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0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옥세철의 인사이드] 칼럼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면…' 필자는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마침내 개막됐다. 서방국가 정상으로는 문 대통령이 유일하게 참석했다. 예의 그 해맑은 미소와 함께 시진핑과 악수를 나눈다. 그리고 나온 것이 일방성의 종전선언이다…’ 가상의 시나리오다. 이게 그런데 현실화될 때 문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될까. 한 센텐스로 평가될 것이다. 위대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 번영의 버팀목이 되어온 ‘한미동맹을 무너뜨린 대통령’으로." 칼럼 글을 맺고 있다. 댓글로 달린 한 독자의 의견과 함께 옮겨본다.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면...'
‘코로나 19 유행 2년째’, ‘지구촌 달군 K-컬처’, ‘사건 사고로 얼룩진 군(軍)’, ‘부동산^취업난, 공정의 화두 던진 2030 MZ세대’…. 이제 얼마 있으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신축년(辛丑年). 그 세밑에 국내 언론을 장식하고 있는 올해의 10대 뉴스 제목들이다.
이 2021년의 국내 뉴스 중 정치적으로 한 시대의 마감을 가장 상징적으로 알린 뉴스는 무엇일까. 노태우, 전두환 두 전 대통령의 잇단 부고 소식이 아닐까.
“비극적인 현대사를 장식했던 ‘쿠데타 주역’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2021년 10대 뉴스선정과 함께 한 국내언론이 내린 짤막한 논평이다.
새삼 느껴지는 것이 권력무상이다. 동시에 벌써부터 궁금한 것이 있다. 임기가 이제 5개월도 안 남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날 때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한 센텐스로 요약돼 기억될 수 있어야한다’- 성공한 대통령 평가와 관련해 나오는 말이다.
‘가장 위대한(The Greatest)’이란 수식어가 따라 붙는 미국의 대통령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노예해방 하면 바로 떠올려지는 게 링컨이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는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이란 평가가 항상 따라 붙는 것처럼. 한국도 마찬가지다. 산업화 하면 박정희, 민주화 하면 김대중 식으로.
꽤 요란하게 출범했다. 촛불 혁명에, 적폐청산을 외쳐댔다. 동시에 추구해온 것이 소득주도 성장이었다. 평등과 공정, 정의의 구호와 함께 최저임금을 과감하게 인상해 포용적 성장을 추구하겠다고 강조했던 문재인 대통령이다.
집권 마지막 해의 현실은 어떤가. 아파트 값 폭등과 함께 부동산정책은 거덜 났다. 청년일자리는 줄어들었고 영화 ‘판도라’에서 비롯된 탈 원전 정책은 거대 사기극임이 드러났다. 그토록 자랑하던 K방역도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확산과 함께 말이 아니게 됐다.
‘문 정권이 잘못한 일을 읊으려면 숨이 찰 지경이다’- 한 국내 논객의 한탄으로 참담하기 짝이 없는 중간결산이다.
조국, 윤미향, 추미애….‘내로남불’의 대명사라고 할까. 이런 이름들이 클로즈-업 되면서 평등, 공정, 정의는 무참히 짓밟혔다. 나름 보편성, 다시 말해 도덕적 우위에 바탕을 둔 한국형 좌파, 진보의 내러티브가 좌파 문재인 정권에 의해 철저히 망가졌다고 할까. 이는 아마도 문 정권 ‘최대의 치적(?)’으로 기록될 것 같다.
그 처절한 심정을 운동권 출신 변호사 권경애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다하자고 언약하던 귀착점이 결국 이재명이냐?”
문재인을, 조국을, 또 검찰개혁을 수호한다며 문빠들이 그 세월, 그토록 난리치더니 결국은 부동산투기꾼에 조폭, 좌파 변방 중에도 변방인 경기 동부연합세력 등이 망라된 ‘대장동 카르텔’을 등에 업은 이재명으로 상징되는 더 조악한 좌파로 전락했느냐는 통한의 지적이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라고 하던가. 문 정권의 트레이드마크 격 세일품목 말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의 김여정이 국빈으로 초청되면서 화려한 남북 평화 쇼가 펼쳐졌다. 그 쇼도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허상으로 드러났다.
그렇지만 ‘2018 평창 어게인’의 꿈을 버리지 않고 종전선언을 성공시켜 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는 문 대통령이다. 집요하기가 가히 필사적이라고 할 정도다.
‘김정은 대변인’이라는 국제사회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 않는다. 그리고 발걸음마다 평화프로세스를 세일하고 다녔다. 유엔총회연설에서도, 교황과의 만남에서도,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도, 코스타리카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종전선언 지지를 당부했다. 그리고 호주 국빈방문에서도 장시간동안 종전선언구상을 설명하며 지원을 촉구했다.
종전선언에 대해 국제사회는 냉담하다. 아니, 미국 등 서방동맹국들은 부정적이다. 비핵화진전이 있기까지는 유엔의 대북제재를 유지한다는 것이 서방동맹의 입장으로 문 정부가 중재자역할을 견지하며 종전선언을 비핵화 견인수단으로 삼는다는 제안을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국제정치 구도가 미-중대결구도로 수렴되고 있는 현실에서 더구나 특히.
종전선언이 성사됐다고 치자. 그러면 북한과 중국, 그리고 국내 종북세력은 일제히 주한미군철수를 요구하고 나선다. 미군주둔의 필요성이 없다는 이유로. 다음 수순은 한미동맹와해다. 그 종전선언을 전 외교력을 동원해 추진하고 있는 문 정권. 그 저의는 뭘까. 대선 승리란 정치적 목적에 더해 ‘혹시 용공은…’아닐까하는 의심의 시선마저 워싱턴으로부터 받고 있다.
그런데도 마치 몽유병자인 양 종전선언을 되 뇌이고 다닌다. 그러는 한편 역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진핑의 중국몽을 찬양한다.
국민의 81%가 중국을 적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코로나 19 중국 기원설 조사를 제기했다가 중국의 경제제재를 당한 반중(反中) 최전선국이다. 그 호주의 의사당에서 중국을 옹호하며 베이징 동계 올림픽 보이콧 동참의사가 없노라고 당당히 만천하에 알리고 있는 문 대통령이다.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마침내 개막됐다. 서방국가 정상으로는 문 대통령이 유일하게 참석했다. 예의 그 해맑은 미소와 함께 시진핑과 악수를 나눈다. 그리고 나온 것이 일방성의 종전선언이다…’ 가상의 시나리오다. 이게 그런데 현실화될 때 문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될까. 한 센텐스로 평가될 것이다.
위대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 번영의 버팀목이 되어온 ‘한미동맹을 무너뜨린 대통령’으로.
<옥세철 논설위원>
총 1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wondosa
죽을때까지 조공바치며 종처럼 살 종자들 ...허허참...ㅉㅉㅉㅉ
12-20-2021 03:28:24 (PST)
지난해 2020년 9월 1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글 우리 되새겨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창조의 예술
올봄엔 한국의 총선, 올가을엔 미국의 대선이 있어 정치 바람이 불고 있는데 74년 동안 존속되어 온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이 1993년 해체되면서 체코 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한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 (1936-2011)이 그의 저서 ‘여름 사색 Summer Meditations’에서 정치인들이란 단순히 한 국가의 건강이나 병약상태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런 상태를 만들어 낸다고 다음과 같이 하는 말 좀 우리 함께 들어보리라.
"‘어느 나라든 그 나라 국민 수준만큼의 정치 지도자를 갖게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한 사회의 거울이고 그 사회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일종의 화신이 정치인들이니까. 그렇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 거꾸로 역逆도 참으로 진眞이다. 정치인들을 반사해주는 거울이 사회다. 사회 구성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강점과 약점 가운데 어느 쪽에 의존하는가, 사회 내부의 어느 세력을 억제하고 또 어떤 세력을 육성시키는가는 주로 정치인들에게 달렸다.
이전의 정권(여기서 그는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의미했겠지만, 유럽과 미주를 포함한 전 세계의 통칭으로서 서구식 독점 자본제국주의 정부들에게도 해당되는 말 아닐까)은 이기적 탐욕, 시기, 증오심 같은 인간 최악의 성질을 충동하고 동원해왔다. 그것도 아주 조직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약점을 악용해 온 것이다. 우리 자신의 최대공약수에 상당치 못하고 그 가치 기준에 못 미치는 위정자들로 인해 우리가 오늘의 사태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정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이와 같은 사태에 책임을 지고 우리 사회의 향상과 발전을 위해 우리 모두의 최선을 이끌어 낼 중차대한 사명을 띠고 있다."
이처럼 명쾌한 그의 진단대로, 그래서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이라 하는 것이리라. 예술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잘 짜여 있어 다른 데서 경험하고 맛볼 수 없는 위안처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일찍이 내가 들은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지금 네가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가는 네게 주신 창조신 하느님의 선물이고, 앞으로 네가 어떤 사람 누가 되는가는 하느님에게 바치는 네 선물이다.”
이 말에서 ‘하느님’이란 우리를 도와주신 우리 조상, 부모형제, 그리고 친구들과 이웃까지 다 포함한 큰 하나 ‘하나님’이리.
이 말을 좀 달리 풀이해 보자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지만 그보다는 ‘너 자신을 창조하라’고, 아니 또 그보다는 ‘너 자신을 날마다 새로 창조해 가면서 살라’고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시고 자살(?)한 그에게 좀 무리한 주문이 될지는 몰라도 말이다.
이어서 함석헌 선생님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엄중嚴重한 말씀을 우리 모두 어서 경청傾聽 대오大悟 크게 한번 깨달아 명심 불망銘心不忘할 뿐만 아니라 즉시 행동에 옮겨 실천궁행實踐躬行 해보리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 -
1. 역사의 뜻
나라를 온통 들어 잿더미, 시체 더미로 만들었던 6․25 싸움이 일어난 지 여덟 돌이 되도록 우리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뜻을 깨달은 국민이라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다. 우리 맘이 언제나 답답하고 우리 눈알이 튀어나올 듯하고 우리 팔다리가 시들부들 늘어져만 있어 아무 노릇을 못하지 않나? 역사적 사건이 깨달음으로 되는 순간 그것은 지혜가 되고 힘이 되는 법이다. 6․25 사변은 아직 우리 목에 씌워져 있는 올가미요 목구멍에 걸려 있는 불덩이다. 아무런 불덩이도 삼켜져 목구멍을 내려가면 되건만 이것은 아직 목구멍에 걸려 있어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므로 밥을 먹을 수 없고, 숨을 쉴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서 이것을 삼켜 내려야 한다. 혹은 이 올가미를 벗어 버려야 한다.
올가미가 거저는 아니 벗겨진다. 죽을 힘을 다해 벗겨야지. 코가 좀 벗어지고 귀가 좀 찢어지고 이마가 좀 벗어지고 턱이 부스러지는 한이 있더라고 벗겨야 한다. 불덩이가 그대로는 아니 넘어간다. 눈을 꽉 감고 죽자 하고 혀를 깨물고 목구멍을 좀 데면서라도 꿀꺽 삼켜야 한다. 역사적 사건의 뜻을 깨달음은 불덩이를 삼킴이요 올가미를 벗김이다.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 모든 일은 뜻이다. 뜻에 나타난 것이 일이요 물건이다. 사람의 삶은 일을 치름(經驗)이다. 치르고 나면 뜻을 안다. 뜻이 된다. 뜻에 참여한다. 뜻 있으면 있다(存在). 뜻 없으면 없다(無). 뜻이 있음이요, 있음은 뜻이다. 하나님은 뜻이다. 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 뜻 깨달으면 얼(靈),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
2. 역사에 대한 반성
6․25 싸움은 왜 있었나? 나라의 절반을 꺾어 한 배 새끼가 서로 목을 찌르고 머리를 까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거기 어우름을 하여 피와 불의 회오리바람을 쳐 하늘에 댔던 그 무서운 난리, 사람이 죽고 상한 것이, 물자의 없어진 것이, 남편 잃고 반쪽 사람이 된 과부가, 어미 애비 잃고 고아가 된 어린이가, 거기 써 버린 쇠를 쌓으면 산이 될 것이요, 거기 태워 버린 기름을 모으면 바다가 될 것인 이 끔찍한 전쟁은 도대체 왜 일어났을까? 바다를 뒤집는 고래 싸움은 하필 이 가엾은 새우 등에 터졌을까?
밤거리를 헤매다가 도둑놈에게 욕을 본 계집도 그 상하고 더러워진 몸을 어루만지며 생각을 해본다면 그 까닭이 어디 있음을 알 것이요, 대낮에 술에 취해 자다가 온 세간을 다 불태워 버린 사내도 잿더미에 마주 앉아 생각을 해본다면 그 잘못이 어디 있음을 알 것이다. 이 역사의 한길에 앉은 고난의 여왕은 제 욕보고 뺏김당한 것이 어떤 까닭임을 생각하나, 아니하나?
6․25 싸움의 직접 원인은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 둘째 번 세계전쟁을 마치려 하면서 록키산의 독수리와 북빙양의 곰이 그 미끼를 나누려 할 때 서로 물고 당기다가 할 수 없이 찢어진 금이 이 파리한 염소 같은 우리나라의 허리동강이인 38선이다. 피가 하나요, 조상이 하나요, 말이 하나요, 풍속․도덕이 하나요, 이날껏 역사가 하나요, 이해 운명이 한 가지인 우리로서는 갈라질 아무 터무니도 없다. 이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다.
그러나 다시금 한번 생각해볼 때 아무리 싸움은 다른 놈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왜 등을 거기 내놓았던가? 왜 남의 미끼가 됐던가? 거기는 우리 속에서 찾을 까닭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이 택한 것이다. 쉬운 말로, 만만한 데 말뚝질이지, 만만치 않다면 아무 놈도 감히 말뚝을 내 등에 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른바 약소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진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이 원인 아닌가? 그렇다면 미운 것도 미국도 소련도 아니며, 일본이며 일본도 아니요 우리 자신이다. 왜 허리 꼬부린 새우가 됐던가?
우리는 왜 남의 식민지가 됐던가? 19세기에 있어서 남들은 다 근대식의 민족국가를 완성하는데 우리만이 그것을 못했다. 왜 못했나? 동해 바다 섬 속에 있어 문화로는 우리에게조차 업신여김을 당하던 일본도 그것을 하고 도리어 우리를 덮어누르게 되는데, 툭하면 예의의 나라라 '작은 중화'라 자존심을 뽐내던 우리가 왜 못했나? 원인은 여러 말 할 것 없이 서민, 곧 이 백성이란 것이, 이 씨알이 힘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 아닌가? 남들은 아무리 봉건제도라 하며 정치가 아무리 본래 백성 부려먹는, 씨알 짜먹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그 '오리' 인 서민계급을 길러가며 생산방법을 가르쳐주며, 그 금알을 짜먹을 만한 어짊과 인정은 있었는데, 우리나라 시대시대의 정치업자 놈들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그저 짜먹으려만 들었다.
그러므로 백성은 줄곧 말라들기만 했다. 민족국가, 경제에 있어서 자본주의 국가는 씨알 중에서도 중산층의 나라다. 중산층이란 다른 것 아니요 그 사회제도가 씨알이 자라 제 힘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중산층이 튼튼히 있으면 그 나라가 성해가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중산층이 살아 있는 만큼 씨알의 발달이 되어 있는 나라는 마치 맨 밑의 곧은 뿌리가 잘 자란 나무 같아 어떤 역사적 변동이 와도 거기에 맞추고 그 기회를 타고 이겨 살아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는 망하는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의 물결이 세계를 뒤엎고 일어날 때 우리만이 그것을 타지 못하고 떨어져 민족 전체가 남의 종이 됐던 것은, 우리나라의 씨알이 양반이라는 이리 떼보다 더한 짜먹는 놈들의 등쌀에 여지없이 파괴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민족국가 시대에 제 노릇을 못하고 남의 종이 됐기 때문에 그 다음 시대에도 다른 데 종으로 팔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일본에서는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 일본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 형제가 한 집에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는 있지 않았나? 지금 그것도 못해 부모 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 없지 않은가?
잘못이 애당초 전주 이씨에서 시작이 됐다. 압록강, 두만강에 울타리를 치고 그 밖에서는 중국 만주의 이리․호랑이에게 꼬리를 치며 미끼를 바치는 대신 이 파리한 염소를 사정없이 악착스럽게 더럽게 짜먹기 시작하던 이조 500년에 이 나라는 결딴이 나고 말았다. 그 염소가 행여 울타리를 깨칠까 봐 그들은 임진강 이북을 관서니 관북이니 평안도 상놈이니 해서 아주 대강이를 눌러 버렸다. 이놈의 38선은 운명의 남북 경계선이다. 민족 해방의 물결이 태평양에서 밀려들어 이 잠자는 민족에게도 거기 맞춰 깬 혼이 몇 개 없었던 것은 아니건만 매양 일을 그르친 것은 이놈의 남북 충돌이었다. 6․25 동란 때 부산 부두에 몰려 있어 말라가는 논귀에서 송사리의 살림을 하면서도 놓지 못한 것은 당파싸움, 오늘날까지도 그것인데 당초에 그 시작은 전주 이씨네의 정치에 있다. 임진란에 나라가 온통 일본의 말발굽에 밟힐 때 민중의 충성은커녕 동정 하나 못 받으며 밤도망을 해 임진강을 넘어가던 선조가 압록강가에서 감상적인 울음을 운 일이 있지 않나?
나라일 엉망진창인데 (國事倉皇日)
누가 충성 다할꼬 (誰爲李郭忠)
서울을 버릴 때 큰 뜻을 남겼으니 (去邠存大計)
도로 찾음은 그대들 믿을 뿐 (回復仗諸公)
관산 달에 슬피 울고 (痛哭關山月)
압강 바람 마음 상해라 (喪心鴨水風)
그대들이여, 오늘을 지내고도 (朝臣今日後)
오히려 동․서 또 있겠는가 (寧復更東西)
알기는 알았건만! 부산서도 그 울음을 울었던가, 아니 울었던가? 알기나 하면 무엇해? 울기만 하면 무엇해? 울려거든 민중을 붙잡고 울었어야지. 민중을 잡아먹고 토실토실 살찐 벼슬아치를 보고 울어서 무엇해? 여우 같고 계집 같은 소위 측근자 비서 무리를 보고 울어 무엇해? 나라의 주인은 고기를 바치다 바치다 길거리에 쓰러지는 민중이지 벼슬아치가 아니다. 구원이 땅에 쓰러져도 제 거름이 되고 제 종자가 되어도 돋아나는 씨알에 있지 그 씨알 긁어먹는 손톱 발톱에 있지 않다.
3. 38선은 언제 그어졌나
그러므로 6․25의 남북 싸움의 속 원인은 스탈린, 김일성, 루스벨트에 있지 않고 이성계에 있다. 이북을 상놈의 땅으로 금을 긋던 날 38선은 시작됐다. 아니다. 거기서도 더 올라간다. 고려 중엽에 김부식이가 묘청의 혁명운동을 꺾어 버리던 날, 평양 이북을 적국처럼 보기 시작하던 날 벌써 일은 글러졌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김춘추, 김유신이 당나라에 흘꾼거려 드나들던 날, 진흥왕이 기껏 간 것이 삼각산이어서 거기 비석을 세우던 날 기운은 벌써 빠졌다. 아니야, 온조가 한가람의 딴전을 벌이던 날 벌써 문제가 설려졌다. 우리나라의 정신이 없다면 모르지만 있다면 그 등떠리가 아무래도 고구려적인 성격이 아닌가? 그러니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통일이랍시고 나라의 떨어지다 남은 한 귀를 들고 서면서부터 잔약질인 것 같은 신라적 백제적인 것이 줄거리 노릇을 하게 될 때 한 번 꺾였다. 고려시대만 해도 그 남은 기상이 있었는데 묘청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갈 때 그 두 번째 꺾인 것이다. 이조가 스스로 명나라의 속국으로 만족할 때 세 번째 꺾였다. 등심뼈가 꺾이고 끄트머리 신경만 남았을 때 있을 것은 저림과 비꼬임과 쥐 일어남밖에 없지 않은가?
하나님이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땅에 남북의 다툼을 만들었다. 인천만에서 원산만으로 긋는 선이 地殼(지각)이 약한 곳이어서 그리로 온천이 많이 터져나오고 그 이북과 그 이남이 지리가 서로 다르지만, 이것은 人文(인문)으로도 약한 경계선이다. 단군 때부터 漢四郡(한사군), 신라, 고려, 내리내리 늘 민족 성격의, 문화의, 사회생활의 경계선이 되어왔다. 어느 모로 보나 하나요,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 나라, 이 겨레에 그 금이 놓여 있는 것은 무슨 시련의 선인가? 무슨 숙제의 선인가? 하나님은 아니 믿으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있는 사실에 눈을 감을 수는 없고 그것을 정신적으로 이겨 넘지 않는 한 역사의 바른 걸음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6․25의 뜻은 눈앞의 사실만을 볼 것 아니라 저 먼 역사의 흐름에서부터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뜻을 깨닫는다는 것은 본래 세 점을 한 곧은 줄로 맞추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일직선상에 놓여서 이 끝에서 저 끝이 내다뵈는 것이 뜻을 앎이다. 그것을 하는 자만이 역사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사람이 예와 이제를 뚫지 못하면 마소(馬牛)에 옷 입힌 것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나타나서 세계역사를 한 번 새롭게 하려 할 때, 그 앞에 서서 요한이 외치기를 '빈 들에 주의 길을 예비하라, 하나님의 곧은 길을 닦아라!' 했다. 하나님의 길은 역사의 길이다.
역사의 길은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점이 일직선으로 놓여 내다보여서만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은 曲折(곡절), 波瀾(파란)이 많다고 한다. 역사를 치르는 인간의 할 일은 늘 곧은 줄로 되지 못한 사실의 과정을 뜻으로 바로잡는 데 있다. 6․25 싸움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서서 지나온 것을 내다볼 때 그것은 역사 처음에서부터, 민족 성격에서부터, 내다뵈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돌아서서 앞을 볼 때 '아, 이것은 이렇게 되잔 것이다.' 하는 것이 보여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를 역사적 현실에서 건진다.
4. 역사의 숙제
우리나라의 역사적 숙제는 세 마디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통일정신이요 하나는 독립정신이요 또 하나는 신앙정신이다. 그리고 이 셋은 결국 하나다.
나는 우리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고 보는데, 그렇게 보면 세계 어느 민족의 역사나 고난의 역사 아닌 것 없고, 인류 역사가 결국 고난의 역사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역사는 고난 중에서도 그 主演(주연)으로 보는데, 그 고난의 까닭은 이 세가지 문제에 있다.
5천년 역사의 내리밀림이 이조 5백년인데 그것은 그저 당파싸움으로 그쳤다. 아무도 이 당파싸움의 심리를 모르고는 우리나라 역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5백년의 참혹한 고난은 이 한 점에 몰린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 되는 데 있다. 민족으로 당하는 모든 고난, 그 원인이 우리 잘못에 있든 남의 야심에 있든 그 뜻은 작은 생각 버리고 크게 하나(大同) 돼 봐라 하는 하나님의 교훈으로 역사의 명령으로 알아서만 우리는 역사적 민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 되지 못하는 원인을 찾으면 독립하지 못하는, 제 노릇하지 못하는 데 있다.
하나 됨은 남의 인격을 존중해서만 될 수 있는 일인데 남의 인격을 아는 것은 내가 인격적으로 서고야 될 일이다. 정말 제 노릇 하는 사람은 제가 제 노릇을 할 뿐 아니라 남을 제노릇 하도록 만든다. 거지에게도 자존심은 있다고, 인격이 곧 自尊(자존)이다. 스스로 높임이 스스로 있음(自存)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독립정신이 부족하다는 말은 스스로 비위에 거슬리는 말이지만 남이 되어서 볼 때, 아니라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에 손을 내민 백제의 일이 그것이요, 고려도 그것이요, 이조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지리적 조건에 핑계를 대면 댈 수도 있고 주위 민족의 탓을 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인격엔 핑계가 없다. 핑계 되는 그것이 그 정신 아닌가? 우주를 등에 지는 것이 인생이요 정신이지, 나 밖의 다른 책임자를 찾는 것은 역사를 낳는 인격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지리적, 역사적 환경조차도 역사적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너는 역사의 주인이 돼 봐라.' 하는 숙제로 알아야만 이긴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또다시 독립정신은 어디서 나오나? 깊은 인생관, 높은 세계관 없이는 될 수 없다. 그럼 그것은 어디서 나오나? 위대한 종교 아니고는 될 수 없다. 종교란 다른 것 아니요 뜻을 찾음이다. 현상의 세계를 뚫음이다. 절대에 대듦이다. 하나님과 맞섬이다. 하나님이 되잠이다. 하나를 함이다. 그러므로 이 이상의 일이 있을 수 없고 이밖에 일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맨 처음이요 이것이 맨 끝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따지고 따져 올라가면 여기 이르고 만다. 일찍이 역사상에 위대한 종교 없이 위대한 나라를 세운 민족이 없다. 종교가 잘못되고 망하지 않은 나라 없다. 어떤 나라의 문화도 종교로 일어났고 종교로 망했다. 에집트가 그렇고 바빌론이 그렇고 희랍이 그렇고 중국이 그렇다.
우리의 근본 결점은 위대한 종교 없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백가지 폐가 간난에 있다 하지만 간난 중에도 심한 간난은 생각의 간난이다. 철학의 간난, 종교의 간난, 우리나라는 우선 물자의 간난 때문에 못사는 나라 아닌가? 중국 평원을 우리에게 주어 보라. 미국의 자원을 우리에게 주어 보라. 그래도 못살 것인가? 금수강산 이름은 좋지만 이 마른 뼈다귀 같은 산만을 파먹고는 힘이 날 수도, 생각이 날 수도, 인심이 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아무래도 생명은 물질의 주인이지, 물자 간난의 원인은 인물 간난에 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어려워진 것은 당파싸움으로 인물을 자꾸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베인 나무는 10년이면 다시 있을 수 있으나 인물은 죽이면 백년 길러도 다시 얻기 어렵다.
왜 그렇게 어려운가? 정신이라 귀한 것이요, 생각은 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재목은 숲에서야 나고 인물은 종교의 원시림에서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종교가 본래 깊지 못하다. 이것은 몽골민족의 通弊(통폐)다. 원나라가 세계를 휩쓸었으나 회오리바람처럼 지나가고 만 것은 깊은 정신문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리스는 손바닥 같은 반도지만, 그 문화는 아직도 살지 않나? 일본이 크게 못된 것도 그 종교의 작고 옅음에 있다. 만주족이 중국을 온통 정복해 300년은 갔지만 아무런 깉은 것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러 말 할 것이 없이 우리 고유한 종교가 시원한 것이 없지 않은가? 화랑도라 하지만 그 윤리적 철학적인 내용은 다른 데서 배운 것이지, 그 외의 것은 이른바 화랑으로 끝맺고 말지 않았나. 화랑도로 역사를 살리지 못할 것이다. 너무 옅다. 너무 평면적, 낙천적이다.
그러면 우리의 역사적 숙제는 이 한 점에 맺힌다. 깊은 종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철학하는 백성이 되자는 것. 그러면 6․25의 뜻도 어쩔 수 없이 여기 있을 것이다. 깊은 종교, 굳센 믿음을 가져라. 그리하여 네가, 네가 되어라. 그래야 우리가 하나가 되리라. 세계 역사는 이제 하나 됨의 직선 코스에 들고 있는 이때에.
5. 형제애를 통일로
이것은 눈앞의 역사에 맞추어 생각해보면 이렇게 된다. 6․25 전쟁이 난 것은 그 뜻을 알고 본다면
첫째, 이것은 참 해방이냐?
둘째, 이 정권들은 정말 나라를 대표하는 거냐?
셋째, 너희는 새 역사를 낳을 새 종교를 가졌느냐?
참 해방이 됐다면 참 자유하는 민족이 되었다면, 미․소 두 세력이 압박을 하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대로 섰을 것이다. 해방 전까지 없던 남북한의 대립이 두 나라 군대가 옴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은 우리 국민정신이 진공 상태였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형제 싸움은 일어났다. 남의 쳄이에 잡혀 동포가 서로 찌르고 죽인 다음에야 생각이 좀 나지 않을까?
이 정권들이 정말로 이 나라를 위한 정권이라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말 권세욕이 아니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이 있다면, 전쟁에도 좀더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을까?
이 정권들이 참 이 나라를 메인 정권이라면 이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말 권세욕이 아니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이 있다면 같은 전쟁에도 좀 더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을까?
이 민중에 참 종교가 있다면, 아무리 정치적 기술도 없고 경제의 힘도 군사의 힘도 없다 하더라도 환란 속에서도 좀 더 힘있게 견디고 넘어진 중에서도 또 기운차게 일어서지 않았을까? 아무 밑천을 못 가지고도 없는 데서 새것을 지어내지 않았을까? '바로 돌아 앞으로!'하는 새 시대의 앞장을 아니 섰을까? 어느 시대나 새 시대의 주인이 되는 것은 가진 것이 없는 자인데.
그런데 끔찍한 전쟁이 지나간, 지나간 것도 아니요 아직 목에 올가미로 목구멍에 불덩이로 걸려 있지만, 이 오늘에 있어서 결과는 어떤가? 완전히 낙제라 할 수밖에 없다.
남쪽 동포도 북쪽 동포도, 동포라고는 하면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고 형이 동생에게 총을 내미는 이 싸움인 줄은 천이나 알고 만이나 알면서도 쳐들어온다니 정말 대적으로 알고 같이 총칼을 들었지 어느 한 사람도 팔을 벌리고 '들어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땅이 소원이면 가져라, 물자가 목적이면 마음대로 해라, 정권이 쥐고 싶어 그런다면 그대로 하려무나. 내가 그것을 너하고야 바꾸겠느냐? 참과야 바꾸겠느냐?' 한 사람은 없었다. 대항하지 않으면 그저 살겠다고 도망을 쳤을 뿐이다. 그것이 자유하는 혼일까? 사랑하는 마음일까? 만일, 정말 그런 혼의 힘이 국민 전체는 말고 일부라도 있었다면 소련, 중공이 감히 강제를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속에 참으로 인해 길러진 혼의 힘이 도무지 없음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해방이 우리 힘으로 되지 않았으니 해방이 될 리 없다. 이제라도 우리 손으로 다시 해방을 해야 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남북 두정부가 서로 저쪽을 시비할 뿐이었다. 네 잘못이 내 잘못 아니냐 하는 태도가 없었다. 전쟁 터지자 나타난 것은 국민의 냉담한 태도였다. 즉 국민들이 정부를 신용하지 않았다. 전쟁을 정권 쥔 자들의 일로 알았지 국민의 일로 알지 않았다. 사실 국민이야 싸울 아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소련, 미국이 붙었다 하겠지만, 아무리 잘 붙어도 싸우지 않으려는 형제를 억지로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속아서 그 앞잡이 된 것은 정권 쥔 자들이요, 속은 것은 욕심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렇게 큰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날 아침까지 몰랐으니 정말 몰랐던가? 알고도 일부러 두었는가? 몰랐다면 성의 없고 어리석고, 알았다면 국민을 팔아넘긴 악질이다. 그리고는 밤이 깊도록 서울을 절대 아니 버린다고 열 번 스무 번 공포하고 슬쩍 도망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었다. 저희들도 서로 살겠다고 도망을 한 것이지 정부가 피난한 것은 아니었다. 문서 한 장, 도장 하나 아니 가지고 도망한 것이 무슨 정부요 관청인가? 그저 나도 너도 피난가서 다시 거기서 만났으니 또 사무라고 하고 볼가 한 것뿐이었다. 민중이 신용 아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이 지나가면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 싸움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은 진 것 아닌가? 어떤 승전 축하를 할까? 슬피 울어도 부족할 일인데. 어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랑으로 달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 하고 떼어 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노자는 전쟁에 이기면 喪禮(상례)로 처한다 했건만, 하기는 제2국민병 사건을 만들어내고 졸병의 옷․ ㅐ밥을 깎아서 제 집 짓고 호사하는 군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과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울타리일까?
한 번 내리 밀리고 한 번 올려 밀고, 그리고는 다시 38선에 엉거주춤, 전쟁도 아니요 평화도 아니요, 그 뜻은 무엇인가? 힘은 비슷비슷한 힘, 힘으로는 될 문제 아니란 말 아닌가? 이 군대 소용없단 말 아닌가?
전쟁 중에 가장 보기 싫은 것은 종교단체들이었다. 피난을 시킨다면 제 교도만 하려하고 구호물자 나오면 서로 싸우고 썩 잘 쓴다는 것이 그것을 미끼로 교세 늘리려고나 하고, 그리고는 정부․군대의 하는 일,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고 날씨라도 맑아 인민군 폭격이라도 좀더 잘 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다. 대적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 정치하는 자의 잘못을 책망하는 참 의(義)의 빛을 보여주고, 그 때문에 핍박을 당한 일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 간난 중에서도 교회당은 굉장하게 짓고 예배 장소는 꽃처럼 단장한 사람으로 차지, 어디 베옷 입고 재에 앉았다는 교회를 보지 못했다.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이나 향락적인 생활은 마찬가지고 다른 나라 원조는 당연히 받을 것으로 알아 부끄러워 할 줄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잘 얻어오는 것이 공로요 솜씨로 알고, 원조는 받는다면서, 사실 나라의 뿌리인 농촌은 나날이 말라 들어가는데, 도시에서는 한 집 건너 보석상, 두 집 건너 요리집, 과자집, 그리고 다방, 댄스 홀, 연극장, 미장원. 아무것도 없던 사람도 벼슬만 한번 하고 장교만 되면 큰 집을 턱턱 짓고 길거리에 넘치는 것은 오늘만을 알고 나만을 생각하는 먹자 놀자의 기분뿐이지 어느 모퉁이에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먼 앞을 두고 계획을 세워 살자는 비장한 각오한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이 전쟁치른 백성인가? 전쟁 중에 있는 국민인가? 이것이 제 동포의 시체 깎아 먹고 살아난 사람들인가?
그리고 선거를 한다면 노골적으로 내놓고 사고팔고 억지로 하고. 내세우는 것은 북진통일의 구호뿐이요, 내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니, 통일하는 것은 칼밖에 모르나? 칼은 있기는 있나? 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했는데 그렇게 사치한 벼슬아치들이 칼이 무슨 칼이 있을까? 육고집의 칼 가지고는 나라는 못 잡을 것이다.
6. 낙제한 국민
국민 전체가 완전히 낙제를 했다. 그러나 여기 우리의 낙제에도 불구하고 잊어서는 아니 되는 커다란 일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6․25 싸움에 유엔이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미래의 역사를 위해 크게 뜻이 있는 일이다. 역사상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다. 어느 한 나라의 문제로 인해 세계 모든 나라가 단체적으로 간섭을 하여 국제군대를 보낸 일이다. 만일 유엔이 재빨리 그의 있는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일은 어찌 됐을지 알 수 없다. 아니다, 모르는 것 아니라 뻔하다. 우리나라 전체는 공산화됐을 것이다. 그렇게 됐으면 일본․필리핀 문제가 아니고 그러면 미국이 태평양 저쪽에서 재즈곡을 들으며 평화의 꿈을 꾸고 있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 때의 일을 책임졌던 트루먼 대통령, 미국민의 여론, 그 때 유엔 기관의 여러 사람들의 어진 결단에 감사를 하지만, 미국으로서도 유엔으로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 利(이)는 의(義)다. 유엔군의 충돌은 역사의 명령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밝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덕(德)을 본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우리야 물론 덕을 입었다. 멸망을 면했으니 덕이요, 더구나 정신면에 있어서 영향은 크다. 전쟁 후 무너져가는 민심을 이만큼이라도 거두고 우리나라의 썩고 썩은 관료정신을 가지고도 그만큼 나갈 수 있는 것은 유엔군이 출동했다는데서 만이 그 의기가 고무된 점이 있다. 그렇게 우리야 물론 덕을 입었지만 그보다 뜻깊은 것은 유엔 그 자체가 그것으로 인해 강해지고 그 걸음이 확실해졌다는 사실이다. 만일 유엔이 이때에 한국 일을 모른다 했다면 미국의 신용은 물론 유엔도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지경에 떨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유엔이 장차 오는 역사를 위해 아주 완전한 것으로는 보지 않으나 이것이 내일의 세계를 낳는 산파역을 할 것을 믿기를 서슴지 않는데, 처음 일어서는 자신은 6․25에서 얻었다.
6․25의 중심 되는 뜻은 하나 되는 세계로 달리는 한 걸음이란 데 있다.
7.
국민 전체가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에서 울음으로 하는 회개말고(그것은 연극이다) 밭에서, 광산에서, 쓴 물결 속에서, 부엌에서, 교실에서, 사무실에서, 피로 땀으로 하는 회개여야 할 것이다.
누구를 나무라는 것 아니요 책망하는 것도 아니다. 나 자신을 보고 하는 말이지, 죽지 못하고 부산까지 피난을 갔던 나는 완전히 비겁한 자요, 미워하는 자요, 어리석은 자다. 거기에서 돌아와서도, 오늘까지 맛에 팔려 사는 나는, 평안을 탐하는 나는, 완전히 음란한 자요, 악한 자요, 속된 자요, 거룩을 모르는 자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말을 하는 것은 말을 파는 자요, 진리를 파는 자요, 하나님을 팔아 더럽히는 자다. 만 번 죽어 마땅하나, 오늘까지 살리신 것은 그 죄 속하라 함이 아닐까? 무슨 십자가를 거꾸로 못 박혀야 그 죄를 속할까?
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상계 1958년 8월 61호
저작집30; 5- 101
전집20; 14-109
이글은 새시대의전망(백죽문학사 1959.3) 단행본에 나온 포함되어 초판 출판.
새시대의전망(백죽문학사 1962. 재판) 1979년 책제목을 바꾸어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생각사 1979) 로 박선균님이 출판]
이상의 함석헌 선생님의 질책과 성찰과 반성의 말씀을 단 하나의 사자성어로 줄이자면 '자중자애自重自愛'가 될 것이요,이자성어로 더 줄이자면 우리는 다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름 아닌 우리 동양 선인들의 물아일체物我一體와 피아일체彼我一體이고, 우리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홍익만물弘益만萬物이며, 우리 천도교天道敎의 인내천人乃天, 곧 '코스미안' 사상이 아니랴.
이렇게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코스미안'이 되어볼거나.
자, 이제함석헌 선생님의 계시啓示와 훈시訓示 아니 고인의 유지 遺志를 받들어 최근 2021년 12월 16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글 다시 올려보리라.
[이태상 칼럼] 송구送舊 오게(오징어 게임) 영신迎新 코게(코스미안 게임) SG(Squid Game) Out CG(Cosmian Game) In
2021년 12월 8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뉴스의 현장] 칼럼 '오징어게임, 경쟁, 그리고 현실' 필자 남상욱 경제부 차장은 "오징어게임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 현실인 ‘살기 아니면 죽기’라는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며 이 '무한 경쟁 게임의 대안으로 '너와 내가 더불어 함께 공존을 모색하는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우분투 철학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러나 가야 할 길은 멀어 보인다. 한편으론 자본주의 경쟁을 비판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 경쟁에 열렬히 참여하려는 욕망이 있는 우리 현실 모순은 생각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라고 칼럼 글을 맺고 있다.
'오징어게임, 경쟁, 그리고 현실'
한류 콘텐츠 파워의 상징이 된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 지난 9월 1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면서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끌면서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오징어게임은 참가자 456명이 우승자 1인에게 돌아가는 상금 456억원을 놓고 오징어게임을 비롯한 6가지 게임을 하는 내용이다. 게임의 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승부에서 패배한 참가자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인간을 극한의 경쟁으로 내모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그 경쟁 구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들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드라마다.
오징어게임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 현실인 ‘살기 아니면 죽기’라는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게임 참가자 455명의 죽음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1명에게 456억원의 독점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지구촌 70억 인구 중 70여명의 극소수 ‘수퍼 리치’(super-rich)가 하위 35억 인구가 가진 총 재산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무척 닮았다.
오징어게임의 ‘죽기 아니면 살아남기’ 경쟁의 전형은 월급쟁이들의 꿈인 대기업 임원 되기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한국 대기업의 상징인 삼성전자의 3분기 공시에 따르면 삼성전자 임원은 총 641명이다. 미등기임원 886명 가운데 전문위원 등 연구개발(R&D) 직군을 제외한 숫자다.
전체 직원이 11만4,000여명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0.5% 가량만이 소위 ‘별’을 달 수 있다.
임원이 됐다고 해서 경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상무에서 전무로, 다시 부사장으로 승진하기 위해 엄청난 경쟁을 치러야 한다.
삼성전자에서 상무대우를 포함해 상무는 모두 428명. 전무는 129명에 불과해 4대1의 경쟁률이다. 부사장은 67명으로 가능성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현재 삼성전자 내 사장은 16명뿐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에게는 높은 연봉과 처우가 주어진다. 하지만 별을 달 수 있다는 기대감에 경쟁을 벌이다 99.5%는 소리없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죽기 아니면 살아남기 경쟁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참여하면서 계속 진행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나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왜곡된 현실 인식 때문일 것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대가에 초점을 두고 그것이 주는 유익이 마치 모든 사람들이 다 소유할 수 있는 왜곡된 현실 인식은 공정한 기회와 정당한 경쟁이라는 가치로 포장되어 다시 확대 재생산된다.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고, 돈 많이 주고 알아주는 상위권 대기업에 입사하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려 애쓴다. 상위권을 향해 끊임없이 그렇게 경쟁하며 자본주의의 왜곡된 현실 인식에 포섭되어 간다.
오징어게임에서는 경쟁에서 패배한 참가자는 곧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현실의 경쟁 구도에서는 죽음 대신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질 것이고 그 기회를 잡아 올라 갈 수 있다는 왜곡된 현실 인식이 주어진다. 경쟁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다시 치열한 경쟁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강수돌 고려대학교 교수가 쓴 ‘경쟁 공화국’에는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우분투 철학의 일화가 등장한다. 한 서구 인류학자가 부족 어린이들에게 사탕이 든 바구니를 멀리 떨어진 나무에 매달고 달리기를 해서 가장 먼저 도착한 어린이가 모두 갖는 놀이를 제안한다. 인류학자의 기대와는 달리 부족 어린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바구니를 향해 걸어가 모두 사이좋게 나눠 먹고 말았다.
이들 어린이들의 대답은 이렇다. “우분투, 네가 있어 내가 있다. 다른 애들을 두고 어떻게 혼자서만 행복할 수 있나요?”
너와 내가 더불어 함께 공존을 모색하는 인식. 무한 경쟁 게임의 대안이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은 멀어 보인다. 한편으론 자본주의 경쟁을 비판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 경쟁에 열렬히 참여하려는 욕망이 있는 우리 현실 모순은 생각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남상욱 경제부 차장>
자, 이제, 2021년이 저물고 새해 2022년이 밝아오는 이때에 희망찬 앞날을 위해 지난해 2020년 5월 14일과 지난 여름 2021년 7월 11일 그리고 지난달 2021년 11월 19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글 셋 우리 다시 한 번 더 깊이 되새겨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우린 모두 ‘우분투 ubuntu!’ 코스미안이어라>
“깨어나라. 이 시대를 버려라. 너부터 변화시켜라.”
반역자 양성소 ‘건명원建明苑: FUTURE NEW SCHOOL 인문-과학-예술 학교’의 설립자 오정택 이사장의 주문이다. 체제 순응적인 능력자가 아닌 반역자를 키우겠다는 취지에서 오정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이 사재를 쾌척해 2015년 설립된 건명원 개원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의 세대까지는 열심히 하면 밥 먹었고 남의 것 베껴서도 밥 먹었다. 그러나 30년 후 여러분의 시대는 새로운 사고, 새로운 방식이 아니면 답이 없다. 30년 전의 답을 꺼내 봐야 통하질 않는다.”
40년 전 2평 공간에서 단추공장을 시작해 수백억 원대의 재산을 모은 기업가가 미래세대를 위해 운영자금으로 100억 원을 기부하고 자신의 서울 가회동 한옥도 배움터로 내놓았다고 한다.
2015년 첫 1기로 19 ~ 29세까지 연령대 30명을 선발하는데 9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고 한다. 8명의 교수진이 10개월 동안 매주 수요일 저녁 4시간을 돌아가면서 강의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세계적인 학자를 초청해 토론하는 시간도 마련하며, 성공적으로 수료한 수강생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한 달간 세계여행 경비를 전액 지원한단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19 감염증 집단 감염 및 지역사회 확산 방지를 위하여 당초 5월 2일 예정이었던 건명원 수업 개강이 5월 30일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30년 간 상인으로 살아온 제가 인문학을 접하면서 유인원에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됐다. 한국식 교육으로는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가 태어나기 어렵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건명원을 설립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 회장이 설명하는 동기이다.
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라틴어로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사람과의 영장류 동물을 지칭하는데, 지구상의 사람을 통틀어 인류라고 말한다.
위키백과의 정의에 따르면 사람은 사람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영향을 미치려는 욕망 때문에 과학, 철학, 신화, 종교를 통해 자연적인 현상을 다루려고 한다.
인류학적으로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해부학상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가장 지배적인 견해는 아프리카 기원설이다.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진화하여 5만 년에서 1만 년 사이에 아시아에서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 유럽에서의 호모 네안데르 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의 인구를 대체하면서 이주했다는 학설이다.
최근 코스미안뉴스에 연재되고 있는 [최용완 칼럼]에선 “고구려의 음양오행은 인류의 종교와 과학의 시작이었다. 그리스와 로마에 숨겨진 우리 문화, 동이족(백제, 고조선, 흉노, 고구려)이 다스린 중국과 세계역사, 미대륙의 원주민은 우리 민족이다. 인더스 문명에 나타난 우리 문화. 이집트 문화의 근원, 홍산문화는 현대 인류 모든 문화의 시작이었다 …고인돌 문화는 인류문명의 시작이었다…동아세아는 모든 문명의 어머니 …” 등 환골탈태가 아닌 천지개벽의 새로운 학설 ‘한반도 기원설’이 제기되고 있다.
1972년 초 내가 근무하던 미국의 대학교재 전문 출판사의 전근발령을 받고 영국에 도착해서 그 당시 출시된 레코드 ‘아프리칸 상투스 African Sanctus’ 를 접하고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아프리칸 상투스는 영국의 민속음악 학자 데이빗 팬쇼 David Fanshawe (1942-2010)가 1969년부터 1975년까지 지중해로부터 빅토리아 호수까지 커누를 타고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집트, 수단, 우간다, 케냐 등지에서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아름다운 토속 음악을 녹음해 유럽의 라틴계 미사 성곡의 하모니 대위법으로 접속시켜 작곡한 13악장의 합창곡이다.
1975년 부활절에 방영된 BBC1의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특히 한 장면이 놀라웠다. 어느 한 산꼭대기 분지로 모여드는 여러 부족들이 하늘을 향해 다 함께 찬가를 부르는 소리가 그야말로 모두가 하나로 어울리는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혼연천성渾然天成의 우주적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1994년엔 팬쇼가 ‘도나 노비스 파셈 – 세계 평화를 위한 찬가 Dona Nobis Pacem – A Hymn for World Peace’란 한 악장을 더 작곡해 이 ‘아프리카 상투스’에 추가했다.
이 지구상에 아직도 미소 냉전의 유일한 잔재로 남아, 남북이 동족상잔의 대치상태인 한반도에서 뭣보다 시급히 필요로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좌파다 우파다 하는 빨갱이, 파랭이, 노랭이 타령일랑 어서 걷어 치워버리고, 지난 수 세기 동안 전 세계를 식민지화한 서구 기독교의 신본주의와 백인남성 위주의 인본주의, 근시안적 물질문명의 자본주의를 탈피하고 우주적 안목을 가진 코스미안을 양성하는 것이리라.
현재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우리 인류의 발상의 전환이 절실 절박하게 된, 이 천우신조天佑神助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다시 말해 ‘만물의 영장’ 이라고 자부하고 자만하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지구인’의 안목을 졸업하고, 우주적 비전을 가진 ‘반역자,’ 우주 나그네 ‘우주인’ 곧 ‘코스미안’으로서의 우리의 진정한 주체성을 깨닫는 일이다.
만백성이 코리아 ‘코,’ 인류의 살길 진로進路의 길 ‘로路,’를 찾아 ‘코’리아‘로’ 눈과 마음을 돌려 어서들 ‘나’오라는 ‘코스모스의 숨은 메시지 Hidden Message of the Cosmos’인 ‘코로나’가 아니겠는가.
지난 2018년 11월 4일자 코스미안뉴스 항간세설 칼럼에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앞에 언급한 ‘건명원’에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해외로 파견해 안목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겠지만 그보다는 자고로 진리는 가까이 있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 동양 선인들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깨우침인 ‘피아일체彼我一體’와 ‘물아일체物我一體’ 곧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홍익만물弘益萬物
(대한민국의 비공식적인 국시로,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라”라는 뜻으로 해석됨) 그리고 우리 천도교天道敎(동학을 계승하여 발전된 한국의 신흥 종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지구촌 온 인류에게 계몽 주지시키기 위해 앞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 DMZ에 조성될 세계평화공원 근처로 지난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평창에 코스미안 대학 설립취지문을 나는 코스미안뉴스 회장으로서 공표했다.
[격문] 변혁의 논리, 태서泰誓
코스미안대학 설립
고대 중국 하나라 걸왕에게 은나라 탕왕이 띄운 격문, '탕왕의 호소'를 빌어 아주 특별한 서약을 해봅니다.
사람들이여, 함께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지구라는 이 작은 별에 태어나 잠시 살다 우주로 되돌아갈 나그네인 '코스미안 Cosmian'이 아닌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모두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라면 너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며 결국 온 우주를 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그동안 잃어버렸거나 망각했던 우리 자신의 우주적 정체성과 본질을 깨닫고 되찾아 우리의 삶과 사랑을 나누는 일을 증진시키고자 기존 대학과는 전혀 다른 '코스미안대학'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을 바랍니다.
나이지리아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하나인 요루바Yoruba어로 강江의 여신 오슘 The River Goddess Oxum에게 바치는 찬가가 있다.
lya mi ile’ odo
Gbogbo ashe’
Obi ni sa’la’ ma’ wo’e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My mother’s home is the River
She who is omnipotent
Women who flee seeking protection, Visit her
우리말로 옮겨 보자면
내 어머니의 고향은 강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여신
보호를 받으려는 여인들은 강으로 가지
우리도 연어처럼 대양의 고향 강물을 거슬러 원점으로 돌아가리.
남아프리카 부족 중에 하나인 바벰바족 사회에는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바벰바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학자들은 이 부족을 연구하여 마침내 놀라운 이유를 발견했다.
이 마을에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나오면 그를 광장 한복판에 세운다.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모여들어 그를 둘러싸고 돌아가며 비난이나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닌 그가 과거에 했던 미담, 감사, 선행, 장점의 말들을 한마디씩 쏟아내는 것이다.
“넌 원래 착한 사람이었어.”
“작년에 비 많이 왔을 때 우리 집 지붕을 고쳐줬잖아. 고마워.”
그렇게 칭찬의 말들을 쏟아내다 보면 죄를 지은 사람은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한 명씩 다가와 안아주며 진심으로 위로하고 용서해준다. 그렇게 칭찬이 끝나고 나면 그가 새사람이 된 것을 인정하는 축제를 벌이고 끝을 맺는다고 한다.
중요한 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이런 축제를 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당장 우리 사회에 적용됐으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끼리라도 먼저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러다 보면 학교에서도, 기업에서도, 나아가 사회 전체에 적용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In the Babemba tribe of South Africa, when a person acts irresponsibly or unjustly, he is placed in the center of the village, alone and unfettered. All work ceases, and every man, woman and child in the village gathers in a large circle around the accused individual. Then each person in the tribe speaks to the accused, one at a time, each recalling the good things the person in the center of the circle has done in his lifetime. Every incident, every experience that can be recalled with any detail and accuracy, is recounted. All his positive attributes, good deeds, strengths, and kindnesses are recited carefully and at length. This tribal ceremony often lasts for several days. At the end, the tribal circle is broken, a joyous celebration takes place, and the person is symbolically and literally welcomed back into the tribe.”
- Excerpted from ‘The Art of Forgiveness, Lovingkindness and Peace (2002) by Jack Kornfield (born in 1945)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단어이지만 이 말의 의미를 우리 다 함께 깊이 음미해보리라.
‘우분투 ubuntu’는 위키피디아Wikipedia의 정의에 따르면 사람들 간의 관계와 헌신에 중점을 둔 윤리 사상으로 남아프리카의 반투어에서 유래된 말로서, 아프리카 전통적 사상이며 평화 운동의 사상적 뿌리이다. 말하자면 너 때문에 나는 두 배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이란다.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서 연구중이던 어느 인류학자가 한 부족 아이들을 모아 놓고서 게임 하나를 제안했다고 한다. 나무 밑에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싱싱하고 달콤한 딸기가 가득한 바구니를 놓고 누구든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아이에게 과일을 모두 다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인류학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 아이들은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에 손을 잡은 채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과일바구니애 다다르자 모두 함께 둘러앉아서 입안 가득 과일을 베어 물고서 키득거리며 재미나게 나누어 먹었다.
그 인류학자는 아이들에게 “누구든지 1등으로 간 사람에게 모든 과일을 다 주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달렸느냐?” 라고 묻자, 아이들의 입에서는 ‘우분투ubuntu’라는 단어가 합창하듯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란다.
“나머지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우분투ubuntu’는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로서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란 뜻이라고 한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 전前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1994-1999)이 강조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우분투!’는 그동안 어디를 가나 일등 아니면 최고를 따지는 세상에서 ‘당신이 있기에 우리 모두가 있다. 우주 만물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코스미안 사상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모두가 함께 했을 때 더 커지는 달콤한 행복을 우리 다 같이 느껴보리라. 당신이 행복하면 당신 주위에 있는 평균 5명이 그날 하루를 함께 행복해 한다는 통계도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세상이 인내천 지상천국이 아니겠는가.
우린 모두 ‘우분투ubuntu!’를 외치는 ‘우’주의 나그네 손님 되시는 ‘분’으로 아무런 흉이나 허물이 없이 깨끗한 ‘투’명한 ‘우분투 ubuntu!’ 코스미안이어라.
[이태상 칼럼] '우분투, 코스미안 정신 Ubuntu, The Spirit of Cosmian'
‘난 아프리카 소녀 I AM A GIRL FROM AFRICA: A Memoir’
지난 2021년 4월 20일 출간된 책 제목이다. 한 아프리카 소녀가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통해 인도주의人道主義에 헌신獻身, 온 지구촌에 변화를 촉발시키는 ‘심오深奧하고 상한 영혼을 치유하는 실화實話 profound and soul-nourishing memoir’라는 평을 얻고 있는 책이다.
저자 엘리자베스 니아마야로 Elizabeth Nyamamyaro는 짐마브웨 Zimbabwe 태생의 정치학자로 전前 유엔 고위 자문위원이고 남녀 성평등性平等을 위한 ‘여성을 위한 남성 발안發案 HeForShe initiative’를 창시했다.
이 책의 제목은 저자 개인의 놀라운 도전과 성취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 대륙의 여성혐오女性嫌惡와 남성주의男性主義로 인한 깊은 상처로부터 회복 가능성에 대한 비관주의悲觀主義를 극복하자는 선언宣言이다. “As Africans we must uplift each other.”
이것이 어디 아프리카인들만의 일인가. 온 지구촌 인간가족 전원 아니 피아일체彼我一體와 물아일체物我一體인 코스미안의 입장에서 우주 만물 모두가 하나 같이 다 존귀한 존재로 서로서로 존중하고 공생共生 공존共存하면서 상생相生을 도모할 일 아닌가.
2021년 4월 17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삶의 뜨락에서] 칼럼 필자 정명숙 시인은 ‘시인의 눈’이란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노인이 되면 관념의 틀 속에 살게 된다. 관념은 우리를 능수능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경이로움을 빼앗는다. 사물과 사람을 깊게 관조하지 않고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뿐 놀라워하거나 감동하지 않게 된다. 바로 감성이 기능을 멈추고 무뎌진다. 세상이 그저 그렇고 회색이 된다. 빛이 없고 활기가 없다. 일상이 단조롭고 변화가 없으면 삶의 의욕을 잃고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이때 필요한 묘약이 바로 ‘시인의 눈’이다. 시인의 눈으로 주위를 보고 느끼고 감동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이런 ‘시인의 눈’이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갖고 있던 ‘어린아이의 눈’이 아닌가. 모든 어린이는 우주의 도인道人 시인詩人 철인哲人 곧 코스미안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나이 들면 제2의 유년기를 맞아 다시 어린아이로 우리 모두의 고향 우주로 돌아간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최근년에 있어 온 무슬림 혐오증 Islamophobia에 이어 요즘에는 반反 아시아인Anti-Asian 증오범죄가 코로나 펜데믹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l(1918-2013)의 어록語錄 중 하나를 인용해보리라.
“아무도 피부색이나 출신 배경이나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도록 태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증오하도록 세뇌가 돼야 하고, 그럴 수 있다면 동시에 사람을 사랑할 줄도 알 수 있는데 이 사랑은 그 반대인 미움보다 더 자연스런 인간의 본성이다. No one is born hating another person because of the color of his skin, or his background, or his religion. People must learn to hate, and if they can learn to hate, they can be taught to love, for love comes more naturally to the human heart than its opposite.”
-Nelson Mandela, Long Walk to Freedom
검은 고라니 사슴이란 뜻의 ‘블랙 엘크Black Elk’라 불린 북아메리카 평원 인디언으로서 오그랄라(붉은 구름과 성난 말의 부족) 라코타 수어족語族 Sioux의 마법사Hehaka Sapa, commonly known as Black Elk (1868-1950)가 병든 사람이나 동식물을 위해 외던 주문呪文 가운에 이런 것이 있다.
땅 할머니시여,
내 말 좀 들으시오.
당신 품 안에서 우리는
관계를 맺고 있지요.
두 다리, 네 다리, 날개 달린 짐승,
그리고 당신 몸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 다 당신의 자손들이지요.
그러니 우리 모두다
서로 친척임을 알지요.
미대륙의 원주민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우리 한민족과 같은 몽고족이라 하지 않나. 그렇다면 단군 할아버지 아니 우리 곰할머니께 빌어 볼거나.
비나이다
비나이다
물아일체
피아일체
홍익인간
홍익만물
인내천
우주인
나그네
코스미안
동식광물
하늘과
별들과
바다와
그 속에
숨 쉬는
모든 것
숨 멈춘 듯한
무생물까지도
나 자신으로
느낄 수 있게
깨우쳐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현재 온 인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로 격리 상태에서 고립된 고독감에 심하게 외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데 다음과 같은 내 막내 조카의 어릴 적 회상이 떠오른다.
“걸음마도 하기 전 아주 어렸을 때 시골집 마루에서 혼자 뒹굴며 온종일 놀던 때가 있었어요. 엄마는 장에 가시고. 햇빛의 색깔과 촉감이 달랐어요. 아침의 햇살과 한낮의 더운 기운 그리고 저녁에 지는 햇볕의 스며드는 느낌이. 구름과 바람, 하늘과 별과 달, 새와 벌레 소리, 주위의 모든 것이 나 자신과 분리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난 조금도 무섭다거나 외롭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즐겁고 편안했어요.
또 좀 컸을 때였어요. 보리밭 옆 풀숲에 깔아 놓은 포대기에서 일어나다간 넘어지고 몇 걸음 걷다간 또 넘어지고 하면서 길을 따라 언덕배기까지 아장걸음을 했었나 봐요. 그때 내 키보다 큰 보리 줄기들이 흔들리는 것이 눈에 띄었어요. 솨-솨- 하는 바람 소리도 들리고요.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하나의 장엄한 황금나무 숲이 내 눈앞에서 흔들거리고 있었어요. 하늘과 땅, 세상천지가 다 함께 웃음소리를 내며 춤을 추는 듯했어요. 나도 한가지로 어우러져 온 우주와 더불어 흥겨웠던 것 같아요.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듣고 본 아니 체험한 대자연의 음악이며 교향시였어요. 그때 황홀했던 그 기분과 느낌은 그 어떤 말이나 글로도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요.”
아, 그러니 우리 모두 돌아가, 돌아갈거나, 원점으로, 우분투 Ubuntu 외치면서…
[이태상 칼럼] <'코스미안 게임' 창안創案을 제의提議하며 Proposing 'Cosmian Game'>
2021년 11월 13일자 미주 뉴욕 전자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발언대] 칼럼 <‘오징게임’vs.‘오징어 도박’> 필자 레베카 김은 “문화콘텐츠의 강국 대한민국, 살인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에서 비윤리적이고 문제가 되고 있는 내용들을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제작할 수는 없겠는가?”라고 이렇게 묻고 있다.
[발언대] <’오징어 게임’ vs. ‘오징어 도박’
‘게임’과 ‘도박’은 함께 사용될 수 없는, 즐거움과 파괴를 내포하고 있는 서로 다른 두 단어다.
'도박'하면 라스베가스, 홈리스, 알코올 중독, 범죄가 함께 그려진다. 이들은 육체적으로 죽진 않는다. 다만 도박으로 인하여 갖고 있는 돈을 잃게 되고 사회에서 고립된다. 개인적으로 거리에서 구걸하는 자, 공동체에서 가정을 깨는 자가 되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 ‘한탕’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일상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렵다.
반대로 ‘게임’하면 어린이같이 천진하고 순진해 보이는, 가족 친지 사람들과 친목을 도모하기위해 웃음과 화해가 함께하는 다양한 놀이를 떠오르게 한다. 게임의 정의에 대하여 위키백과는 ‘… 즐기는 놀이’, 나무위키는 ‘놀이문화의 일종으로서 스트레스 해소 수단’, 레지 피서메이 닌텐도 아메리카 사장은 ‘게임은 즐거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요즈음 넷플릭스에서 하늘로 뜨고 있는 ‘오징어 게임’이 있다. 필자는 ‘오징어 게임’은 아니지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줄다리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삔 치기’등에 대한 동심의 추억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11월3일자에 한국이 만들어낸 K팝스타 ‘BTS’와 ‘블랙 핑크’, 영화와 드라마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등을 소개하면서 어떻게 한국이 전 세계를 강타하는 문화콘텐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기사화했다. 사람들이 보고 듣기를 원하는 이야기를 충족시켜주었고, 소득 불평등과 계급 갈등에 기반한 내용으로 한국만의 감성을 더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재미교포로서 문화콘텐츠의 강국이라는 표현, 자랑스럽다.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폭력적이고, 살인적이고,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불법 장기적출… 이렇게 잔인한 플롯이 ‘오징어 게임’에 들어갔어야 했는가? 의문을 제시해본다.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은 빚에 쫓기며 삶의 벼랑 끝에 서있는, 공동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게임’이라는 순한 단어가 접근한다. 단 한 명에게 부여되는 상금 456억, 456명이 참가한다.
‘오징어 게임’은 게임이 아니고 도박이다. 목숨을 내건 도박. 게임이 도박으로 둔갑하여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오징어 게임’이 ‘오징어 도박’으로 둔갑한다. 표면상으로 ‘오징어 도박’이라 했다면 상업적으로 흥행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게임’이라는 그 단어에 쉽게 걸려든다. ‘도박’이라는 말 대신 ‘게임’이라는 친숙한 말에 사회에서 생각하는 그 불편함을 덜어낼 수 있기에, 그래도 쉽게 그 게임에 목숨을 담보로 내논다.
문제는 한사람이 이기기 위해 그 ‘한탕’ 을 갖기 위해 몇백 명이 죽어야하는, 컴퓨터에서 하는 게임이 아닌, 라스베가스에서 돈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 사람의 목숨이 날아가는 ‘살인 도박’이다. 어떤 이는 말하길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빚에 찌들려 죽기는 마찬가지, 누가 아느냐 내가 그 ‘한탕’을 할 수 있을지? 모두가 똑같은 생각으로 살고 죽는 게임에 참가한다. 이건 틀림없는 ‘게임’이 아니고 ‘도박’이다.
문화콘텐츠의 강국 대한민국, 살인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에서 비윤리적이고 문제가 되고 있는 내용들을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제작할 수는 없겠는가?
<레베카 김 뉴저지>
지구호가 뜻밖의 코로나라는 암초에 걸려 수많은 사람이 카오스로 변한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절체절명의 이 위기를 맞아 너 죽고 나만 살자는 '오징어 게임'을 우리 모두를 살리는 '코스미안 게임'으로 업그레이드upgrade 격상格上 승화昇華시켜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이 ‘코스미안 게임’이란 곧 ‘코스미안 프로젝트’를 뜻하는 것으로 지구촌 온 인류 모든 사람의 적극적인 동참을 앙망해 마지 않는 다.
코스미안 프로젝트
1. 유엔을 대체할 씨유 - 그 본부를 서울에 창설 Founding The CU(Cosmian Uniion) to replace The UN – Hosting Its Headquarters in Seoul
2. 비무장지대에 세계평화공원 조성 Building The WPP (World Peace Park) at DMZ
3. 한반도 평화통일 정당 코스미안당 창당 Founding The Cosmian Party (Peaceful Unification of Korea Political Party)
4. 글로벌 코스미안대학 평창에 설립 Founding The Global Cosmian University in Pyongchang, Korea
5 코스미안상 - 올해로 제3회째가 된 코스미안상을 노벨상을 능가하는 영예롭고 뜻깊은 상으로 격상 Sponsorship of The Cosmian Prize (the 3rd this year) eventually to surpass the Nobel Prize in honor and significance, and etc.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