의 현실이고 오늘의 삶이 내일의 환생이라면, 작곡가 김종완 씨 말대로 오늘의 삶을 ‘인생의 최고의 순간’으로 만들어 순간순간 극락세계를 누려 보리 라.
바라건대, 김종완 씨가 ‘백세인생’에 이어 내놓을 신곡은 모름지기 ‘환생했다 전해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몸 안에서도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나 환생이 평생토록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헌 세포는 없어지고 새 세포가 생기는 일 말이다. 그러니 상상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한시바삐 꿈꾸기를 멈추고 모험적인 행동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수밖에 없으리.
이것이 다름 아닌 ‘요행(僥倖)의 요술(妖術)’이 되리라.
요행 만세! 요행의 요술 만만세를 부르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