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의자·41
-강에 대한 묘사와 진술
시인의 의자에 봄빛이 부서집니다. 강물에는 봄 햇살이 물비늘로 일렁입니다. 강변의 버드나무에서는 물이 차올라 가지 끝에 연두색 새싹이 봉긋봉긋 솟아올라 눈망울을 깜박거렸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시인의 의자에 앉으면 모두 시인이 되었습니다. 시가 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각났습니다. 강에 대한 시를 지으려고 하니, 시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 생각났습니다.
봄에 엉뚱하게도 가을 강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까닭은 가을을 지나 꽁꽁 얻어 붙은 겨울 강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봄빛으로 새 생명들이 일어나는 봄, 무성하게 생명의 잔치를 벌이다가 가을에 피날레를 장식하고 긴 겨울잠에 빠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강의 4계는 봄과 가을의 소생과 결실, 그리고 소멸, 겨울의 잠든 모습은 결코 각각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시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란 봄 강의 소생의 생명력을 보고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는 봄 강의 풍경 속에 숨어있는 가을 강의 결실과 쇠락의 생명력까지 보는 눈이 있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정말 좋은 시를 빚으려면 하나의 사물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모두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사물의 외형 자체만을 그린다면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단순하게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요. 사물 이면에 숨어있는 다른 사람이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을 끄집어내어 보여주는 것이 시인의 할 일이고, 그런 시가 감동을 주는 참신한 시가 아니겠습니까?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가을 강의 서정을 노래한 이 시는 가을 강의 겉모습을 위주로 화자가 가을 강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강물의 입장이 되어 관념적인 정서를 독백적으로 진술한 시이지요. 시 제목부터 ‘울음’이라는 슬픔의 정서를 타고 가는 강이라고 표현하여 진한 슬픔이 흐르는 강의 이미지가 선명합니다. 그러나 ‘타는’이라는 시어에 ‘타다’라는 의미는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올라 몸을 싣다’라는 뜻으로 이 시에서 뜻하는 의미이지요. 강물위에 ‘울음’ 이 탔다는 의미로 즉 청각적인 이미지가 촉각적인 이미지와 결합하여 진한 슬픔의 정서를 전달하지요.
또 다른 의미로 ‘타다’는 ‘불이 붙어 번지거나 불꽃이 일어난다’는 의미로 이것은 눈물이 물의 이미지인 반면 ‘타는’은 불의 이미지 이기 때문에 물과 불, 서로 상극이 만나면 소멸하고 말겠지요. ‘해질녘 울음’으로 보아 노을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후자의 불이 탄다는 소멸의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겠네요. ‘타는’이라는 의미를 어떻든 해석하고 감상하느냐에 따라 사람에 따라서 시를 받아들이는 정서가 다를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인생의 유한성, 그리고 허무감이 진한 감동으로 전해옵니다.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칠 것 같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이미지의 시와는 전혀 다르게 인생에 대한 고민과 순간순간의 갈등을 토로하는 시입니다. 결국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저마다의 인생관을 가지고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아무도 자신의 괴롭고, 외롭고, 슬픈 것들을 해결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의 의지대로 설계되고 꽃 피우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현대시에서 직접적인 정서를 표현한 ‘외로운지’, ‘괴로운지’, ‘미쳐지지 않는지’라든가. ‘애간장’, ‘치사함’과 같은 표현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초보 시인들이 상용하는 표현으로 가급적 독자에게 감정의 껄끄러운 찌꺼기를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미적인 쾌감보다는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전달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좋은 작시법이라고는 환영할 일은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시간의 이론』에서 "모든 사물은 스스로 말하고 있다. 내가 사물 대신 말하지 말라. 사물이나 상황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고 말했으나 위의 두 시는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인마다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관념이나 이념을 직접 진술하려는 경향의 시를 쓰는 시인들도 있고, 반면에 관념을 완전히 이미지로 전환하여 실제로 보이는 사물로 바꾸어 형상화로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묘사에 치중한 시를 쓴 시인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묘사와 진술의 비중이 시인마다 다르다는 것이지요.
박재삼의 「울음 타는 강」이 묘사 30%, 진술 70% 정도쯤 된다고 가정이 되고,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한다면,”구절에서와 같이 ‘마음’이라는 관념을 이미지로 전환하지 않고 그대로 진술하고 있으며, 황인숙의 「강」은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등의 구절에서 구체적인 사물로 시각화했을 정도이니까 묘사 10%, 진술 90% 정도쯤이 되고, 관념을 그대로 진술하고 있네요.
강·2
박두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강물은 숲에서 나와 흐르리.
비로소 채색되는 유유(悠悠)한 침묵
꽃으로 수장(水葬)하는 내일에의 날개짓.
아, 흥건하게 강물은 꽃에 젖어 흐르리.
무지개 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일체의 죽은 것은 떠내려가리.
얼룽대는 배암 비늘 피발톱 독수리의,
이리 떼 비둘기 떼 깃죽지와 울대뼈의
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全身)
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 몸짓.
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
강 흐름 핏무늿길 바다로 간다.
이 시에는 관념을 되도록 사물로 대체하기 위해 ‘날개짓’, ‘무지개 피’, ‘짐승 울음’, ‘피몸짓’, ‘배임 비늘’, ‘깃죽지’, ‘핏무늬길’ 등 감각적으로 시각화하려 했고, 진술과 묘사를 뒤섞어서 묘사 50%, 진술 50% 정도로 강에 대한 소재의 시를 형상화했으나 ‘유유(悠悠)’, ‘침묵’, ‘수장(水葬), ’전신(全身)‘ 등의 한자어의 표현에서 관념의 뼈대를 드러내 비극적인 민족의 전쟁상황을 동물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강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이나 고독감, 황폐한 상황을 그려내려고 했으나 관념의 표현은 그 의미의 범위가 너무 넓은 관계로 공감을 얻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위의 시들은 우리 시인들이 시를 쓰고 있는 일반적인 작시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관념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념적인 진술로 일관하는 시는 독자에게 전달하는데 주관적인 정서가 객관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오래 기억되는 명시가 될 소지가 적은 편이 되는 것이지요.
시인의 의자에 앉았다 간 많은 시인들이 대부분 이런 직접적인 정서를 노출하거나 관념의 찌꺼기들을 그대로 노출하는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시는 녹조류가 낀 강의 상태라고나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모래알을 셀 수 있을 정도 맑은 강물과 같은 시는 아무래도 묘사 70%, 진술 30% 정도 이상의 시로 묘사를 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봅니다.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김관식 kks419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