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쯤 ‘하오체’를 유행시키면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에서 본 한 장면은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주인공의 아버지인 노비가 도망하려다 잡혀서 맞아 죽는 장면이 있는데 주인양반 왈 ‘재산이 축나는 것은 아까우나 아랫것들에게 본보기가 되니 손해는 아니겠다.’ 그러면서 아비는 맞아 죽고 어미는 우물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주인공인 아이는 추노꾼에게 쫓기다가 운명적으로 미국 군함에 오른다.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조선이 국시로 삼은 성리학의 발원지인 명나라보다 훨씬 견고한, 천민에게는 천형(天刑)같이 가혹한 사회 구조였다. 양반과 일부 중인을 제외한 천민과 노비 등은 사람이 아닌 재물이었다.
오직 임금 한 사람에게만 절대 권력이 집중되어있고 임금의 눈 밖에 나면 그는 이미 생명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때로는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절해고도나 깊은 산간벽지로 유배를 시키기도 했지만, 그것도 임금이 통치수단으로 자신의 자비심을 내보이는 척하면서 필요할 때에는 다시 불러내어 신하로 쓰기 위해 방편이었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정약전 형제가 유배 가게 된 것은 당시 개혁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임금으로 등극하자 왕권이 자리 잡기 전에 반대편에 있던 신하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국시인 성리학과 다른 천주를 믿는 서학(西學)을 사학(邪學)으로 몰아 관련자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면서 시작한다.
그나마 깨어있는 선비에 속하던 형제는 전라도의 흑산도와 강진으로 보내지고, 특히 흑산도로 간 정약전은 어쩔 수 없이 천민에 속하던 어민들과 함께 지내게 되는데 현지에서 목숨을 유지하려니 갯놈(바닷가에 살면서 어업으로 삶을 연명하는 남자를 비하하여 부르는 것)들과도 교유(交遊)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는 남성 우월의 사회였으나 신분제는 어미의 신분에 따라 정해지는 다소 모순된 면이 없지 않았는데 또 다른 주인공인 장창대도 마찬가지였다. 아비가 양반이라도 어미가 갯년(갯놈과 동격인 여자)이면 창대도 갯놈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선만 잡아 오는 단순한 갯놈이 아닌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신분제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깨어있는 어부였다.
그 깨어있는 갯놈을 알아보는 이가 있었으니 ‘남다른 양반’ 정약전이었다. 물론 그도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유배생활을 살아가는 방편이기도 했다. 영화 ‘자산어보’는 그나마 천민을 양반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지만 사람의 일부로 본다는 것과 서로 장시간 교유하면서 인간 본질의 모습과 천부인권(天賦人權)을 알고 깨달아 가는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백 년도 못살면서 천년을 살 것처럼’ 호가호위를 일삼는 양반과 벼슬아치들. 그러나 그들도 기득권끼리의 권모술수 전쟁에 결국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홀로’가 되고 또, 의사와 관계없이 그 시간이 오래가고, 때가 되면 그 유배장소까지 옮겨지다가 종국에 가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수(壽)를 다한다.
당시 주자학이 판을 치는 견고한 신분제의 사회에서 어떤 상황에 기인하든 반상(班常)이 교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임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시도가 좋았고, 그야말로 무지렁이 같은 사람들이 깨어나는 모습은 미래세대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영화 ‘자산어보’는 유배를 당한 정약전이라는 선비가 조선반도 삼면의 어족자원을 체계적으로 조사한 자료라는 것에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 시간적 공간에서의 형식적 결과물일 뿐이고 그 과정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제시하며 그 해답을 관객들에게 묻고 있다.
양반 선비 정약전은 임금으로부터 버림받아 유배형을 받으면서 집에 남겨 두고 온 아내는 과부가 되고 자식은 고아가 되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비는 절해고도인 흑산도에 떨어져 다시 돌아갈 기약도 없이 지내다가 현지에 동화되어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다는, 신분제에 대한 억울함에 한이 맺힌 천민 청년 창대에게 ‘잘못된 것을 죽으면 바르게 할 수 없으나 살아서는 바르게 할 수 있다.’며 사람이 만든 잘못된 제도와 사람의 본질 그리고 생명의 고귀함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본인이 홀로 있을 때에는 신독(愼獨)을 견지하면서 주자학과 사학(邪學)으로 일컬어지는 서학(천주학)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학이라 칭하며 억압하지만 실학이기도 한 천주학은 받아들여야 하고 두 학문은 서로 적이 아니고 같이 걸어가는 벗이라고 일갈한다. 벗을 깊이 알면 내가 깊어지는 법이라고. 그러면서 사람에 있어서는 귀천이 없는 평등한 세상, 나라의 주인이 백성인 세상을 기다린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 보이는 오늘날을 생각한다. 현대는 완전한 평등사회인가? 지금은 신분제도 존재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구성원 각자는 본질에 충실하고 있는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신축 아파트 현장의 광고문이 눈길을 잡아당긴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 줍니다.’ 이게 말인가, 글인가? 평등은 물질의 평등만을 뜻하지 않는다. 진정한 평등으로 가려면 아직 멀었다. 과장광고의 주변에 천민자본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음이 안타깝다.
홀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다. 나의 겉모습을 본다. 아파트 평수, 승용차 크기, 출신학교 등. 언제까지 말로만 평등을 외치고 겉멋만 중요시 할 것인가, 적어도 금수(禽獸)와 달리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스스로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행정안전부 등록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
bluepol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