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끝머리에 스쳐간 얼굴. 그래서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을 듣지 못했기에 기억할 수가 없다. 다만, 아나운서의 멘트를 통해 그가 신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말 중 기억나는 것은, “가난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가난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있고, 가난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라는 한 마디였다.
티브이를 켜고 모니터의 화면이 열리자마자 사라진 신부님. 얼굴도, 이름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그 뒤 며칠 지나 한 지인을 만나러 갔다. 오래전 만났던 화백이라 반가우면서도 서먹한 기운이 잠시 맴돌았다. 마침 그의 작품 전시가 이루어지던 터라 그림을 주제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국내 정상급의 대학(미술대학)을 나와서 중국 사천의 미술전문대학원에 유학했다. 처자식을 내버려 두고 모진 고생을 해가며 중국 각지를 다니면서 몸으로 그림을 배웠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화풍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해병 장교로 복무했을 만큼 활달한 성격임에도 그림을 업으로 선택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현한다. 특히 매력적인 것은 그의 이상향 시리즈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 잃어버린 세계를 그가 그림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그는 구속되기를 싫어한다. 잘 나가는 화랑의 전속 화가가 되기를 거부하고 홀로 고향에 내려와 고향마을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카페 책꽂이에서 그에게서 받았던 그림첩을 발견했다.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카페에서 그의 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이상향 작품은 세상이 거칠고 건조할수록 더욱 깊어만 간다고 한다.
정담을 나누고 식사를 한 뒤 돌아오는 길에 그를 버스정류장에 내려주었다. 내년 4월에 있을 전시회를 위해 동안거에 들어가겠다는 화백. 해묵은 옷을 그대로 입고 다니는 옷차림에서 광채가 났다. 그는 운전을 마다하고 걸어 다닌다. 그리고 고향을 끔찍이 생각하는 보배 같은 사람이다(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점에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내려주고 오는 길에 마른 플라타너스 잎들이 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슬슬 걸어 다녀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속도의 배반’은 이미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실 아닌가. 속도가 빠를수록 운전자는 자신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느리게 가야 주변을 눈에 담고, 자연과 사람을 품을 수 있다는 진리. 그러니 분노의 질주를 하면서 남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차보다는 자전거를 타야 주위를 둘러볼 시간적, 심적 여유를 갖게 된다. 아주 천천히 걷는다면 주변 사람과 사물에 대해 생각의 투영이 가능하다. 자연이고 사람이고 그 안에 머물러야 그 대상을 알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게 된다.
요즘은 가난해지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나의 가난은 초라하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생각이 무뎌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이전 글과 요즘의 글을 비교하면 느끼게 된다.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을 비교하면, 이전처럼 그렇게 갈급하지도, 초심처럼 절박하지도 않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글 쓰는 사람 자신은 알고 있어야 하는 사실이다. 자신 안의 변화를 가늠하지 못한다면, 뭐가 뭔지도 모르고 글을 쓰는 사람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필시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자신을 발가벗겨서 부끄러운 상황을 초래했다. 그렇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나태함과 무뎌짐을 스스로 고백하고 성찰하며 반전의 기회로 삼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정말 다시 가난해지고자 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잡생각’을 다 떨치고 홀연히 서야 한다. 거추장스런 잎을 다 떨구고 나무가 홀연히 서 있듯, 마음의 번잡함을 털고 글 맥을 찾아볼까 한다. 수고는 크고 대가는 초라한 ‘글 공장’을 지키며, 묵묵히 제 할 일 하는 작업자가 돼볼까 한다.
가난을 생각한다. 그림 한 점이 수백억을 호가하는 유명 화가도 무명 시절의 잊지 못할 가난을 품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평판과는 상관없이 그는 어쩌면 마음속에서 무명시절의 가난을 그리워할는지 모른다. 가난이 자신의 작품을 키워낸 자양분일 테니.
자작나무 숲. 한껏 뻗고 싶은 팔을 기꺼이 움츠려 가슴에 붙이고, 가는 몸통으로 촘촘히 늘어선 숲의 공동체. 찬바람을 이고 하얗게 살이 부르터 갈기갈기 찢어진 몸을 불구덩이에 던지며 자작자작, 자신을 위로하는 자작나무. 마음이 가난해지기까지 어렵다. 가난해지며 행복해지는 것이 참 어렵다. 다 비우고 세상을 떠난다는 진리를 실천하기가 힘들다. 그 경지에 이르면 평온하고 행복한 마음이 될 것이라는 ‘배반의 미덕’을 깨닫기가 참으로 어렵다.
가난의 미덕을 배우기까지 애를 써야만 할 것 같다. 가난해짐으로써 풍요로워지는 ‘배반의 미학’을 구현하기 위해 내려놓는 연습을 해봐야지. 서툰 연습을 조금씩 해나가는 것이다. 저 나무처럼, 시간이 지나 푸른 잎이 돋고, 새가 돌아와 울어내는 봄이 오리라는 꿈을 꾸면서. ‘비우면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면 풍요로워진다’는 원초적 진리를 깨닫기까지. 배반의 미덕! 가장 낮은 곳으로 와 ‘사랑과 희생’으로 가장 존귀한 영혼이 된 예수님을 떠올리는 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