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애천황의 아버지 일본무존(日本武尊)이 바로 구형왕(仇衡王)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가야국 구형왕(仇衡王)이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할 때 세 왕자를 데리고 함께 왔다고 하며 그 세 왕자의 이름을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 또는 ‘세종(世宗) 무도(茂刀) 무득(茂得)’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첫째 왕자는 노종(奴宗) 노리부(弩里夫) 혹은 세종(世宗)이라고도 하였으며, 다른 기록에는 ‘노부(奴夫), 내례부(內禮夫), 내부(內夫)’라고도 하였다. 이는 모두 [놀부/norbu]라는 이름을 음차 또는 훈차(진의훈차, 사음훈차)하여 표기한 것으로, 차자표기된 이름을 분석해 보건대 이들이 모두 동일인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고사기』 윤공천황단에는 김파진한기무(金波鎭旱紀武)라는 신라 의원의 이름이 실려 있는데, 김기무(金紀武) 역시 [노리부/noribu]를 표기한 것으로 동일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셋째왕자의 이름은 『삼국사기』에는 무력(武力)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무득(茂得)으로 되어 있다. 일본어에서라면 [타카치카라] 또는 [시게에루] 비슷하게 일컫는 이름을 그렇게 적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도대체 뭐라고 부른 이름을 그렇게 차자하여 표기한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첫째왕자와 셋째왕자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각종 문헌들에 그 이름이 실려 있을 뿐 아니라 신라인으로 편입된 후의 활약상도 기록에 남아있는데, 둘째왕자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왜 그럴까? 의문이 들 만큼 둘째왕자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일본서기』에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중애천황)은 일본무존의 둘째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2세기 후반에 일본의 천태종 승려 현진(顯眞)이 쓴 『산가요략기(山家要略記)』에도 중애천황이 일본무존(日本武尊)의 둘째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추찰해 보면 일본무존의 둘째아들 중애천황이 곧 구형왕의 둘째왕자 무덕(武德)과 동일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무존의 이름은 소대존(小碓尊)인데, ‘소대(小碓)’는 [코우스/kous]라 일컬었던 이름을 일본식으로 차자하여 적은 것이고, 이는 곧 ‘구형왕(仇衡王)’과 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구형왕의 이름을 ‘구해(仇亥)’ 또는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했다고 써 놓았는데, 이는 [쿠쉬/koushi] 정도로 일컬었던 이름을 음차하여 적은 것이다. 지금도 경상도 방언에서는 [힘/심] [향나무/상나무] [형님/성님] 등에서 보듯 [ㅎ/ㅅ] 음이 넘나들고 있다. ‘구형’을 [구서이, 구세이]처럼 발음하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측의 각종 문헌에 ‘백제 귀수왕(貴首王)’ 혹은 ‘구수왕(仇首王), 구소왕(久素王)’이라고 되어있는 이름은 바로 이 구형왕 즉 일본무존을 가리킨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졸저 『임나의 인명』 ‘3-5) 수인천황(垂仁天皇),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일본의 제11대 ‘수인천황(垂仁天皇)’은 [타라어지/taruchi]라 일컬었던 이름을 일본식으로 차자표기한 것으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구형왕의 동생 ‘탈지이질금(脫知尼叱今)’과 동일한 이름이다. 垂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드리우다’이고 일본어는 ‘타라스(たらす), 타레루(たれる)’이며, 한자 仁에 해당하는 한국어가 ‘어질다’이다. [타라어지/taruchi]를 일본어에서 ‘수인(垂仁)’이라고 차자(借字)하여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구형왕의 손자 솔지공(率支公)은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 가츠라기 소츠히코)과 동일인으로 추찰된다. 졸지공(卒支公)과 습진언(襲津彦; 소츠히코)의 이름이 같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믿는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졸저 『임나의 인명』 ‘2-8) 습진언(襲津彦), 사지비궤(沙至比跪)’를 참고하시기 바라고, 이를 토대로 중애천황의 계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애(仲哀)’와 ‘가실(嘉悉), 가수리(加須利)’는 [가슳/kasur]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차자방식만 달리하여 적은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만 ‘무덕(武德)’ 혹 ‘무도(茂刀)’는 뭐라고 부른 이름을 그렇게 적은 것인지 알기 어렵다. 한국어의 관점에서도 그러하고 일본어의 관점에서도 그러하다. 얼른 보기에도 무덕(武德) 무도(茂刀)가 [가슬/kasur]이라는 이름을 차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친인 일본무존 ‘소대존(小碓尊; 코우스)’과 ‘구형왕(仇衡王)’의 이름이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건대, 그 둘째아들이라는 ‘무덕(武德)’과 ‘중애(仲哀)’천황도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할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중애천황은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한 가야국 구형왕(仇衡王)의 세 아들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 중에서 둘째왕자인 무덕(武德)과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 구형왕을 따라 신라에 들어가 항복한 게 아니라 혼자 남아서 신라에 저항해 싸운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기 532년 구형왕이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했다고 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며, 둘째 왕자 [가슬/kasur]은 항복하지 않고 신라에 맞서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다. 그 둘째 왕자가 바로 중애천황이요, 그의 아내가 신공황후라는 얘기다.
중애천황의 실제 재위연대는 533년~540년이고 신공황후는 541년~569년 정도로 추측되는 바, 앞으로 더 이상 신공황후가 300년대 후반에 한반도 남부를 정벌했던 것만큼은 사실로 여겨진다는 식의 잘못된 수긍을 하는 나태한 학자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crazycho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