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새벽을 열고 눈꽃 산행지로 유명한 홍천의 계방산을 향해 출발한다. 영동고속도로 문막휴게소에서 식사를 마치고 치악산 쪽을 바라보니 산군은 운무에 가려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속사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홍천으로 이어지는 31번 2차선 좁은 국도 주변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다. 버스는 이승복 기념관에서 시작되는 운두령 고갯길을 꼬리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오른다.
뒤척임 없이 구름머리 베고 자는 운두령 고개.
겹겹이 끼고 누운 검은 산들의 동면 꿈길
헤집고 오르노라니 찬 겨울 하얀 입김 숨이 가쁘다.
- 이성교, ‘운두령을 넘으며’ 중에서
드디어 산행 들머리인 해발 1,089m의 운두령에 도착하니 시인의 시구처럼 ‘운두령 고개는 큰 숨을 쉬며 웅크린 가슴으로 자고 있었다.’.
버스는 김 숨 토하듯 산객들을 운두령에 내려놓는다. 홍천 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은 잠시 후에 경험할 설원의 장쾌함과 눈꽃 산행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있는 산객들을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든다.
고갯길에 있는 목재 계단을 따라 능선에 올라서니 사위를 가린 잿빛 구름 속에서 산객은 적막한 숨결을 토해내고, 외진 능선 길에는 귓가에 머무는 낭랑한 바람소리만 울고 있다. 이따금 겨울 햇살이 잿빛 구름을 뚫고 간간이 비춘다. 그럴 때마다 앙상하게 드러난 물푸레나무의 하얀 가지가 눈부시다.
지나가는 등로 옆 넓은 공터에 텐트 두 동이 쳐져 있다. 계방산은 대학 산악부 동계 비박지로 유명하다. 오늘같이 체감 온도는 영하 30도, 텐트를 날려 버릴 만큼 위세가 당당한 강풍에도 개의치 않고 비박 중인 젊은 알파인들에게 세종 때 김종서 장군이 쓴 시조를 두 단어만 수정해서 그 기개를 칭송한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밝은 달은 눈 속에 묻혀 보이지 아니한데, 계방산 능선에 스틱 한 자루 짚고 서서 긴 휘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구나.
길가의 수목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수북하게 쌓인 눈의 무게를 지탱하기 버거워 축축 늘어뜨린 솔가지며 서리꽃 만발한 활엽수의 나목이 잠자던 감성을 일깨운다. 눈가루의 위세에 눌려 푸른빛을 찾아볼 수 없는 산죽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바싹 마른 채로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단풍잎 역시 눈 무게를 감당하느라 힘들어한다.
겨울산은 황홀하다. 탁 트인 시야의 환상적인 설경 아래 겨울의 낭만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역시 겨울 산행의 백미는 눈 내린 산을 가로지르며 짜릿한 비경을 즐기는 데 있다.
가칠봉에서 설악을 거쳐 오대에 이르는 거대한 산군은 은세계를 이루며 잠들어있고, 그 위로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그러나 조망의 기쁨도 잠시, 매서운 바람의 기세에 벗어놓았던 두건을 감싼다. 머리카락은 땀방울이 얼어붙으면서 생긴 고드름으로 버석거린다. 잠시도 지체할 겨를이 없이 정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매서운 삭풍에도 흔들림 없이 전망대에서 20여분 만에 산정에 도착한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과 홍천군 내면의 경계를 이루는 계방산은 주변의 황병산, 오대산, 방태산 등 여러 고봉과 함께 태백산맥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정상에 서니 일망무제의 주위 경관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예상 밖으로 날씨가 포근하고 바람마저 잔잔하여 사위를 조망하기에 너무 좋다. 정상의 남서쪽으로는 우리가 지나온 운두령과 그 너머 태기산 산군이 시야에 와 닿는다.
동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능경봉, 대관령, 선자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분수령과 그 너머로 푸른 동해가 연이어 펼쳐지고, 하얀 눈으로 덮힌 오대산 산줄기들이 발아래로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정상에서 나무 계단을 내려서면 1,276봉을 거쳐 아래 삼거리로 바로 내려가는 급경사의 등로가 이어진다. 우리는 동쪽 능선으로 하산 방향을 잡는다.
동쪽 능선을 따라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접어드니 금방 주목 삼거리에 도착한다. 능선의 등로는 습한 바람이 나뭇가지에 부딪히며 만들어낸 갖가지 모양의 눈꽃으로 터널을 이룬다. 한겨울에도 푸른 기운을 잃지 않아 동청(冬靑)이라 불리는 겨우살이는 하얀 솜이불을 뒤집어쓴 채 일찌감치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 있다.
급경사지만 감촉 좋은 눈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서니 작은 계곡이 나온다. 하산 길 산객들이 수선거리는 말소리도 차가운 칼바람에 얼어붙고, 계곡의 청아한 물소리도 얼음 아래로 스며들어 산골짜기는 고요한 고독의 심연에 빠져있다.
산속은 으레 서글프다. 늦은 저녁 하산 길의 등산화 위로 하얀 서리가 내린다. 산자락은 고요하게 누워 있고, 그 품안으로 가랑잎이 바람소리 따라 서걱거린다. 산줄기에서 배어나오는 외로움과 쓸쓸함은 바람에 떠밀려 계곡 속으로 묻혀 버린다. 야영장 공터에는 복원된 이승복 어린이 귀틀집 생가가 외로이 서있다.
야영장에서 노동 삼거리로 내려가는 길가 시골집의 처마에는 주렁주렁 고드름이 달려있고, 굴뚝에서는 몽실몽실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해질녘 산촌 풍경은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오대산 월정사 앞의 식당가에서 버섯전골, 더덕구이, 산나물로 차려진 풍성한 산채 정식을 즐기고 마당으로 나오니 오대산을 휘감는 구름 사이로 노란 얼굴의 달이 뽀얀 몸짓으로 고즈넉한 산정에 어둠의 빛을 뿌리며 내려앉는다.
오늘은 계절의 서정시가 들려주는 계방산 겨울 이야기에 흠뻑 취한 하루였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