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9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단상] 칼럼 '우리 는 이미 다 알고 있다' 필자 리처드 김 / 할리웃 배우조합 회원은 "상식이 통하고 정상적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며 "가짜가 판치는 세상이 되었고 그 가짜가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는 혼란스러운 세상 이 되었다"고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왜일까?
인생의 진리는 단순하다.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다 배웠다. 어떤 진리는 인생의 고난이 닥쳤을 때 깨달아지는 것도 있고 어떤 진리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 가슴으로 깨달아지 는 것도 있다.
그런데 왜 살면서 문제가 생길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방식이 바르다고 생각을 하기에 비정상적인 문제들을 푸는 것에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비정상이 정상이 된 세상 이라 정상적으로 살아가면 오히려 바보 소리를 듣는 세상이 되었 다. 그러다보니 사회에 나오면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르게 살아가 야 하기에 여간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착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사회에서 사회생활 부적응자 소리를 들어가며 살아가게 된다.
비정상적인 것들은 정상으로 되돌리려면 배 이상의 노력을 해도 정상으로 돌리기가 쉽지 않다. 상식이 통하고 정상적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이 되었고 그 가짜가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는 혼란스러운 세상이 되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정상적인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은 가짜가 진짜로 둔갑해버렸기에 정상적인 세상으로 되돌 기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리처드 김 / 할리웃 배우조합 회원>
1986년 미국에서 출간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 에서 다 배웠다 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이란 로버트 풀검 Robert Fulghum(1937 - )의 짤막한 에세이집이 있다. 그의 다른 책으로는 'It was on fire when I lay down on it', 'Uh-oh', 'Maybe (Maybe not)', 'From beginning to end? - The rituals of our lives', 'True love', 'Words I wish I wrote' 등이 있다.
그의 말은 이 한 마디에 요약될 수 있을것 같다.
"이런 것들을 나는 배웠다: 모든 것을 나눌 줄 알고 공정해야 한다. 남을 때리지 말라. 물건은 제 자리에 놓거라. 네가 어지럽혀 논 건 깨끗이 치우고 정돈해라. 네 것이 아니거든 가져가지 말라. 남을 다치게 했으면 미안하다고 말해라. 음식 먹기 전 반드시 손을 깨끗 이 씻어라. 따뜻한 쿠키 과자와 찬 우유는 네 몸에 좋다. 뭣에 치우 치지 말라. 매일 (뭘) 좀 배우고, 생각하고, 그리고 칠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고 일하도록 하라. 날마다 오후엔 낮잠도 자고, 밖에 나갈 땐 차 조심하고, 손 잡고 함께 행동하라. These are the things I learned: share everything, play fair. Don't hit people. Put things back where you found them. Clean up your own mess. Don't take things that aren't yours. Say you're sorry when you hurt somebody. Wash your hands before you eat. Warm cookies and cold milk are good for you. Live a balanced life. Learn some and think some and draw some and paint and sing and dance and play and work some every day. Take a nap every afternoon, and, when you go out into the world, watch for traffic, hold hands, and stick together."
- Robert Fulghum
이는 극히 상식적인 얘기로 '말하면 잔소리'가 아닌가.
문제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다 '진짜'와 '정상'으로 태어나는데 타락 한 어른들의 잘못된 세뇌작업으로 아이들 또한 자라면서 '가짜'와 '비정상'이 된다는 거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이를 암만 먹어도 '동심' 을 잃지 않겠노라고 다짐 또 다짐하면서 내 세 딸들도 그러기를 빌고 바라는 뜻에서 애들 이름에 아이 아兒 자字를 넣어 해아海兒, 수아秀兒, 성아星兒로 작명했다.
우리 모두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으로서로서의 진상眞相은 어떤 것 일까.
그런데 '진짜'와 '가짜',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이 따로 있을까.
‘진상을 밝히다/진상을 규명하다/진상을 털어놓다’의 ‘진상’에 대해 전광진 성균관대 중문과 교수는 이렇게 해설한다.
"眞자의 구조 풀이에 대하여 ‘진짜’ 정설은 없다. 확실하지 않은 억지는 부리지 말자. 본래 의미가 ‘신선이 모습을 바꾸어 하늘로 오르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道家(도:가) 사상에 감염된 것이 니 신빙성이 낮다. 어쨌든, ‘진짜’(true; genuine) ‘참으로’(really) 등의 의미로 쓰인다.
이 진상의 "相자는 木(나무 목)과 目(눈 목), 두 의미요소로 구성된 것인데, 부수는 편의상 目으로 지정됐다. 묘목이 자라는 것을 관찰 하는 모습을 통하여 ‘살피다’(observe)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후에 ‘보다’(look) ‘돕다’(assist)로 확대 사용되었고, ‘서로’(each other) 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眞相은 ‘참된 모습’, ‘거짓 없는 모습이나 내용’을 이른다.
노자 가라사대, ‘믿음직한 말은 꾸밈이 없고, 꾸민 말은 믿음이 안 간다.’(信言不美, 美言不信 - 老子)."
영어로 'make a scene'이라 하면 (부정적 의미의) 장면이나 광경을 만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집중시킨다는 의미다.
이상과 현실은 하늘과 땅이다. 양자兩者 간에는 무한한 거리가 존재한다. 하늘이 땅일 수 없듯이 하늘이 땅일 수도 없으리라.
신神은 하늘에서 살고 동물은 땅에서 산다면 신과 동물의 '튀기'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어디에 살아야 하나.
모든 인간은 땅을 밟고 산다. 현실을 초월할 수도 망각할 수도 없기에. 하지만 얼굴은 하늘을 우러러 살아야 한다. 이것이 인간 의 참된 도리이리라.
현재 인류는 물질문명의 개발로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면서 기후 변화를 초래해 지상 모든 생물의 멸종 현상을 재촉해 오지 않았 는가.
어쩜 현재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 범유행 역병이 급기야 자연의 자가 치유의 자정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렇 다면 뭣보다 인간이 먼저 멸종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 해답의 열쇠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게 아닐까. 그야말로 반신 반수(半神半獸)라 할수 있는 인간이 ‘불가역적’ 짐승으로 전락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가역적’으로 신격(神格)으로 우리 인격(人格) 을 높여 볼 것인가 하는 선택지가 있지 않는가. 영어로 개를 ‘dog’ 이라 하지만 이 단어를 거꾸로 보면 신(神) ‘god’이 되듯 이 말이다.
실존과 당위를 뜻하는 말로 독일어로는 ‘자인(sein)’과 ‘졸렌 (sollen)’이 있고, 영어로는 ‘투비(to be)’와 ‘옷트투비(ought to be)’란 기본 동사가 있는데, 주어진 본능대로만 살아야 하는 짐승의 삶이 전자라면 본능을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인간의 삶은 후자이리 라.
우리 냉철히 한 번 깊이 생각 좀 해보자. 우선 가역, 불가역할 때 ‘역 (逆)’이란 한자 거스를 ‘逆’을 바꿀 ‘易’으로 대치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동물처럼 바꿀수 없는 불가역(不可易)의 삶을 살지 않고, 창조 적 가역(可易)의 자유라는 엄청난 특전을 받은 우리 인간이라면, 이 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 수 있을까.
이야말로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이자 의무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선택받은 인간으로서의 우리 실존 ‘What We Are’가 조물주가 우리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면, 우리의 당위 ‘What We Become’은 우리가 우리의 조물주에게 바치는 우리의 선물이 돼야 하리라.
2020년 1월 23일자와 2021년 4월 30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글 둘 옮겨보리라.
[항간세설]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로 ‘그린일베’와 ‘좌음’이 있다. 아마도 녹색 베레모를 착용하는 미육군특수부대 ‘그린베레’에서 따 온 것 같은데, 네이버의 이미지 색인 ‘그린(Green)’과 극우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인 ‘일베(일간베스트)’의 합성어로 네이버 뉴스 댓글의 내용이 주로 우파 성향을 띤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그 반대로 다음은 좌파성향의 글이 많아 ‘좌음’으로 불린다고.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는 주류경제학과는 달리 비이성적이라고 규정하는 행동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인지적 편향’이라는 개념이 있다.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믿다 보면 ‘확증 편향’이 된다 는 것이다. 따라서 일편단심 독선독단적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 말에 ‘배알이 꼴린다’는 표현이 있다. 아니꼬워서 견딜 수 없다 는 뜻으로. 하지만 꼴릴 배알이라도 좀 남아있는 편이 낫다고 할 수 도 있지 않을까.
시인 김지하의 글 ‘오적(五賊)’이 실리는 바람에 폐간되고 말았지만 월간지 [思想界]의 당시 발행인 부완혁 선생님이 나에게 ‘무보수 게릴라 편집장’ 일을 부탁하시면서 글 쓰는 사람들 가운데는 집권 세력에 의해 발탁되기 위해 고의로 정부를 맹비난하는 ‘글쟁이들 이 이 있으니 이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다.
옛날 젊어서 잠시 해본 신문기자 시절 동료 기자 중에 유난스럽게 비분강개하며 위정자들을 헐뜯던 친구들이 얼마 후에 해외공보관 이다, 정부대변인이다, 청와대비서관이다 하며 권력 핵심의 주변 인물로 등장했다가 정부 여당의 전국구의원이나 장,차관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는 걸 보아 왔다.
이씨왕조를 세운 이성계를 비롯하여 일정시대 친일한 인사들처럼 영어속담대로 ‘이길 수 없거든 가담 합세하라’는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이리라.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볼 때 ‘이 몸이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단심가丹心歌’의 정몽주를 이상주의자라 한다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고 한 ‘하여가 何如歌’의 이방원은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 한 번 생각 좀 해보자. 윤동주처럼 일찍 죽는 것과 이광수 같이 오래 사는 것, 어느 쪽이 더 좀 성숙하고 현명하며 도통한 경지일 것인가를.
흔히 청소년 시절 ‘현실주의자’라면 산 송장과 같고 중장년에도 ‘이상주의자’라면 저능(低能)의 지진아 (遲進兒)라고 하지 않나.
현대자동차 창사 이후 초창기(1968)에 공채되어 내가 잠시 기획 업무 를 볼 때 당시 사장 비서로 있던 아가씨 말이 생각난다. ‘앞으 로 결혼하게 되면 온종일 윗사람 밑에서 절절매거나 비실대다 넋도 혼도 다 빠져 파김치가 되어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보고 절대로 바가지 긁지 못할 일’이라고.
하긴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자전거를 잘 타야 한다지만, 자전 거 타듯 강자나 윗사람에게는 고개 깊이 숙여 ‘네 네 굽신거리면서 아랫사람 약자는 짓밟는 그런 일은 다반사이리라.
그렇다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몸은 그럴 수 없다 해도 마음만이라도 말이다.
옛 선철(先哲) 말씀 한두 마디 되새겨 보자.
금은 광(鑛)에서 캐내고 옥은 돌 다듬어 만들어진 것이니 변화를 거치치 않고는 참됨을 구할 도리 없으리라. 음주하는 곳에서도 도인을 만날 수 있고 가무歌舞하는 곳에서도 신선神仙을 만날 수 있으니 고야高雅할지라도 범속凡俗을 떠날 수 없어 세속에 처하되 세속에 물들지 말지라.
부귀하면 남들이 나를 받드나 그것은 내 부귀를 받드는 것이고 빈찬하면 나를 멸시하나 그것은 내 빈천함을 멸시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나를 받드는 것도 멸시하는 것도 아니니 좋아할 것도 언짢아할 것도 아니리라.
부귀공명 다 허례허식과 허세요 허상이니 얻어도 기뻐하지 말고 잃어도 걱정하지 말라. 마음밖에는 딴 세상이 없으므로 극락은 결국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경지라는 유심정토(唯心淨土)는 속맘 마음씨 마음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오라지 배알부터 추스르고 볼 일이리라.
[이태상 칼럼] <가라앉지 않으려면 헤엄쳐라 Sink or Swim (5): 카오스頌 Ode to the Chaos>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갔을 때 같은 부대의 한 전우에게 매주 이대학보가 우송되었다. 이화여대 다니는 그의 여자 친구가 보내 주는 것이었다. 하루는 심심풀이로 이대학보 한 장을 전우로부터 얻어보니 <편지>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칼럼의 반은 교수가 또 다른 반은 학생이 쓴 짤막한 글이었다. 교수가 쓴 글의 요지는 자기 도 젊었을 때는 낭만적인 편지를 쓰기도 받기도 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사무적인 편지밖에는 주지도 받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여학생의 글은 도발적이었다. 우리가 평상시 대화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편지로는 더 많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아마도 인간의 약점을 미화시키려는 우리 모두의 본능적 노력일 것이라고 풀이하며 아울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소한 편지를 받아 읽는 순간만큼은 보낸 사람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그 글에 글쓴이의 인격과 개성이 나타나는 거라고 알고 있던 나는 이 글을 쓴 여학생이 솔직하고도 겸허한 마음과 성격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바로 이 여자다! 내가 꿈꾸던 구원久遠/救援의 여인상女人像이, 나의 ‘코스모스’가” 이렇게 외치면서 나는 이 여학생에게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코스모스’가 빨리 꼭 받아볼 수 있도록 등기 속달 우편으로 편지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윤동주의 ‘서시’ 김소월의 ‘초혼’ 윌리엄 워즈워드의 ‘내 가슴 뛰놀다 My Heart Leaps Up’ by William Wordsworth (1770-1850),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의 ‘천진무구(天眞無垢)함의 조짐兆朕 ㅖAuguries of Innocence’에서 인용한 시구詩句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볼 수 있도록
한 손에 무한無限을
한 순간瞬間에 영원永遠을
잡으리라.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이 같은 시구詩句들을 나무판에 정성껏 새겨 보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베토벤 교향곡 전집,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Winterreise’, 모차르트의 ‘요술피리Magic Flute’, 흑인 영가 黑人靈歌 Negro Spirituals 선집選集 등 레코드판은 물론 포터블 전축까지 선물로 보냈다.
시간은 흘렀지만, 답장은 없었다. 상심하고 있던 어느 날 드디어 답장이 왔다. 육 개월 만이었다. 여학생의 집 주소가 겉봉에 적혀 있었다. 고대하던 주말에 부대에서 외출을 나온 나는 가슴 설레며 상상으로만 그리던 ‘코스모스’의 집을 찾아갔다.
나의 코스모스 소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숨이 막혔다. 첫 상봉의 그 황홀함이란 정말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소녀의 아버님께서 는 주옥같은 시를 쓰시던 저명한 문인이셨는데 6.25 한국동란 때 납북拉北되셨고 유명한 소설가 어머님과 여동생과 교외에 있는 그림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소녀는 흥분해 있었다. 그동안 내 편지를 받으면서 나를 모델로 쓴 단편소설 ‘푸른 제복의 사나이’를 유한양행에서 발행하던 월간 잡지 <가정생활> 신춘문예 공모에 응모했는데 입선했다는 통지를 방금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덧붙여 말했다.
“받게 될 상금으로 지성 월간지 <사상계> [그 후로 이 잡지에 나는 기고도 했었고 부완혁 대표로부터 ‘무보수 게릴라 편집장’을 맡아 달라는 청을 받고 그 당시 근무하던 회사 일로 일본 출장을 다녀온 다음 일을 시작하기로 했었는데 내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대학 후배 김지하 씨의 담시譚詩 ‘오적五賊’ 필화筆禍 사건으로 사상계 는 폐간되고 말았음]를 정기 구독 신청해 부대로 보내 드릴게요.”
그 며칠 후, 나는 소녀에게 줄 파카 만년필 세트를 갖고 시상식장에 찾아갔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수상자 본인이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상장과 상금을 대신 받아 소녀의 집으로 가 어머님께 전달했다.
세 번째로 소녀의 집을 방문했던 날, 초여름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뜰에 있는 앵두나무에서 소녀는 앵두 두 알을 따 내 손에 쥐여 주었 다. 소녀는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일을 저지른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소녀가 건넨 앵두 두 알이 소녀의 순결한 동정童貞의 상징으로 여겼었는지 앵두 두 알을 받아 쥔 내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소녀가 들고나온 우산을 같이 쓰고 우리는 서로 가쁘고 뜨거운 숨을 나누면서 버스 타는 곳까지 배웅을 받고 그다음 주말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코스모스와 헤어져 나는 용산에서 부대로 돌아가는 마지막 미군 버스에 올랐다. 내 가슴 주머니에는 코스모스가 전해준 앵두 두 알이 있었다. 버스는 술에 취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한국군 카투사들로 초만원이었다. 미군 병사는 단 한 명만이 눈에 띄었다.
“저 양키 혼자 있잖아. 기분도 좋지 않은데 패 버릴까?”
“아, 재수 없는 놈들.”
“그래그래. 양키놈들은 죄다 재수가 없어. 지네 나라로 꺼져버리라 고 해.”
한국군 카투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얌전히 앉아 있는 미군 병사를 향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국군 카투사들은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줄 알지만 한국말로만 욕을 해대고 있었다.
“그만들 합시다. 비겁하지 않소.”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한국말로만 미군 병사를 향해 욕지거리하던 카투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뭐, 비겁하다고? 다시 한번 말해 봐.”
“우리 모두 카투사잖소. 한국말로만 미군 병사에게 욕하는 것은 비겁하단 말이요.”
이렇게 내가 대답하자 누군가가 또 외쳤다.
“거기, 운전기사, 차 세워.”
영문도 모르는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자 한국군 카투사 대여섯 명이 나를 버스에서 끌어내렸다. 차 밖으로 끌려 나온 나는 한국군 카투사들로부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몰매를 맞기 시작했다. 주먹이 날아와 얼굴에 박히고, 발길질이 난무했다. 고스란히 나는 뭇매를 맞았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미군 병실이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온몸에는 멍이 들어있었으며, 붕대까지 칭칭 감고 있었다. 수많은 주먹질과 발길질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분하다는 생각보다 나는 한국군 카투사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앞섰다. 한국군 카투사들 이 평소에 미군 병사들로부터 갖은 천대와 모욕을 당하고 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분풀이 화풀이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1961년 2월 (의병면제된 병역의무 복무를) 자원하여 군에 입대한 나는 논산에서 훈련을 받고 대구 근처 영천이란 곳에 있든 부관 학교를 거쳐 수도사단 비행 참모부에 배속되었다. 바다에 몸을 던 진 후유증으로 척추수술을 받고 코르셋을 한 몸으로 입대한 까닭에 나는 논산훈련소에서도 또 부관학교에 가서도 심한 훈련은 받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나는 교관과 훈련병들로부터 해인사 주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군과 한국군 정찰기와 헬리콥터가 많이 이착륙하는 비행장에 근무하면서 나는 미군과 한국군 장교들 사이의 통역을 맡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미8군 사령관의 눈에 띄어 나는 주한미군에 소속된 한국군인 카투사로 전속되었다.
내가 복무하게 된 곳은 경기도 부천군에 있던 미화학창과 547 공병단이었다. 이 부대에는 미군 외에 수백 명의 카투사, 그리고 한국 민간인들이 고용돼 있었다.
한국군에서 파견된 한국군 소령 이하 간부 장교와 상사, 중사, 하사, 병장들 통솔하에 카투사들은 부대의 모든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식당 식기를 닦거나 청소하는 일부터 풀 깎고 길 닦으며 짐 부리고 나르는 온갖 잡일들을 노예나 머슴같이 하고있었다.
‘슬리키 보이즈Slicky Boys’라고 좀도둑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아 가면서… 그래도 한국군보다 비교도 안 되게 보급물자가 풍부했고, 생활시설이 좋고 편해서인지 카투사로 입대하지 못해 갖은 ‘빽’과 ‘줄’을 대가면서 야단들이었다.
나도 처음엔 일반 한국군 카투사들처럼 몹시 분개했다. 미군 병사 들의 너무도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멸시를 눈뜨고 볼수 없었고, 모멸적인 언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이것이 다 약소민족의 설움이 라면 설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모에 대해 정식으로 떳떳하게 항의하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도둑질 등 나쁜 짓을 많이 하다 보니 미군도 할 말은 있는 셈이었다. 우리 자신의 처신을 사납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는 카투사 전우들에게 공개 서한을 돌렸다.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나 한국인 군인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인간답게 행동하고 살아야 사람대접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미군에게 우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훌륭한 군인사절이 되어보자고 했다.
그러자 나는 부정부패와 모든 악습을 조장하고 지령하는 한국군 장교와 병장들까지 카투사 상급자들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 다. 나를 신임하는 미군 사령관에게 간청해서라도 한국군으로 돌아 가라는 경고장을 몇 차례 받았다. 그렇다고 내가 혼비백산魂飛魄散 달아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네 목숨 아깝거든 당장 그렇게 하라.”
어느 날 저녁, 한 일당이 나를 불러 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사회 에서 좀 놀았다는 깡패 출신들과 태권도, 유도 유단자들로 구성된 하수인 일당이 나를 부대 뒤 야산으로 끌고 갔다.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말을 잊지 않아서 였는지 언제나 큰일을 당하면 나는 정신을 더욱 바짝 차리곤 했었 다.
초등학교 다닐 때 운동회 날이었다. 청군, 홍군으로 갈라 뛰는 릴레 이 경주에서 팀의 마지막 주자로 뛰게 된 나는 바로 전에 있었던 축구시합에서 유리조각에 발을 베어 한 발을 붕대로 감은 채 평소 보다 더 빨리 뛰어 우리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피로 물든 붕대가 뛰는 동안 풀어져 승리의 테이프로 휘날리는 가운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초등학교 때부터 기계체조로, 중학교에서는 유도, 대학에서는 태권 도로 단련했다지만 나보다 체구도 크고 몽둥이와 칼까지 든 일당과 내가 맞수가 될 수는 없는 형세였다. 하긴 유단자들과 자주 대결하 면서도 나는 급수나 단수를 따지 않았었다. 초단수超段數 를 고집 해 단수를 초월해보겠다는 고집이기도 했다. 세상살이에 서도 정직 이상의 책략이 없다든가, 무기교無技巧가 최상의 기교라 하지 않든가.
십여 명에게 둘러싸여서도 나는 그들을 강자가 아닌 똘마니나 약골 들로 볼 수 있었다. 싸울 때는 어떤 싸움에서든 주먹이나 칼을 휘두 르고 총을 쏘거나 말 한마디 입 밖에 내뱉기도 전에 이미 승부가 결정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서로 마주 보는 눈싸움에시 기 氣가 먼저 죽는 쪽이 진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몸집은 작아도 담기膽氣가 더 있었는지 나는 일당을 일시에 제압했다.
한바탕 해치우고 나는 부대로 돌아와 한국군 카투사 전원에게 투표 로 신임을 물었다. 만일 대다수가 내가 하는 일이 못마땅해 불신임 투표를 한다면 내가 자진해서 떠나겠노라고 했다. 그랬더니 절대다 수가 떠나지 말고 혁신적인 ‘과업’을 계속 추진 완수해 달라는 것이 었다. 한국군으로 귀대 발령이 난 일당 중에서 나를 찾아와 사정하 는 하사관들은 미군 사령관에게 청원하여 발령을 취소시켜 부대에 남도록 했고, 파견대장을 포함한 장교들만 추방되었다.
그 후로 부대에서는 떠나버린 카투사 파견대장 후임으로 다른 한국 군 장교가 부임해오는 것을 거절하고, 나를 일등병에서 2계급 특진 시켜 책임 하사관NCOIC Non-Commissioned Officr In Charge 으로 임명하여, 파견대장 업무를 수행토록 했다.
우리 자체 내부 수술을 마치고 카투사의 기강을 바로잡은 후 이번 에는 미군을 상대로 나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카투사의 권익 을 위해 한 번은 오만방자傲慢放恣한 미군을 깨우쳐 보려고 모든 주한미군 장사병들에게 영문으로 공개서한을 띄웠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다. 미-소 냉전체제 하에 남한을 미국의 최전방 보루로서 확보하기 위한 것이 지 구세주나 산타클로스처럼 자선慈善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돕는다는 미명 하에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화 하거나 예속 시키자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한국인의 단점과 결점을 찾아 흉보 면서 한국인의 자존심을 짓밟아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은 그 더욱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인격보다 제 부모나 나라의 힘을 과시하고, 뽐내고 허세를 부리는 것 같이 유치한 일이 어디 있겠 는가? 정말로 큰 사람은 작고 미천한 소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자신 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법이다. 어떤 선물이든 선물 그 자체 보다 그 선물을 주는 방식이 그 사람의 인격을 더 잘 나타낸다. 예수의 말 처럼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동물이 아니란 사실을 잊지 말자.’
반발을 예상했으나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나는 카투사의 사기를 높이고, 미군과 우의를 다지며 친목을 도모해 군에 공헌한 바가 크다면서 미군 사령관으로부터 감사표창장을 받았다.
어쨌거나 나는 한국군 카투사들의 집단 몰매를 맞고 병원에 누워 있어도 그리 서럽거나 괴롭지 않았다. 그날 밤, 코스모스로부터 받은 너무너무 감미로운 앵두 두 알을 내 가슴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억만금보다 더 값진 보배를 얻은 사람이 한두 푼 잃고 손해 본들 대수는 아니었다.
하늘 저편에서 황혼이 시작되고 있었다. 구겨진 습자지 위에 펼쳐 지는 얇디얇은 한 장의 황혼이었다. 그렇게 쉽게 황혼은 내 앞에 다가왔다.
나는 소녀로부터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절교장絶交狀을 받았다. 그것도 소녀의 어머님께 나는 대학에서 종교 철학을 공부 했고 남동생은 고등학교만 나오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는 말을 한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도대체 대학에서 뭘 배우는가. 만일 교만과 자만심만 길러주고 허영과 사치심만 키워주는 곳이 대학이라면 그런 인간 기생충을 대량생산하는 공장 같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내 동생을 미쁘게 여길 뿐이라고 나 자신을 달래야만 했다. 그러한 대학에 갈 것을 그 아무에게도 권장하지 않을 것이며 내 결혼 상대로 대학 출신을 원치 않겠노라 나는 굳은 결심까지 했다.
사실, 소녀의 어머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고 많은 과목 중에 종교철학이라니… 의학, 법학, 경제학 같은 실용성 있는 학문을 하지 않고 뭘 하겠다는 것이었을까. 신학神學 이라도 했다면 해방 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많이 생긴 성직자 聖職者 목사牧師라도 된다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부를 했다 는 사람이 곱게 키운 딸자식 데려다 밥조차 제대로 못 먹일 것 같았 을 테니까.
“자네, 어느 대학 출신인가?”
처음에 소녀를 집으로 방문했을 때 소녀의 어머님께서 물으셨다.
“네, 서울 문리대 출신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느 대학 출신이냐고 물으시니 그렇게 대답했기에 정치과나 영문과 정도 다닌 줄로 생각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족 상황을 묻자 누이 한 사람이 외국 유학중이라기에 집안이 좋 은 줄 알았는데 남동생이 대학에도 안 갔다니 기가 막히셨으리라. 딸의 장래를 걱정하시는 마음에서 당장 나와 절교토록 종용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갔다.
전前 같으면 언제고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싫다 하면 선뜻 물러났었 는데 이번만은 자의自意가 아니고 타의他意에서인 것만 같아 나는 계속 편지와 전화로 애원하고 간청했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 해도 자식의 운명을 부모가 대신 결정하고 자식의 인생을 부모가 대신 살아줄 수 없지 않겠는가. 제 삶은 스스로 개척해 제 맘 내키는 대로 용기와 신념을 갖고 살아보자고 호소했다.
아무리 호소해 보아도 소용없자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 도 붙잡듯이 소녀보다 네 살 아래인 여고생이던 동생에게 매달려 보았다. 응원과 도움을 청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데 사람의 마음을 못 움직이랴 싶었다.
이번에도 인연因緣이 닿지 않았는지 오페라 영창 가사처럼 ‘아! 그대였던가… 별은 빛나건만, 아무리 애쓰나 내 수고 헛될 뿐… 그대의 찬 손’을 잡아 녹여 줄 수 없었다.
어머님의 절대적인 영향과 간섭에서 못 벗어나는 것 같아 절망한 끝에 나는 ‘포주抱主와도 같은 구세대舊世代를 고발告發하노라’는 시詩를 한 편 써서 세 모녀 앞으로 우송했다.
제대하는 날 제대복 차림으로 나는 소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벨을 누르자 마침 집에 있던 소녀가 내다보더니 문빗장을 질러 굳게 문 을 닫아걸었다. 나는 미친듯 담을 뛰어넘었다. 홍길동이나 로빈후 드처럼 성城안에 갇힌 ‘코스모스 공주’를 구출하겠다고 대낮에 남 의 집 담을 넘긴 했어도 다시 ‘신사답게’ 현관문을 점잖게 노크했다. 그러는 사이 소녀는 맨발로 부엌문으로 빠져나가 이웃에 사는 ‘이모’를 불러 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모가 아니고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나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소녀의 어머님께서 시장에서 장사하는 장사꾼처럼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문인이자 사회적인 지도자급 저명인사께서 어떻게 이같이 젊은이들의 순수 한 사랑의 싹을 잔인하게 잘라버리는 것일까. 소꿉장난같이 시작하 는 아름다운 삶의 잔칫상을 이토록 무지막지하게 엎어버릴 수 있을 까? 나는 절망했고, 그 깊이는 더해갔지만, 답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어디선가 구겨진 습자지 위에 펼쳐지는 얇디얇은 한 장의 미명微明이 밝아오고 있었는가 보다.
꿈꾸듯 펜팔로 만났다가 단꿈에서 깨어나듯 꿈속의 소녀를 잊지 못해 몽유병자夢遊病者처럼 방황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서울 시청 앞에서 뜻밖에도 소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어느새 소녀의 모습도 여대생도 아닌 어엿한 처녀의 아름다운 자태로 변해 있었 다. 나는 그녀의 뒤를 밟았다. 그녀는 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수위로부터 그녀가 조사부에 근무한다는 말을 들었다.
제대 후 나는 한국외국어대학에 다니면서 모친의 함자 ‘덕순德順’ 의 ‘덕德’ 자字와 나의 자작自作 아호雅號 ‘해심海心’의 ‘해海’ 자 字를 따서 ‘덕해서관德海書館 Duk-Hae Book Gallery’이라는 서점 書店을 경영하고 있었다.
하루는 코리아헤럴드의 경쟁지인 또 다른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 의 ‘Thoughts of The Times’ 칼럼에 한국 남자와 결혼해 ‘코리안의 아내’라는 책을 쓴 아그네스 데이비스 김이란 미국 여자가 남녀관 계 및 인간관계에 대해 쓴 글을 읽고 독후감으로 나 자신의 펜팔 로맨스 이야기를 써 보냈더니 이 글이 그 다음날 같은 칼럼에 실렸 다.
이 글이 실린 신문 한 장 갖고 코리아 헤럴드로 그녀를 찾아가 만일 나와 절교한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었었다면 우리 다시 좀 사귀어 보자고 했다. 생각해보고 답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아무리 기다 려 봐도 깜깜무소식이었다.
ㅐ때마침 코리아헤럴드 주최로 영어웅변대회가 있었다. 전에 내가 서울대 학생으로 영어웅변대회와 경제학술토론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한국외국어대 학생으로 출전하여, 행여나 그녀가 들어주길 바라는 일념에서 ‘포주와도 같은 구세대를 고발 한다’는 사자후獅子吼로 울부짖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 다.
그때 또 마침 코리아헤럴드의 기자 모집광고를 보고 응시, 나는 수석으로 합격해, 다니던 한국외국어대학을 중퇴하고 코리아 헤럴드 기자가 되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누군가가 만나자고 날 찾아 왔다. 그는 내가 입사하기 얼마 전까지 코리아 헤럴드 기자로 있다가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로 간 사람이었다.
“두 분이 예전에 펜팔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주한 사내가 말을 꺼냈다.
“우리 두 사람은 결혼할 사이입니다. 정식으로 부탁 드립니다. 김XX 씨를 그만 단념해주십시오.”
오기傲氣가 발동한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녀가 노예라도 된다면 우리 두 남자가 목숨 걸고 결투해서 승자가 차지하면 되겠지만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그녀의 선택에 달린 게 아니겠습니까?”
“미스김의 의사를 듣고 싶으시다면 제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내는 정중히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알아보겠습니다.”
곧바로 나는 그녀를 찾아가 답을 요구했다.
“포주와도 같은 구세대를 고발하신다고 하셨죠? 저의 어머니를 포주라 했으니 저를 창녀 취급을 한 셈이지요. 이토록 저희 모녀를 심하게 모욕한 남자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겠어요.”
더할 수 없이 부정적인 대답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그동안의 무례에 대해 깊이 사과를 드립니다. 부디 행복하시기를 빌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만 기억해 주시면 좋겠군요. 이슬이 스러지면 흔적조차 없지만 이슬이었을 동안 이슬이었다는 걸.”
“그, 그게 무슨 말이지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 짓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인용한 이 말은 서울대 피천득 교수의 시 ‘이슬’을 좀 원용(援用)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1883-1931)의 ‘예언자의 뜰The Garden of the Prophet’(1933)의 시구詩句를 되뇌었다.
이슬방울에 비치는 햇빛
저 태양만 못 하지 않듯
가슴 속에 메아리치는
숨소리 삶 못지 않으리.
이슬방울 햇빛 비춰줌은
이슬이 햇빛인 때문이고
우리 모두 숨 쉬는 것은
우리가 숨인 까닭이리.
날이 저물고 밤이 되어
어둠이 주위로 깔리면
속으로 이렇게 말하리.
이 어둠 밝아 올 새 날
한밤의 진통 겪더라도
저 언덕바지 계곡처럼
우리도 새벽을 낳으리.
밤에 지는 백합꽃 속에
몸 굴려 모으는 이슬이
우주 대자연의 품속에서
혼과 넋을 찾아 모으는
우리 자신과 다름없으리.
천년에 한 번 나는 겨우
이슬방울 일 뿐이라며
이슬이 크게 한숨짓거든
그에게 이렇게 물어보리.
영원무궁한 세월의 빛이
지금 네게서 빛나고 있는
이 기적같은 신비로움을
너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그러면서 나는 혼잣말로 읊조렸다.
있을 이 이슬 맺혀
이슬이던가
삶과 사랑의 이슬이리
아니,
기쁨과 슬픔의 저슬이리
이승의 이슬이
저승의 저슬로
숨넘어가는
Was the grass wet with early morning dew
to pay your dues of life and love?
Were they dewdrops of life-giving and love-making,
or rather teardrops of joy and sorrow?
Was that for breathing in this magic world to the full,
and breathing it out to the last,
before transforming back into
the mystical essence of the cosmos?
그 후로 나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코리아타임스로 직장을 옮겼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z (1927-2014)의 작품 ‘콜레라 시대의 사랑 Love in the Time of Cholera 1985)’은 “필연이었다. It was inevitable.”란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남미 카리브해海 연안에 있는 한 나라를 무대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세 사람의 삶과 이들의 얽힌 운명을 다룬 이야 기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필연 같게 보이지 않는다. 그냥 하나의 짝사랑 이야기로밖에는. 그런데 이 짝사랑은 50년 만에, 정확히 말하자면 50년 9개월 4일이 지난 후에야 드디어 이루어진다.
이것이 풀로렌티노 아리자가 페르미나 다자에게 다시 한번 그의 사랑을 고백할 때까지 그가 기다린 세월이다. 그는 그의 두 번째 사랑고백을 여자의 남편 장례식장에서 한다. 이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듯 작가는 이 작품에서 사랑에 대해, 여러 다른 모습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젊은 풋사랑, 결혼한 부부의 사랑, 낭만적인 사랑, 콜레라 증상이 있는 열병 같은 사랑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품 속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겹쳐져 놀라웠다.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가 ‘데미안Demian(1919)’에서 한 말을 떠올리면서…
“사람은 누구에게나 오직 한 가지 천직과 사명이 있을 뿐이다. 이것 은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고, 이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단호 하게 자신 속에서 자신의 삶으로 살아버리는 것이다. 이 운명 아니 숙명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그 어떤 무엇을 절 대적으로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아쉬워하다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 던 것을 찾아 얻게 될 때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인 것으로 다름 아닌 자신의 절절한 소망과 꿈이 갖다 주는 것이다.”
As Frau Eva says in Hermann’s Hesse’s Demian:
“You must not give way to desires which you don’t believe in…You should, however, either be capable of renouncing these desires or feel wholly justified in having them. Once you are able to make your request in such a way that you will be quite certain of its fulfillment, then the fulfillment will come.”
한창 젊은 날 한국에서 펜팔로 처음 만났던 아기씨를 25년 만에 나는 뉴욕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급기야는 정말 기적같이 극적 으로 우리 두 사람은 맺어졌다. 그러나 사반세기 전 첫 번째 만남과 헤어짐이 다시 반복되는 그 옛날의 재판(再版)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여동생과 함께 어머님의 뒤를 이어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특히 두 자매는 소설 ‘날개’를 쓴 유명 작가의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 옛날 ‘펜팔 시대’에 ‘푸른 제복의 사나이’로 등장했던 내가 이 여인의 글재주 덕에 ‘꽃을 든 남자’(상, 하권, 세계사 발행) 로 탈바꿈하여 재등장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으니. 이 여인이 쓴 장편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인 한고만과 안성수, 그리고 이원오 세 인물은 고스란히 나를 투영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으니 까.
뿐만 아니라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우리가 재혼한 바로 다음 날 서울에 사는 (당시 어린 아들까지 있는 유부녀) 동생과 전화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듣고 나는 깜짝 놀라 내 귀를 의심했었다.
“oo아, 태상이가 x을 아주 썩 잘해. 너도 한번 해봐…” 그리고 그러자고 내게 제의까지 해오는데 내가 너무 소심해서였는지 아니면 용기가 부족했었는지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아직까지도 두고두고 그 제의만으로도 깊이깊이 감사할 뿐이다. 자기보다 네 살 아래 여동생을 너무 극진히 사랑해서였는지, 아니 면 기존 사회도덕이나 윤리나 인습 같은 통념을 초월한, 너무도 앞서가는 자유인Free Spirit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새삼 “선善도 악 惡도 없다. 네 생각일 따름이다. There is nothing either good or bad, but thinking makes it so.”란 세익스피어의 말이 떠 올랐다.
함부로 쏘아댄 화살이 훗날 다른 사람의 가슴에 박혀 있는 정황을 목격한 나는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다른 뒷모습의 사랑만 남기고 삶의 둥지를 떠나 예술의 하늘로 날아가 버린 파랑 새의 행복을 빌어줄 뿐이었다.
우리 두 사람 다 재혼해 10개월 같이 살다가 예술을 위한 삶이냐 삶을 위한 예술이냐는 실존적 가치관의 차이로 다시 헤어지면서 나는 청마 유치환의 고백처럼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그 후로 8년 전 2013년에 타계하셨다는 부고를 신문을 통해 접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어려서부터 그토록 소위 구세대舊世代에 반기反旗를 들었던 내가 어느 틈에 80대 중반 구구세대舊舊世代가 되어서도 옛날의 반골 기질反骨/叛骨氣質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인지 몇 마디 좀 더 해보 리라.
사람은 몸과 마음이 같이 놀아야지 따로 놀면 죽도 밥도 안 된다고 나는 믿어 왔다. 제가 좋아하는 것이면 어떤 공부나 일이든 힘 드는 줄 모르고, 하면서 즐겁고 능률도 올라 최선의 결과를 얻게 되지 않던가. 세상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열중할 때처럼 행복한 순간 이 없지 않겠는가.
본인이 원치 않는데도 자식에게 어떤 학문, 어떤 직업, 어떤 배우자 를 강요하는 부모들이야말로 자식을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자식을 해치고 망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의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과잉보호하고, 특히 아들들을 끼고돌아 생병신을 만들어 온 것 같다. 자식이 엄마 뱃속 에 있을 때는 몰라도 일단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는 한시 바삐 육체 적인 탯줄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정신적인 탯줄까지 끊어주고, 자식들로 하여금 하루속히 엄마 품과 둥지를 떠나 나는 법을 배워 자신의 삶을 제힘으로 스스로 개척토록 격려할 일이지, 그렇지 않고 좀 심하게 말해서 엄마 뱃속에 자식을 다시 집어넣으려 들면 자식이 숨통 막혀 질식하지 않겠는가.
내가 영국에 가 살면서 크게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영국 엄마들은 길을 가다가 어린 자식이 넘어져도 잡아 일으켜 주지 않고 어린애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보고 한국 엄마들의 무지 몽매無知蒙昧함을 통탄했다.
나는 몇 년 전 뉴욕에 사는 어떤 한국 엄마가 대학 다니는 두 아들 이 학교 서류에 제때 제 자리에 제 이름 사인조차 못 할까 봐 사인 Sign도 대신하고 저희들이 포르노 성인 비디오 빌리기 얼굴 뜨거 워할까 봐 자신이 대신 빌려다 주는 정신병자 같은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은 앞을 보고 살라고 눈이 얼굴에 달렸지, 뒤통수에 달려 있지 않은데 동양의 유교사상 때문인지 우리는 앞을 보고 달리는 대신 조상이다, 부모다, 효도다, 뒤만 보고 살아왔으니 발전은커녕 퇴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물은 아래로 흐르게 마련 인데 거꾸로 흘러 오르기를 기대하고 강요하며 허례허식에 사로 잡혀 왔으니 이 얼마나 한심찬란한 일인지 모르겠다. 제발 부모 자식 사이에 채권자 채무자 같은 억지 그만 좀 부릴 일이다. 부모 자신이 좋아서 재미보다 낳은 자식, 키우는 낙으로 키웠으면 그만 이지, 어쩌자고 자식더러 뒤만 돌아보고 뒷걸음질하라는지, 이러한 부모들이야말로 ‘고려장’ 감이 아닌가.
남자의 사랑을 받아 주는 것이 여자가 남자에게 제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다 주는 더 큰 선물이 되듯이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 주는 것으로 셈이 끝난다고 나는 본다. 여기서 내가 논리의 비약도 서슴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욕으로 쓰는 말이 실은 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ㅆ)도 못할 놈, 못할 년 해야 저주가 되지 세상 에서 제일 좋고 즐거운 일 하라는데 그것이 축복이지 어째서 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도 이것은 우리말뿐이 아니라 일본어나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나의 반어법 反語法이라고 볼 수밖에.
그러니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다운 어버이라면 자식 보고 제 좋은 일하라고 축복해 줄 일이지, 하고 싶은 일 말려서도 안 되지만 하기 싫은 일 시켜서도 안 될 일이다. 하기 좋은 일만 하기에 도 너무 짧은 인생인데 어쩌자고 하기 싫은 일로 인생을 낭비하고 허비하란 말인가.
모든 부모님들이 꼭 좀 기억하고 한시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 것이있다. 다름 아니고 어린이들에게는 어른들이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천부적 본능적 자질資質과 자발성自發性 지향성志向性의 자생력自生力과 자구력自救力이 있기 때문에 앞서가는 애들 보고 동東으로 가라 서西로 가라 할 일이 아니란 것이다.
칼릴 지브란도 그의 ‘예언자The Prophet(1923)’에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애들이라 하지만
당신의 애들이 아니리오.
언제나 스스로를 그리는
오로지 삶의 자식이리니.
당신을 거쳐서 왔다지만
당신에게서 생겨난 것도
당신의 소유도 아니리오.
애들에게 사랑은 주어도
생각을 줄 수 없음이란
그들 생각 아주 다르고
그들의 몸은 집에 있어도
그들의 마음과 영혼은
집 밖의 집 우주에 있으며,
내일이란 집에 살고 있어
당신이 생시에는 물론
꿈속에서도 방문할 수
없는곳인 까닭이리오.
당신이 애들처럼 되려고
하되 애들을 당신처럼
만들려고하지 말 일이요.
삶이란 뒤로 가지도
어제에 머물지도 않으리.
당신이 활이라고 한다면
애들은 당신의 화살이니
그 어떤 과녁 겨냥하고
힘껏 활시위 당겨질 때
당신 구부러짐 기뻐하리.
(우주의) 궁수弓手는
빨리 멀리 날으는 화살
사랑하는 동시에
(안정적으로) 화살 튕겨주는
활시위도 사랑하시리.
Your children are not your children.
They are the sons and daughters of
Life’s longing for itself.
They come through you
but not from you,
And though they are with you
yet they belong not to you.
You may give them your love
but not your thoughts,
For they have their own thoughts.
You may house their bodies
but not their souls,
For their souls dwell in the house
of tomorrow, which you cannot visit,
not even in your dreams.
You may strive to be like them,
but seek not to make them like you.
For life goes not backward
nor tarries with yesterday.
You are the bows from which
your children as living arrows are sent forth.
The archer sees the mark upon the path of the infinite,
and He bends you with His might that
His arrows may go swift and far.
Let your bending in the archer’s hand be gladness;
For even as He loves the arrows that flies,
so He loves also the bow that is stable.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린 모두 우주의 활과 화살로 태어난 코스미안들이니까. Because we all are Cosmians born as cosmic arrows and bows.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쁜 것도 더러운 것도 거짓된 것도 무서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맑고 깨끗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만남의 기쁨과 헤어짐의 슬픔을,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뛰어넘는 사랑을 나누게 된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의 존재 가치와 존재이유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을.
‘같은 이슬이라도 매미가 먹으면 노래가 되고, 벌이 먹으면 꿀이 되지만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지만 뱀이 가지고 있는 독조차 어딘 가 쓸모가 있을 텐데, 어른들에게는 아이의 눈이 없다는 게 문제다.
나는 떠나간 코스모스가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떠나간 코스모스가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정녕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이
그 어느 누구의 뜻과 섭리에서인지
알 길 없지만
너와 내가 마주쳤다 떨어짐도
저 별들의 반짝임처럼
우리 눈 한 번 깜박임이 아닐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 따라
눈 비 바람 불어 오가는 것이
그 어떤 까닭인지 알 수 없지만
저 풀잎에 맺히는 밤이슬과 서리
아침 햇볕에 녹아 스러지듯
우리 숨 한 번 맺혔다 지는 게 아닐까.
너와 내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정녕코 모르는 일이라 하더라도
우린 모두 삶과 사랑의 이슬방울로
코스모스바다로 흘러드는 것이리.
‘Ode to the Chaos’
I was depressed and confused. I understood that one had to see things with the clear eye of a child who could not differentiate good from bad, clean from dirty, true from false and fearless from fearful.
Only then could one share love that transcends the joys and sorrows of meeting and parting, the love that transcends the distance between time and space. And then one could realize the justification for the existence of everything in the world.
Dewdrops sipped by a cicada become songs; sipped by a bee they become honey; whereas the same dewdrops become poison when imbibed by a snake. But one must not forget that even the venom of a snake can serve a purpose, I reminded myself. The grown-up’s greatest trouble is the loss of a child’s eye.
I was sick at heart, missing my Cosmos, and mused:
Though there’s no telling whose providence it was for us, you and me, to meet and part, wouldn’t it be like the blink of our eyes - like the twinkle of stars?
Though there’s no telling why the snow and rainstorm come and go in and out of season, don’t the dewdrops form at night on a blade of grass and vanish at sunrise as night melts into day like a mirage?
Though there’s no telling what we’re made of, aren’t we all drops of life-giving and love-making that trickle into the sea of cosmos?
When I was serving in the Army, a fellow soldier received a weekly school paper sent by his girlfriend who attended the Ewha Women’s University in Seoul.
One day an article in the paper caught my fancy. The subject of the article was ‘Letter’ shared by a professor and a student. The gist of what the professor wrote was that he used to send and receive ‘romantic’ letters in his younger days but nowadays his correspondence was all business. The professor added that no matter how brief it is, what you write reveals your soul.
The student’s letter was the more challenging one. “We tend to lie more in correspondence than in conversation,” she wrote. “Perhaps,” she posited, “it was our common instinctive attempt to camouflage our shortcomings and human weaknesses; to embellish our achievements; to downplay our failures.” She ended by saying, “You’d think about the person who wrote or to whom you are writing, at least while reading or writing the letter.”
I judged her to be a modest, self-respecting person with a candid mind.
“This is the very Cosmos girl I’ve been looking for!” I decided.
I started writing my love letters addressed to her at school. To make sure my letters would be delivered promptly, they were sent by registered express mail. I not only sent letters but also my favorite Korean and foreign verses engraved on wood.
One was Yun Dong-Ju’s ‘Prologue’ from Sky, Wind, Stars and Poems that was posthumously published. Yun Dong-Ju (1917-45) was the most celebrated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gainst the Japanese imperialist colonial rule of Korea. He died in a Japanese prison six months before World War II came to an end, as South African black activist Steve Biko (1946-77) died in police custody as a result of beatings received.
Yun Dong-Ju’s ‘Prologue’:
Until the day I die, pray,
Not a speck to be ashamed of
Against the Sky,
I suffered even for the leaves
Gently swaying in the breeze.
I’ve got to love all mortals
And I must walk along the path
Made for me.
Tonight, as always, the stars are grazed
By the wind.
Another was a poem by William Blake (1757-1827):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All were sent, together with records of Ludwig van Beethoven’s symphonies, “Die Winterreise,” a song cycle of Franz Schubert, consisting of 24 songs set to poems of Wilhelm Muller, “The Magic Flute/Die Zauberflote,” an opera by Wolfgang Amadeus Mozart, and a collection of Negro spirituals. Just in case she didn’t have a record player, I even sent a portable one.
Though I received no reply, I was confident she was getting her mail since there had been none marked “return to sender.” So I kept on untiringly.
After six months, I got a reply to my daily correspondence. Her home address was on the envelope. This was enough encouragement, and on a weekend pass to leave my military base, I was going to visit the girl I had been dreaming about night and day. My pulse fluttered and my stomach was full of butterflies.
The instant I saw the girl in person, I could hardly breathe. The ecstasy of our first meeting was really beyond description. Her father, a celebrated poet, was kidnapped by the North Korean forces during the Korean War. She was living with her famous novelist mother and a younger sister in a picture-perfect house in the suburbs of Seoul.
She was excited, too. While receiving the mail from me, she’d written a short story entitled ‘Man in Blue Uniform,’ using me as the major character, and she’d just been notified by post that her story was a winner in a literary contest.
“When I receive the prize money, I will send you a gift subscription to Sassanggye (World of Thoughts),” then a popular highbrow monthly magazine, which was later forced to cease publication (right after I was offered the editorship) by the military government.
A few days after her notice of winning, I went to the award ceremony to congratulate her on making her debut as a writer, carrying a gift set of fountain pens. For some reason, she didn’t show up and I picked up the prize on her behalf and took it to her home. She was out, and I left the gift of pens with her mother.
When I left her home to return to my base after visiting her for the third time, it began to rain. Before we left for the bus stop, she picked two cherries from her garden and handed them to me. She seemed unaware of what she had done.
Holding the two cherries in my hand, I thrilled at the symbolism. The early summer rain soaked through the tear in the umbrella, quickening our pulses and warming our breaths. Seeing me off at the bus stop, she agreed to another date the following weekend.
When I took the last bus to my base the night of the third date, all the passengers were KATUSA(Korean Augmentation to the U.S. Army stationed in Korea) except one lone GI. Many were clearly drunk.
“That Yankee is all by himself, isn’t he? I feel lousy. Shall we beat him up?”
“Oh yeah, why not?”
“Yeah, yeah, all Yanks are SOBs. Why don’t we tell them to leave us alone and just go back to their own country?”
They were calling the quietly-sitting GI names in Korean, even though they could speak English.
“Let’s stop this, for goodness’ sake. It’s such a cowardly attack on a helpless guy!” I protested.
Though hearing these admonishing words, the noisy crowd failed to quiet down.
“What? Cowardly? Don’t you dare say that again.”
Following a momentary silence, someone spat.
“Aren’t we all members of KATUSA defending our country with the help of the U.S. Army?” I gently reminded my fellow soldier passengers.
Then someone else yelled, “Hey, driver, stop the bus!”
When the driver pulled over, a mob of KATUSA members dragged me out of the bus and bombarded me with kicks and punches.
When I opened my eyes I was in a military hospital, enveloped in bandages. My face was swollen from beatings, yet I didn’t feel myself aggrieved. Instead I commiserated with the attackers. I was aware, only too well, of how we were being treated by our American comrades-in-arms. We were constantly subject to ridicule and humiliation. So I understood that I was an easy prey for them to vent their pent-up rage and frustration.
In February 1961, I enlisted with the Republic of (South) Korean Army, despite the fact that I was exempted from conscription (military service) on the medical grounds of my physical condition.
Had I been happily reunited and engaged in love with my Cosmos, I had planned to prepare for the state exam to become a diplomat, someone like Dag Hammarskjold, a Swedish diplomat who served as the second Secretary-General of the United Nations from April 1953 until his death in a plane crash in September 1961. For this purpose, I had rented a room at a Buddhist temple in the Sorak Mountain near the east coast where I had earlier attempted a suicide.
On completing basic and adjunctive training, I was posted to the Aviation Wing of the Capital Division, which later fought in the Vietnam War. Because of my spinal surgery, I had to wear a corset and was excused from strenuous physical exercises. Allowed just to sit and watch, I was nicknamed ‘The Head Monk of Hae-In-Sa,’ a well-known Buddhist temple in Korea.
Stationed at a military airstrip that was busy with helicopters and reconnaissance planes taking off and landing, I served as an interpreter for Korean and American pilots and other officers.
One day I caught the attention of the commanding general of the 8th U.S. Army and was transferred to KATUSA. I was assigned to the U.S. Army Chemical Depot and the U.S. Army 547 Engineer Corps stationed in Buchon County, Gyungghee Province, near Kimpo Airport. There were hundreds of KATUSA members and scores of Korean civilian employees, besides U.S. Army personnel, at the base.
Under the chain of command headed by a ROK, Republic of (South) Korea Army Major and followed by officers of junior rank, sergeants 1st class, staff sergeants and sergeants, KATUSA members were doing all sorts of menial tasks - from cleaning mess halls and utensils, grass-cutting, snow-shoveling, loading and unloading, to repairing roads - almost like slaves. We were often insulted as ‘slicky boys,’ meaning petty thieves, by the American GIs. Even so, the ROK Army soldiers were eager to become KATUSA members for the comfort of better facilities and provisions at the U.S. Army bases.
I, too, was incensed by the insulting remarks. They enraged me by their deliberate and continual injustice. But I couldn‘t blame the Americans. Koreans were, in part, responsible for the ill treatment, I thought.
I decided to write an open letter to my fellow KATUSA members, reminding them that one has to behave like a decent human being in order to be treated like one: “Let’s become excellent military emissaries representing Korean people.”
I instantly became a trouble-maker to those in charge of KATUSA personnel. Those in charge were, in fact, responsible for all the corrupt and shameless practices going on that brought all the disgrace and dishonor to all the Korean people and KATUSA members.
I received several threatening warnings. One was, “If you want to save your life, go back to the ROK Army.”
Becoming a fugitive was out of question.
One evening, a gang of former street bullies and martial arts experts dragged me to a little valley some distance away. I did not forget an old saying, “If you don’t lose your head and heart, you can survive a tiger’s attack.”
I was always more spirited whenever I was challenged.
Years before, it was a sports day at my grade school. I was the runner in the last leg of a relay race. One foot was badly cut by a broken piece of glass during a soccer match earlier in the day and had been wrapped, yet I ran faster than usual to victory with a long trail of bandage soaked in blood, prompting a thunderous applause.
Even though I exercised on parallel and high bars in grade school, practiced judo in middle and high school and Taekwondo (Korean martial arts) in college, I was no match for the villains armed with baseball bats, metal bars and knives. I used to engage black-belt-holders and was, more often than not, victorious, but obstinately refused to be graded and wear belts in any color. It was my credo to go against the grain, believing “no technique is the best technique.”
Surrounded by more than ten guys at the sunset in the valley, still, I could see each of them as a big softie, or a timorous soul, not a real tough guy. I’d been observing closely that in movies, as well as in real-life events, the outcome was decided well before the fight even began, be it an argument, a fist fight, sword fight or a gun fight. Whoever cowers first becomes the vanquished.
I, though smaller in size, must have had more guts to overpower my opponents. After disengaging myself from those poor guys thrown into disarray, frightened out of their senses, I returned to the base and held a ballot of KATUSA members. If the majority cast a vote of ‘no confidence’ in me, I proposed to return to the ROK Army voluntarily. The vote was unanimous with a few abstentions, pleading me not to go and urging me on as I cleaned up the mess. Only the officers in charge left, as the official order for the return of all the non- commissioned officers was revoked at the last minute at my request. In those days, KATUSA members dreaded being sent back to the ROK Army.
In their place, I was given overall responsibilities for KATUSA personnel as an NCOIC (Non-Commissioned-Officer-In-Charge) with a double promotion of rank from private first class to sergeant.
After improving the moral fiber of KATUSA personnel, I had to fight hard for equal rights. In an effort to reason with the overbearing GIs, I wrote another open letter, this time in English, to all the U.S. military officers and enlisted men stationed in Korea.
I called their attention to the fact that no matter how deeply grateful Korean people in the South were to U.S. Forces fighting against Communist North Korea, the American military forces had come to Korea, first and foremost, for the interest of the U.S.A. They wanted to keep South Korea as its advance stronghold between the U.S. and the Soviet Union in the geopolitics of the world.
“Was it just to play a Savior or Santa Claus for charity?” I asked in earnest. Wasn’t it much less to colonize Korea in the name of Democracy and Capitalism; still less to incite anti-Americanism by fault-finding and trampling on the human rights and pride of Korean people?
I also reminded them of the historic fact that Korea was divided against our own will and wishes at the end of the World War II when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ese occupation by both American and Soviet forces. Hence the Korean War broke out in the heat of Cold War tension between the two super-powers.
I wrote, citing a passage or two like: “A great man shows his greatness by the way he treats a little man.” and “the manner of giving shows the character of the giver more than the gift itself.” “Let’s remember Jesus’ words that man lives not by bread alone,” I suggested.
I was fearful that my letter might have repercussions for the whole KATUSA contingent serving with the U.S. Army. The effect of the letter, however, was unexpectedly beneficial to all concerned. I won the official commendation with ‘a letter of appreciation’ from the commanding officer of the U.S. detachment for raising the morale of KATUSA personnel and making a very positive contribution to the successful close cooperation with the U.S. Forces.
I was happy. Even though I had been hospitalized following the beating by fellow KATUSA members, because of the two cherries I received from my pen pal girlfriend that night, I was euphoric. What does it matter if I lost a few pennies, now that I owned the most precious treasure of treasures?
Yet again, maybe it wasn’t meant to be. ‘Ah! Was it you? Though stars are shining in the sky...No matter how hard I try, my efforts are in vain...I couldn’t hold your cold hand and warm it up...’ just like operatic lyrics.
Twilight was approaching. It was a piece of thin blue spreading across the crumpled drawing paper of my sketchbook.
I received a ‘Dear John’ letter from my ‘ideal’ pen pal girlfriend. It came out of the blue. It happened the very next day after I told of my major at college and of my younger brother who didn’t go to college.
What do you learn in college? I had to ask myself. If all that a college education fosters is arrogance and vanity, then I would take it as a consolation that my brother didn’t go to such a factory that mass-produces ‘human parasites.’ I wouldn’t recommend a higher education to anybody and I wouldn’t marry a college graduate, I swore.
Her mother’s viewpoint was easy to understand. Among all the available suitors, why not some with more practical value, such as medicine, law or economics? Had he gone to a Divinity School, at least he could have become a church minister. He wouldn’t be able to feed my daughter. She must have been dismayed.
“What school did you go to?” She asked me when I made my first visit.
“I went to the College of Liberal Arts and Sciences,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most prestigious university in Korea.
With that, she might have expected that I had attended the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or English. Asked about my siblings, I told her that one of my sisters was studying abroad. So the assumption that I was from a well-to-do family turned out to be incorrect in the light of the fact that my younger brother never went to college. It was hard for a parent to grasp and accommodate the discrepancy. I understood the reason for the abrupt break-up. It had to do with a child’s future security.
Until then, I always withdrew at once whenever my advances to a girl were not welcome, even if not rejected outright. But this time, it didn’t seem my pen pal girlfriend’s rejection was due to her own volition at all. I kept on pleading with her by telephone and in writing not to follow anybody’s dictates but to follow her own heart and soul.
My entreaty was of no avail. I even sought her younger sister’s moral support. If one could move heaven and earth, why not another human being? But the two sisters seemed unable to free themselves from their mother’s absolute influence on them. I became desperate and wrote a poem entitled “I accuse the Old Generation of Panderism.” I addressed it to the mother and her two
daughters and mailed it.
On the day I was discharged from the armed forces, I hurried to my pen pal girlfriend’s home. As I rang the doorbell, she peeped over the wall and bolted the gate securely before disappearing into the house. I jumped over the wall, as if to rescue the princess imprisoned in a castle - like Hong Kil-Dong, Korea’s most legendary outlaw.
I then knocked on the door. Meanwhile, she ran barefoot to fetch her aunt, a neighbor, I discovered later. What baffled and even angered me was the fact her mother was a famous writer of distinction, who was supposed to lead the way in love as well as in life. How could such a mentor so cruelly nip young love?
I grimly held out hope. From somewhere a thin piece of aurora began spreading across the crumpled drawing paper of my romantic sketchbook.
One day I chanced upon my former pen pal girlfriend and began following her. She was already a young lady, no longer a girlish figure. It was one of those days when I was wandering aimlessly around the streets like a sleepwalker half awake from a sweet dream. She entered the building of The Korea Herald, an English-language daily published in Seoul. I learned from the front desk guard that she was working in the paper’s research department.
Out of military service, I went back to school, attending The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in Seoul while running a bookstore, The Duk-Hae Book Gallery. The name was a combination of the first letter of my mother’s first name, Duk-Soon, and that of my pen name, Hae-Sim, with Duk-Hae ㅡ 덕해 in Korean alphabet and 德海 in Chinese characters ㅡ meaning ‘The Sea of Virtue.’
One morning I happened to read an article in The Korea Times, another English-language daily published in Seoul. It was written by an American wife of a Korean man. She wrote about human relationships, especially between a man and a woman. The article provoked discussion. I wrote to the editor, presenting my own thoughts, which were based on my pen pal experience. Much to my surprise, my article appeared in the same Thoughts of The Times column the next day. I took a copy to show to my former pen pal girlfriend. If it wasn’t her own idea to sever our relationship so abruptly, would she reconsider her decision and resume seeing me?
“I’ll think about it and let you know shortly,” she replied.
I didn’t hear from her for some time.
Meanwhile, there was an oratorical contest in English for students sponsored by The Korea Herald.
“I accuse the old generation of panderism,” I roared.
By sheer coincidence, The Korea Herald was currently recruiting new reporters. I finished top in the written exam and interview and became a reporter.
A few days later, someone wanted to see me. It was a former reporter of The Korea Herald who had recently left, joining a new Korean-language daily The Joongang Ilbo (The Joongang Daily).
“I understand that you and Miss Kim had a brief acquaintance in the past. I’ve been dating her for several months and we are going to get married soon. So give her up, if you please,” the reporter formally requested.
I felt challenged, “If Miss Kim were a slave or mere chattel, perhaps we could fight a duel to take her,” I replied. “But it’s up to her, isn’t it?”
“If you want to hear what she has to say, I’ll arrange a meeting, if I may,” the guy said.
“You don’t need to do that. I’ll find out myself.” I responded with a smirk. I went straight to her.
“Didn’t you accuse the old generation of panderism?” She asked. “Since you called my mom a ‘madam’, you treated me like a prostitute. How could I see a man again who insulted us so cruelly?” Her answer was unequivocal.
“I understand. I won’t bother you any more,” I replied.
“Please accept my sincere apologies. I’ll wish you
all the happiness.”
And then I added, “I just want you to remember that though a dewdrop vanishes without a trace when it evaporates, it was a dewdrop real and true while it was a dewdrop.”
“What do you mean by that?” She protested. I gave a wry smile and left.
When I returned home, I recited from Kahlil Gibran’s The Garden of the Prophet, a lyrical celebration of the mystical beauty of Nature:
“The image of the morning sun in a dewdrop is not less than the sun.
The reflection of life in your soul is not less than life.
The dewdrop mirrors the light because it is one with light, and you reflect life because you and life are one.
When darkness is upon you, say: ‘This darkness is dawn not yet born; and though night‘s travail be full upon me, yet shall dawn be born unto me even as unto the hills.’
The dewdrop rounding its sphere in the dusk of the lily is not unlike yourself gathering your soul in the heart of God.
Shall a dewdrop say: ‘But once in a thousand years am I even a dewdrop,’ speak you and answer it saying:
‘Know you not that the light of all the years is shining in your circle?’”
Then after handing my resignation to The Korea Herald I joined The Korea Times and opened a pub for moonlighting. I named the pub ‘해심’ (in Korean), and &海心‘ (in Chinese), meaning ‘The Heart of The Sea,’ the pen name I gave myself in childhood. It became very popular with romantics ㅡ the students of life and love.
The days passed and I became a middle-aged man. As it happened, twenty-five years later my former pen pal girlfriend and I met again in New York. We were finally united. Yet again, it was brief. Must it be in the bud, as the saying in Latin goes: “Finis Origine Pendet.” (The beginning foretells the end.)
Was it happenstance that Love in the Time of Cholera, a love story by Gabriel Garcia Marques, was published in the same year?
The novel begins with this opening sentence: “IT WAS INEVITABLE.”
In their youth, Florentino and Fermina fall passionately in love. When Fermina eventually chooses to marry a wealthy doctor, Florentino is devastated. At first nothing seems inevitable, only an unreciprocated love affair. But his prayers are answered after some fifty years.
Was what happened to my former pen pal girlfriend and me inevitable?
I recalled what Frau Eva in Hermann Hesse’s Demian said:
“You must not give way to desires which you don’t believe in...You should, however, either be capable of renouncing these desires or feel wholly justified in having them. Once you are able to make your request in such a way that you will be quite certain of its fulfillment, then the fulfillment will come.”
We met again. My former pen pal girlfriend and her younger sister became famous novelists themselves, like their mother. Each of the two sisters was the recipient of the prestigious Lee Sang (a genius poet 1910-37) Literary Prize in Korea.
During ten months of our marriage, she wrote two-volume novel titled ‘Man with Flowers,’ a sort of a sequel to ‘Man in Blue Uniform,’ a short story she composed as her debut piece to win a prize a quarter of a century earlier. For both works she used me as the main character.
What’s more titillating was her serious suggestion of a menage a trois with her younger sister, transcending all the mundane morality and ethical norms. Although I was unable to take it up, I felt immensely grateful to her for the far-out offer.
To be sad, or satisfied, with the truth that you get to keep your child in your arms only until the child leaves the nest may be a choice, not a temperament. I wished her all the happiness once more, for the last time, as she flew away into ‘the sky of arts’ after taking as much nourishment she needed from ‘the nest of life’ I provided.
I was happy that I loved her nonetheless. It was the taste of the most exciting and pleasurable ‘hell‘, all right!
I learned she passed away eight years ago in 2013 and I’ll cherish all the sweet memories for the rest of my life.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