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세밑이면 은행이나 약국 같은 데서 달력을 마련해두고 손님들이 가져가게 하는데 올해도 아내는 단골 약국에서, 나는 은행에서 각각 달력을 하나씩 얻어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것을 각기 침실과 서재에 걸어 놓았는데 이제 이 달력들로 내년 한 해의 대소사와 모든 약속을 기록하고 기억한다.

물론 맨 먼저 온 가족 생일날을 찾아서 동그라미를 칠 것이다. 기실 달력에 적는 것 대부분 사소한 신변잡기이다. 쌀은 언제 샀고 이발은 언제 했고 염색은 언제 했으며 어느 날은 누구네 결혼 잔치고 생일이며 어느 날 어떤 모임이 있는가 하는 것들이다. 지난해부터는 코로나19로 모임을 자제하다 보니 이런 기록이 많이 적었다.

평년에는 보통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런저런 모임에 참가했는데 지난해 연초를 내놓고는 거의 이런 모임이 없었다. 설사 있다해도 가지 않았다. 꼭 참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이상 모험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뿐이 아닌 연세 든 노인들 거의가 실내장식 필수품으로 반드시 달력을 벽에 걸어 놓는다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림 좋은 달력을 골라서 거실에 하나 그리고 내 방에 하나, 하면서 달력을 거는 것이 연말연시의 주요 행사다. 나이 60을 넘으면서 날짜를 헷갈리기 일쑤다. 이런 불가피한 이유로 달력을, 그것도 글자가 큰 달력을 필수 장식품으로 여긴다. 달력은 우리 모든 노년들의 필수품이다. 무엇보다 큼직한 숫자 밑에 음력이 표시된 달력. 음력이 나오고 입춘이니 우수니 하는 절기가 인쇄된, 오로지 달력의 기능에만 충실한 달력 말이다.

나는 종이로 인쇄된 달력 외에 다이어리도 즐겨 사용한다. 무엇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오로지 나의 이야기를 담는 다이어리. 한국에 온 후 나는 줄곧 다이어리도 사용해왔다. 일력을 쓰지 않는 만큼 모든 일기를 다이어리에 적어 넣었다. 자질구레한 일상생활 기록만이 아닌 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 텔레비전이나 모바일에서 본 뉴스나 드라마에 대한 감상, 독후감 등으로 날마다 한 장 한 장씩 꼭꼭 채워 넣었다. 거기에다 날마다 메모장에서 뜯어낸 메모지도 한두 장씩 덧붙여 놓으면서… 작가인 나에게 있어서 여기에 적힌 모든 것이 그토록 소중한 글감이기도 하다.

한국에 온 후로 줄곧 달력을 써온 나지만 그래도 전에 쓰던 큼지막한 날짜로 종이 한 면을 꽉 채운 ‘일력’을 더 좋아한다. 탁상 위에 놓여있거나 벽에 걸려있는 얄팍한 종이의 찢는 그 일력 말이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종이를 뜯을 수 있도록 제작된 것, 일력 위에 일기를 쓰거나 메모를 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것 말이다.

누군가 일력의 번거로움이자 재미는 하루가 지나면 종이 한 장을 찢거나 번지는 데 있다고 했다. 한해를 책상 앞에 두고 매일 보면 누구든 일력의 매력을 확실히 알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손으로 느끼고 만질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일력을 번지거나 뜯으며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하루가 더 소중해지는 기분이 든다. 일력은 뜯을 때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간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전에 중국에 있을 때 나는 해마다 일력을 두 개씩 사용하였다. 매일 책상 위에 두고 일기장처럼 사용할 수 있게 그날의 날짜, 요일, 일진 따위를 각각 한 장에 적어 매일 한 장씩 떼거나 젖혀 보도록 만든 일력을 집의 서재와 학교의 내 사무실에 하나씩 두었다. 물론 집의 것은 내가 산 것이고 학교의 것은 학교에서 내준 것이다. 그렇게 매일의 날짜가 기록된 일력은 메모장, 일기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나는 날마다 일력에 그날에 해야 할 일, 있은 일과 느낀 점을 적거나 자투리 시간에 신문이나 책에서 읽은 좋은 글귀들을 적었는데 어떤 날은 앞뒷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박아 적었다. 나는 날짜마다 관련 삽화와 좋은 글귀를 함께 담은 일력을 편애했는데 거기에는 중국 고전 속 빛나는 구절들이 한 장 한 장 다르게 들어가 있어 말 그대로 이는 일력이자 또한 한 권의 아름다운 고전 문선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일력이었기에 나는 일력을 웬만해서는 찢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데 이런 일력은 보통1~2년, 지어는 5~6년씩 건사하기도 하면서 필요할 때나 심심할 때나 틈나는 대로 뒤져서 읽어 보기도 했다.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런 일력은 다시 읽을 때마다 감개무량하다.

옛날 생각이 난다. 일력은 하루 한 장씩이기 때문에 보통 얇은 습자지로 만드는데 종이가 귀했던 시절, 일력은 공책과 메모지를 대신했고 어른들의 엽초 마는 담배지를 대신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 부드럽게 만든 일력을 휴지 대신 쓰기도 했다. 때론 누군가 무슨 일로 급해서 미리 찢어 쓸 때도 있는데 그런 날은 알게 모르게 숱한 욕을 먹게 된다. 일력의 사용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듣자니 요즘은 모두 스마트폰을 쓰니 달력 주문은 줄고 있지만 일력은 수요가 몇 년째 꾸준하다 한다. 특히 출판사 민음사에서 해마다 연말이면 펴내는 ‘인생 일력’은 출판하기 바쁘게 부리나케 팔린다고 한다. 민음사에서 펴낸 2021년 인생 일력에는 <논어>, <사기>, <맹자>, <한국 산문선> 등 동양 고전 80여 권 속 구절이 한 장 한 장 다르게 일력의 한 해에 알차게 담겨 들어갔다 한다.

이처럼 아침마다 한 장씩 넘기며 마음을 다잡는 효과가 있어서. 매일 뜯어 쓰는 일력이 인테리어용으로 부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내년부터는 다시 일력을 사용하려고 한다. 그래서 일력을 사려고 이번 연말에는 휴일마다 여기저기를 돌며 기웃거려 보았지만 아직 판매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일력이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지도 모르겠다. 한 장에 일주일을 엮은 주력(周历)이나 일력도 달력이라 부른다. 그러고 보니 달력보다 일 년 동안의 날짜를 적은 책을 의미하는 책력(册历)이라는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더 정확한 것 같기도 하다.

조선시대엔 달력이 책의 형태로 만들어져 책력이라고 하였다. 농사와 생활에 유용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보니 책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책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농사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로, 이십사절기는 물론 기상의 변화를 예측해서 적어 두었다. 하늘과 자연의 뜻을 전달하는 창구기능을 한 것이다.

“말은 행동이 따르지 못하고/뜻은 실천으로 채우지 못하여/나이 마흔이 되도록/단지 불효만 하였을 뿐이다.//지금부터 죽을 때까지/선행으로 스스로를 돕는다면/신이 들어주고 받아주어서/허물과 재앙을 면하게 되리라//”

–이식의 《택당집》중 <책력에 쓴 글>에서

옛사람들은 정초에 책력을 구입하면 그 여백에 한 해의 목표나 바람, 또는 새해를 맞는 감회를 적곤 했다한다. 이식(조선시대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한 문신, 호는 택당)의 글도 그중의 하나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여내고/새 달력을 준비하며/조용히 말하렵니다/‘가라, 옛날이여’/‘오라, 새날이여’/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고마운 시간들이여”

이는 이해인 수녀(시인)가 쓴 시 <12월의 엽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새해의 달력장(일력장)을 펼치며 지나온 한 해를 비춰 되돌아보노라면 다사다난이란 느낌이 많이 든다. 다사다난이란 게 뭣이던가? 여러 가지 많은 일과 그 많이 벌어진 일들 중에서 많고 많은 어려움들이 끼어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시대적 사회 상황이 많은 이들을 울리고 아프고 힘겹게 해, 울분을 토하며 아우성치고 하소연하듯 나 역시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이 많은 한해였다.

1월 29일, 한 달에 열흘, 반달, 스무날씩 출근하며 그럭저럭 버텨오던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집에서 휴직이 시작되었다. 3월 2일. 하루 왕복 세 시간을 길에서 보내며 출퇴근해야 하는 지금의 회사로 취직되어왔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회사취직도 어려운 게라 젊은이 모두가 기피하는 재활용품 분쇄업이지만 이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8월 7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 큰형님이 이미 열흘 전에 말기 암 진단을 받은 것을 조카에게서 들었다. 8월 14일 요양병원에 입주하는 큰형님을 만났다. 코로나로 한 해 만에 만나 뵙는 큰형님의 얼굴은 너무 수척했다. 병마 앞에서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9월 24일. 큰형님이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코로나19로 말미암아 40일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그날 아침 임종 전에야 큰형님을 뵐 수 있었는데 이미 말문도 막히고 의식도 거의 잃은 상태였다.

불과 40일 전에만 해도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나누던 형님이었는데, 나뿐이 아니라 조카들도 그간 아버지를 겨우 두세 번, 그것도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10여 분씩 만났다 한다. 병마의 고통 속에서, 그토록 그리운 자식들마저 곁에 없이 외로이 임종까지 형님은 과연 어떻게 보내셨을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쓰리며 눈물이 솟구쳤다. 그날은 이생에 가장 비통한 하루였다.

12월 16일. 아내를 데리고 순천향병원에 다녀왔다. 아내는 뇌출혈로 이미 시술을 두 번이나 받은 터라 연 나흘 어지럽고 메스껍고, 구토하면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여 많이 걱정했는데 진단 결과 약 과도 복용이라 그나마 안심된다. 5년째 매일 복용하던 약에 한 가지 알약을 더 첨부한 것으로 인한 과민반응이라 그 약을 떼니 이튿날부터 많이 호전되었다.

물론 좋은 날도 많았다.  5월 15일, 중국 하얼빈에서 수필 <사랑의 손 편지>로 송화강수필문학상을 받았다. 코로나로 인해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며칠 내에 국제등기우편으로 보내온 증서를 받아서 감개가 무량하다. 한국에 나온 후에도 중국의 이러저러한 문학상을 여러 번 받았지만 국제우편으로 보내온 증서를 받아보기엔 처음이라 그 성의에 심히 감동되었던 것이다.

9월 15일, 코스미안상 공모팀으로부터 응모작품 1차 통과 공지를 받았으며 코스미안뉴스에 칼럼니스트로 활동할 기회를 주어서 너무나 반가웠다. 11월 15일, 11월 20일, 11월 29일, 12월 6일, 코스미안뉴스에 나의 칼럼이 나간 날로 적혔다. 지금까지 중국과 한국의 여러 동포언론지에서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며 숱한 칼럼을 발표했지만 한국의 언론지에 칼럼을 내기엔 코스미안뉴스가 처음이라 나에겐 특별한 의미가 깃든 날이었다.

새해, 우리의 일력장이나 달력장에 더는 불운의 날이, 울분의 날이, 아픈 날이 찍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이들의 기대처럼 이른 시일 내에 모두 좌절과 실의에서 벗어나고 어둠에서 헤어 나오기를. 그리고 달력장이나 일력장에 그 기쁨의 하루하루를, 그 하나하나의 감격을 적으며 축하할 수 있기를.

[김춘식]

수필가

칼럼니스트

송화강수필상 수상

이메일 jinchunzhi200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