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형 칼럼] 죄 많은 어머니? 복 많은 할머니!

하진형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자칫 지나칠 뻔했다. 겨우 조금 올랐던 낮 기온이 땅거미와 함께 떨어지는 겨울 초저녁은 온통 검회색이다. 겨울 땅이 그렇고, 사람들의 옷이 또 그렇고 초저녁 어둠이 그렇다. 서재 겸 농장에서 일을 마친 후 사립문을 닫고 나와 도로로 진입하는데 맞은편의 버스 정류소 팻말 아래에 시커먼 물체가 움직인다. 가까이 가보니 작은 손수레와 큰 보자기를 곁에 두고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차창(車窓)을 내리고 모친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내는 저 안쪽으로 갑니다. 말만 해도 고맙습니다. 버스 곧 올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날도 많이 어두워졌는데.”, “, 버스 시간 다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태워드리지도 않았는데 고맙습니다를 연거푸 하셨다.

 

차를 몰아 가로등이 있는 곳으로 나오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차 몰고 다니다가 버스 기다리는 할매들 보이면 꼭 태워드리게, 쪼깨(조금) 돌아가더라도. 사람은 늘 덕()을 쌓아가며 살아야 한다네.’

 

차를 돌렸다. 초저녁 가로등도 없는 길에 할머니를 혼자 계시도록 한 것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할머니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가슴 속에서 토해져 올라왔다. 다행히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셨다. “모친, 차에 타십시오. 제 마음이 불편해서 돌아왔습니다.” “아이구, 고맙게시리. 이왕 그러면 이쪽으로 가서 27번 버스 타는 곳에 좀 내려주시오.” “아까 저 안쪽으로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반대쪽으로 가신 다니오?”

 

할머니는 시내버스와 마을버스를 환승하여 20여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집안 친척 소유의 밭에 농사를 짓고 있는데 환승하여 오다 보면 한 시간 이상 걸린단다. 거기다가 마을버스는 거의 3시간에 한 대꼴로 다녀서 오늘은 3시 반 차를 놓쳐 640분 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차를 태워준다고 하니 차가 자주 오고 집으로 빨리 갈 수 있는 27번 버스를 타면 저 안쪽으로 가서 돌아 나오지 않아도 되니훨씬 좋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농사 도구를 뒷좌석에 싣고 초저녁 길을 천천히 운전해 간다. “저기 저기가 27번 차 서는 곳입니다. 저기 내려주세요. 고맙습니다.”, “모친, 제가 회원동 가깝고 차 많은 곳에 내려 드릴게요.”, “아이구, 그리 고맙구로요.”

 

차의 속도를 늦추며 할머니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나이 마흔에 할아버지께서는 농약 중독으로 돌아가시고 아들 넷을 홀로 키우셨단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정신이 없었지만 자식들 공부는 꼭 시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셨다. 할머니는 말씀 도중에 한숨을 내쉬기도 했는데 그 한숨 속에는 모진 풍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죄가 많아서 아들만 넷인데 남의 영감질 안 하고 열심히 일하면 자식들 공부는 충분히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듭디다. 낮에는 남의 일 해주고 내 농사는 늘 밤에 지었지요. ~~” 또 한숨을 몰아 쉬셨다.

 

그런데 지금은 아들들이 장성하여 서울에서 잘살고 있고, 막내 손자는 서울대학을 일등으로 졸업하여 무슨 반도체라는 곳에 들어 간다쿱디다.” “아이구~ 축하드립니다. 그 모든 것이 모친께서 덕을 많이 쌓아서 자식 손주들이 복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이구~ 아저씨는 말도 우찌 그리 이삐게 합니까? 고맙습니다.”라시며 또 고맙다는 말을 하신다.

 

그래도 요즘은 이웃들이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해줘서 복도 조금은 있는 모양입니다.”라시며 수줍게 웃으신다. 그야말로 자신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일을 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식들도 열심히 자랐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 이치니까. 할머니께서 살아오신 얘기를 듣고 자란 손주들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80세를 넘긴 할머니의 말씀에 취하여 차의 속도를 더욱 늦추었다. 버스 정류소를 계속 지나치자 여기부터는 회원동으로 가는 버스가 많다시며 내려 달란다. “끝까지 태워다 주면 내가 미안해서 안 돼요.” 고마움과 배려심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면 할머니 조금 더 가서 회원동 버스가 더 많은 곳에 내려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농장에서 또 뵙겠습니다.”

 

차를 대로변 정류소 앞에 세우고 뒷좌석에서 작은 손수레와 보자기를 정류소에 가져다 놓고 오니 할머니가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다. 좌석 안전벨트를 풀지 못해 매달려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들이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어머니라는 올가미를 놓아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버스에 물건을 올려 드리자 좋아하시며 손 흔들고 가시는 할머니. 부디 건강하십시오.

 

버스가 앞서 떠나고 천천히 집으로 향한다. 사양하셔도 끝까지 태워드릴 것을 괜한 아쉬움이 몰려온다. 그래도 지하의 어머니께서는 칭찬해 주실 것이다. ‘자네~, 참 잘했네.’ 죄 많은 어머니가 아닌 복 많은 할머니 덕분에 나의 어머니에게 칭찬받은 무척 기분 좋은 날이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행정안전부 등록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

 

작성 2022.02.18 11:51 수정 2022.02.1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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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