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의자·47
-장수말벌의 증언
시인의 의자 부근에 가끔 장수말벌이 앉았다 갔습니다. 장수말벌의 집을 노봉방이라고 하여 통째로 술을 담가서 노봉방주라 하여 민간요법의 약제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과 본초강목의 기록에 따르면, 노봉방주의 효능은 피로회복이나 당뇨, 간질, 경기, 정력증강에 효과가 있고, 도한 신경통류마티스관절염, 천식과 불면증, 중충, 심혈관 고혈압 뇌질환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장수말벌이 시인의 의자에 잠시 앉았다가 가면서 증언한 기록으로 지은 김관식의 글 「장수말벌의 증언」을 소개해드립니다. 무섭고 살벌한 느낌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장수말벌의 증언
우리는 모두가 장군의 자손들이다. 여왕님을 모시는 특공무술 경호장수들이다. 우리들은 꽃을 찾아다니며 열매를 맺도록 뚜쟁이질 하고, 대가성 꿀을 얻어가는 뒷거래를 하지 않는 것을 생활신조로 살아왔다. 우리는 당당하게 꿀벌이 모아놓은 꿀을 거둬들이는 세리들이다. 따라서 꿀벌들은 우리들을 위해 존재하는 줄로 알고 살아왔다. 만약 우리들이 하는 일에 반항하는 꿀벌들은 모가지를 물어뜯어 즉시 처단했다. 떼 지어 몰려들면 우리 장수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즉각 전쟁을 선포하고 꿀벌집으로 쳐들어가 초토화시켜버렸다.
우리들은 항상 꿀벌들이 살고 있는 마을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아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으슥한 곳에 지하궁전을 짓고 살았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집 뒤뜰 나뭇가지 위에 둥근 달덩이 집을 매달고 살았다. 배고픈 날 우리들은 가끔 인가의 꿀벌집을 습격했다. 그러다가 꿀벌을 치는 주인의 포충망에 우리 장수들이 죽어갔다. 그런데 꿀벌치기 주인은 우리 장수들의 사체를 소주 병 속에 넣어 보관했다. 인간들의 잔인함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작년에는 우리 동족들 모두가 몰살당했다. 얼멍얼멍한 모기장 자루 외 비닐봉지로 통째로 우리 집을 덮어 씌어 가져갔다. 나 혼자만 밖에 나갔다 돌아온 통에 겨우 살아남았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꿀벌 주인집 부엌을 지나가다가 통째로 유리관에 들어있는 우리 집을 보았다. 술을 부은 유리관 위에 노봉방주라고 써 붙어 있는 푯말을 보았다.
집단학살 현장을 여왕님께 보고했다. 여왕님께서는 우리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라고 했다. 우리 장수말벌들은 동족의 노봉방주 집단학살 현장을 배회하면서 앙갚음을 다짐했다 그 뒤로 수시로 꿀벌집 주위를 서성거리며 시위를 벌렸다. 그러다가 주인이 한눈판 사이 꿀벌집 앞에 웅크리고 기다려서 꿀을 물고 돌아오는 꿀벌을 하나씩 물어 죽이고 꿀을 빼앗았다. 틈나면 꿀벌통 주위를 맴돌면서 꿀을 모두 훔쳐냈다. 그러다가 우리들은 정말로 우리들보다 더 악랄한 낯두꺼운 두꺼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느 날 우리들이 꿀벌통 문 앞에서 꿀벌들을 물어 죽이고 있을 때 엉금엉금 두꺼비가 다가왔다. 살갗이 우둘투둘 보기 흉하게 생긴 두꺼비가 꿀벌통 문 앞에서 꿀벌을 잡아 죽이고 있는 우리들 곁으로 몰래 기어 오더니, 순식간에 우리 장수들을 혓바닥을 날름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떼거리 달려들어 두꺼비를 공격했다.
그때마다 두꺼비는 두 눈을 껌벅거리며 혀를 날름거리더니, 우리 장수말벌들을 하나씩 삼켜버렸다. 그날 우리들은 날아다니면서도 기어 다니는 두꺼비에게 몰살당했다. 세상에는 나는 놈 위에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두꺼비가 있다는 것을 죽는 순간에 알았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속담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나는 놈 위에 기는 놈의 날름거리는 혀가 있었다. 못생기고 엉금엉금 온몸에 독기를 품고 기어 다니는 두꺼비, 날름날름 혀 놀림은 날아다니는 우리들보다 더 잔인했다.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김관식 kks419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