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낯선 갤러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폭의 그림 앞에서, 나는 숨 막히는 감동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다. 팍팍한 삶 속에서 한 편의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며, 또는 무대 위의 이야기를 통해 잠시나마 현실의 무게를 잊고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예술은 그렇게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을 들여 튼튼한 나뭇가지와 무성한 잎사귀를 피운 뒤에야 비로소 맺어내는 ‘과실’과 같다.
단조롭고 메마른 삶에 다채로운 색채를 입히고, 생명력 가득한 존재로 우리를 채워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본질적인 가치이다. 우리는 이토록 고귀한 가치를 마음껏 누리지만, 과연 그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많은 예술가가 숭고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소식들은 예술의 가치를 논하는 우리 사회에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예술은 왜 굶주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 중 하나는 빈센트 반 고흐이다. 오늘날 그의 「별이 빛나는 밤」은 인류가 사랑하는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며, 우리는 이 그림 앞에서 밤하늘의 경이로움과 화가의 뜨거운 영혼을 느끼며 황홀경에 젖어든다. 하지만 이 눈부신 작품을 그렸던 그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다. 밀려오는 생활고와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밤새도록 별을 그렸던 그의 삶은, 우리가 작품을 통해 얻는 감동과 예술가 개인의 현실 사이에 놓인 극명한 괴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우리가 열광하는 화려한 ‘결과물’ 뒤에는, 대중에게 ‘보이지 않는’ 고통과 무관심 속에 잊힌 예술가의 비참한 삶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삶이 던지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예술이라는 풍요로운 과실을 기꺼이 맛보고 찬양하면서도, 정작 그 과실을 맺어내는 나무의 뿌리와 줄기, 즉 예술가 자신을 보살피는 데는 너무나 인색한 모습을 보인다.
예술은 단순히 장식적인 부수물이 아니다. 인간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는 산소이자, 삶의 의미와 방향을 끊임없이 탐구하게 하는 철학적 매개체이다. 때로는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하는 거울이 되며, 때로는 굳게 닫힌 사유의 문을 열어젖히는 열쇠가 된다. 역사 속 위대한 예술가들은 시대의 고뇌를 치열하게 사유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인류의 의식과 감성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이끌어 왔다. 그들의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는 불변의 메시지를 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선사한다. 이처럼 예술은 인간다움을 완성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숭고한 가치에 대한 믿음을 비웃듯 가혹하다.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은 고흐처럼 붓과 물감을 내려놓고 생계를 위한 또 다른 ‘일터’로 향한다. 처음에는 눈빛을 반짝이며 "예술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외치던 그들의 열정은, 끝없이 밀려오는 재정적 압박과 사회의 무관심 앞에서 조금씩 꺼져간다. "밥이나 굶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예술계에 만연한 현실은, 문화 선진국을 자처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수많은 예술가가 ‘예술’과 ‘생계’라는 두 갈래 길 앞에서 고뇌하다 결국 꿈을 포기하고 만다. 더 나아가, 극심한 생활고와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안타까운 소식들은 이러한 사회적 무관심과 구조적 모순이 빚어낸 극단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의 고통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영혼의 풍요를 얻고자 하는 사회 전체의 정신적 빈곤을 보여주는 뼈아픈 징후이다.
이제는 예술의 가치를 말로만 숭상할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삶과 생존을 구체적으로 지지해야 할 때이다. 예술가들에게 충분한 경제적 안정과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을 돕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토양을 비옥하게 가꾸는 가장 현명한 투자이며, 미래 세대가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을 풍요롭게 만드는 지혜로운 행동이다.
재능 있는 청소년과 청년 예술가들이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신의 빛나는 재능을 포기하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드는 책임이자 특권이다.
생활고로 스러져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안타까운 소식은 우리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이다. 우리는 예술이 더 이상 굶주리고 고통받지 않도록, 메마른 영혼의 비명이 잦아들도록, 그리고 온전히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채워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예술은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우리가 지켜낼 때 비로소 우리를 지켜줄 것이 분명하다. 이 시대에 예술을 지켜내는 일은 곧 인간성을 지켜내는 일이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가장 강력한 희망의 씨앗을 심는 일이다.
[홍수민]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재학.
'제7회 코스미안' 인문칼럼 대상
'행복울주를 담다' 수필 부문 우수상
'2025 동대문구 문예공모전' 시 부문 우수상
2021년 서울시 동대문구청장 지역사회공헌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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