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년째로 들어서는 코로나 팬데믹은 인류의 역사를 코로나 전 세상과 후 세상을 확실하게 구별 짓게 될 것이다. 아직 코로나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음에도 밀려오는 세상의 변화가 숨가쁘게 다가온다. 코로나 전 세상의 저변에 깔려있던 디지털 기술이 비대면의 상황에서 용솟음쳐 올라와 우리의 일상으로 치고 들어앉았다. 이 변화는 점점 더 가시화되고 가속화되어 코로나가 종식되고 얼마 후 또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가 인류사회를 덮친다고 하더라도 인류는 이번에 배운 비대면의 기술로 이어져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1940년 이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그 인구수와 함께 대륙의 메뚜기처럼 주변 환경을 싹쓸이하듯 바꾸면서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또 통신 기술의 혁명으로 기후 위기를 불러왔고 자본주의가 먹여주는 빠르게 발달하는 기술로 인류는 자연과 떨어진 아니 자연을 지배하는 생활 습관을 지속해 왔다. 팬데믹과 인류 최악의 기후재앙을 해마다 겪으면서도 계속 기술 기반의 문명은 가는 데까지 가 보고야 말 듯하다.
현 베이비붐 세대들은 그들의 생애 동안 역사의 전환점을 몇 번 돌아 돌아왔다. 산업혁명과 대공황, IT 혁명, 닷컴버블에서 팬데믹 그리고 이제 인터넷 3.0 시대. 고속 고접촉의 5G 기술과 함께 3D의 가상공간에서 VR/AR 기기와 입는 피부나 옷 같은 것을 착용하고 온몸으로 느끼고 냄새 맡고 만지면서 아바타로서 다른 아바타들과 사회생활, 문화 활동, 경제생활을 하게 되는 메타버스의 세상을 경험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늑장이지만 정부들도 이 대세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신문을 언뜻 봤다. 작년 신문인데 순천향대학의 입학식을 최초로 메타버스에서 한다는 기사이다. 2,500명의 신입생은 학교에서 지원한 VR 헤드셋, 신입생 길라잡이, 총장 서한, 방역키트 등의 웰컴 키트와 스폰서에서 제공하는 점프 어플을 실행해 본인의 개성을 십분 살린 아바타를 꾸민 후 입학식에 입장했다. 본교 대운동장과 비슷한 가상의 대운동장에서 입학식을 마친 후 그들은 총학생회가 준비한 캠퍼스 튜어, 대학 생활 안내, 같은 과 신입생과 재학생, 담당 교수들과 ‘아바타로 자유롭게 상견례를 나누기도 하였다’고 한다.
장자의 胡蝶之夢 (호접지몽)이 생각난다. 장자(莊子)의 내편(內篇) 두 번째 장 제물편(齊物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어 진실로 유쾌하고 마음에 맞아 따라가다 보면서 나비로서 생생한 경험을 한다. 진정 자신이 나비라고 생각했지만 꿈을 깨어보니 놀랍게도 자신이 장자(장주)이더라는 것이다. 꿈을 깨고 나니 자신이 진짜 나비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내용이다.
장자의 이 질문이 절실해진다. 나는 누구인가? 메타버스에서 온종일 보내고 잠자리로 들어가면서 나는 누구인가? 아바타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장자는 만물이 변한다고 한다. 그럼 나비가 변하여 사람이 될 수도 있을까? 인공지능도 진화를 거듭하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장주(장자)와 나비는 반드시 다름이 있다’고 했다. 그 다름은 무엇인가?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이 두 개의 질문을 가지고 전 생애 동안 처절하게 싸운 사람은 니체라고 생각한다. 그 훌륭한 업적이 생애를 통하여 따라다니는 몹쓸병에 시달리면서 그 질문에 매달려 고뇌한 것을 알게 되면 니체라는 그 이름 앞에서 숙연해진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심한 근시였고 자라면서 머리와 눈에 통증을 느끼고 청년 때에는 가벼운 마비증과 신경매독, 그리고 군복무 중에 낙마해서 가슴을 다쳤고 그 후에는 이질과 두통, 우울증, 소화장애에 시달렸다. 결국 1897년에는 건강 때문에 바젤대학의 고문학 교수직을 사퇴하고 알프스의 작은 마을로 돌아다니며 운둔생활을 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 생애의 마지막 10여 년은 자신을 잃어버린 조현병으로 여동생의 돌봄에 의지하다가 사망했다.
그의 업적은 당시에 만연한 기독교적인 가치관인 내세(來世), 몸과 영혼의 이원론 등 일체의 관념론적 형이상학을 깨부수는 '망치를 든 철학자'로서 현상의 기존 가치체계를 부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자로 살아갈 것을 강조하는 실존철학의 개념을 확립했다. 그의 유명한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참된 실존은 ‘초인’ 혹은 ‘극복자’라고 해석할 수 있는 ‘위버멘쉬’로 향한 창조적 여정이라고 한다. “만약 신들이 있다면 내가 창조자로 살아갈 수 없다. 신들은 나를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들은 없다”고 한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인 기독교 집안의 장남이었다.
그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의 정신이 잠깐잠깐 돌아올 때 썼을 것으로 상상되는 잠언 같은 경귀로 된 책이다. 그의 책 속에 남긴 절규 같은 인간의 참 모습은 그 자신의 시대를 향해 외쳤지만, 오히려 오늘 우리 가슴속을 더 절실히 파고든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외의 것은 아니다. 몸이 정신의 전체이며 정신이 거주하는 집이며 그게 바로 ‘나’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터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위버멘쉬요,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인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극복자라는 뜻의 위버멘쉬를 소개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뒤에 존재하는 막강한 통치자가 있는데 그 알려지지 않은 현자의 이름은 ‘자신自身’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현자는 그 사람의 몸에 거주한다고 한다. 위버멘쉬는 어떤 외부의 모델이 아니고 나, 자신(自身)이라는 현자의 말을 들으며 대지의 삶을 사는 건강한 몸으로 어린아이의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으로 향해 가는 여정이라고 한다.
휴대폰에 오만 가지 앱이 다 들어오면서 스크린타임이 우리의 24시간을 잠식하고 있다. 신문과 책, 문서가 다 스크린 속에 들어갔다. 대화도 만남도 스크린으로 들어갔다. 곧 스크린은 가상세계 메타버스 세상이 되어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아바타로서 살게 될 수도 있다. 장자가 안다면 이것을 아바타지몽(아바타之夢)이라고 할까?
포스트 팬데믹 시대는 나노시대일 것이라고도 한다. 사회적 힘의 주체가 가족, 국가, 사회의 단체가 아니라 개개인이라는 뜻이다. 메타버스 세상에선 한 개인이 은행이나 다른 브로커 같은 중간매개자 없이도 누구나 직접 제품도 팔고 사고 홍보하고 방송하고 발표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됨을 말한다. 우리가 인공지능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무서워해야 할지 모른다. 나노시대의 한 개인은 그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과 가족과 인류에 막대한 파괴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지적해 준 우리 지성과 감정 뒤에 서 있는 막강한 통치자 ‘자신自身’이라고 부르는 현자(賢者)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진다. “가장 조용한 말들이 폭풍우를 불러온다.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생각들이 세계를 운전한다. (짜라투스투라 …). 일주일에 하루는 셀폰을 집에 두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자. 그래서 현자의 ‘가장 조용한 말들’,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생각들’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비와 아바타속에 숨어 있는 “나”를 찾기 위하여.
[김은영]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석사
오크라호마주립대학 박사과정
시납스인터내셔날 CEO
미국환경청 국가환경정책/기술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