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기세가 매섭다. 영하의 날씨를 뚫고 실내로 들어온 햇살이 포근히 곁에 머물고, 간만의 늦잠으로 마음의 고삐도 푼다. 아침을 여유 있게 하면서 음악 좌담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낯익은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가슴에 와닿는다. 1970년대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수 정미조의 노래. 그녀가 ‘백투더뮤직’에 나와 기억을 소환한다.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등의 노랫말 가사를 떠올렸다. 예전에 노래를 들으며 따라 하기도 했지만, 가수가 누구인지 제목이 무엇인지 신경 쓰지도 않았었다. 그저 마음 한구석에 여운이 남고, 애틋한 서정이 가슴에 남았기에 가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 그 노래를 들으니 정겨운 노랫말이 가슴에 여울 짓는다.
https://youtu.be/UJSnNkYrfH0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이 노래는 김소월의 시를 작곡가 이희목이 작곡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한 편의 시가 음악의 옷을 입고 애잔한 마음을 승화시켜 명곡으로 탄생했다, 김소월의 시가 애환의 서정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듯. 노래를 들으며 어릴 적 개여울을 바라보던 기억을 떠올린다.
조용한 산골 마을. 경기도의 외진 한 읍에서 십 리를 걸어 들어가면 조부 댁이 있다. 덜컹거리며 산길을 굽이돌던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구토를 참지 못하고 속을 비워냈다. 시외버스 특유의 고약한 냄새. 주위 승객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뿜어내던 야만스러운 담배 연기. 짐과 사람을 싣고 내리는 어수선함. 촌로들의 가릉 거리는 기침 소리. 비포장 길 위를 투박하게 질주하는 타이어의 신음. 이런 최악의 여건을 견뎌내고 발을 딛는 시골은 어린 눈에도 청정자연 그대로였다.
모친의 손을 잡고 골을 따라가며 흙길을 걸어 도착하는 곳.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선 한 가운데에 마을은 포근히 자리해있다. 십여 채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맨 앞에서 조부 댁은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는다. 대부분 집이 그렇듯, 주춧돌을 괴고 올라선 단출한 집 앞으로 너른 마당이 있고, 조금 떨어진 헛간을 따라 외양간과 계사, 그리고 뒷간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분뇨는 빗물과 함께 자연스럽게 울타리 밖으로 흘러나간다.
집과 바깥을 구분 짓는 것은 싸릿대와 덤불 가지로 얼기설기 엮은 나무 울타리. 울타리란 결국, 관목 중간마다 나무 덤불을 끼워 넣어서 담의 구실을 하지만, 닭과 개 그리고 심지어 개구리 뱀까지 자유롭게 드나드는 느슨한 안과 밖의 경계였다. 사립문은 양쪽에 지렛대 역할을 하는 굵은 기둥에 몸을 의존한다. 잔가지를 엮어 맨 수평의 기다란 장대를 기둥에 기댔다가, 출타 시 회전시켜 다른 기둥에 기대어놓는다. 도심의 주택이 견고한 담과 철문으로 외부와 단절된 견고한 성이라면, 시골의 집은 누구나 맘 편히 드나드는, 심지어 동물들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느슨한 삶의 경계를 보여준다. 뒤뜰에는 이끼 가득한 받침돌 위에 크고 작은 장독들이 무질서한 가운데 나름의 질서를 통해 늘어서 있고, 좌우 양쪽으로는 커다란 배나무와 밤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더없이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앞 텃밭에 딸기를 심으셨다. 십리 길을 걸어서 마을 안에 들어서면, 마을 초입에 빨갛게 익은 딸기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밭 아래로 방죽을 지나 울타리를 돌아가면, 작은 물줄기가 굽이굽이 돌아가는 실개천이 나타난다. 언젠가 마을을 벗어나 길을 따라가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빨랫감을 한 보따리씩 이고 와서 편평한 돌 위에서 신나게 두들기고 있었다. 또 언젠가는 어머니가 홀로 말없이 빨래하고 계셨다. 듣자 하니, 갓난아기였을 때 아버지는 입대하셨고, 시댁에 와 있던 어머니는 그 돌다리 위에서 수없이 빨래하셨다고 한다. 그 개여울에서 빨래하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영원히 곁에 계실 것 같더니만 홀연히 떠난 어머니. 훗날 천국에서 뵈면 꼭 여쭙고 싶다.
개여울은 지금도 흐르고 있을까. 평온한 들판 한구석을 말없이 흘러가던 개울. 인기척이 나면 소란스레 물로 뛰어들던 개구리와 수초 속으로 숨어들던 물고기의 포근한 안식처. 비 오는 날 사나운 황토물이 물풀을 고꾸라뜨리며 안개 속으로 짙은 흙냄새를 퍼뜨리던 그 개울은, 논두렁을 지나온 발의 물때를 씻어주고, 구겨진 빨랫감을 수없이 내리치는 방망이의 열기를 식혀주며 차디찬 물줄기를 흘러내렸다. 화창한 날 돌다리를 지나던 물은 햇살에 아롱지며 그림자를 풀어 내렸다.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개여울에서 하던 고기잡이를 돌아보니, 물속 돌을 쿵쿵 구르던 발을 멈추면 흙탕물 아래로 비늘을 반짝이며 은빛 물고기가 드러났다. 너도나도 햇볕에 가맣게 된 손으로 족대에서 퍼덕거리는 버들가지, 돌마자 등을 건져 종다래끼에 신나게 담곤 했다. 미디어가 번뜩일 때마다 봉인된 은밀한 사실들이 부유(浮遊)하는 이맘때고 보면, 물질과 자본과 권세로 얼룩진 탁류의 거센 물살을 추억이 깃든 개여울의 돌다리를 건너면서 잊고 싶어진다.
며칠 뒤면 설을 맞는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랑의 공동체를 확인하는 시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갈라놓았던 시간을 위로하며 채우는 소중한 머무름이 될 것이다. 한겨울 개여울엔 빨래터에서 피어난 김이 얼어붙은 개천을 따라 낮고 길게 퍼졌고, 나목(裸木)에 앉은 한 마리 새가 눈 덮인 들판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마음의 개여울에 나와 계신 어머니,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 박사
신연강 imilto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