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갈질지(素那葛叱知)가 바로 족중언(足仲彦) 중애천황
65년 가을 7월에 임나국(任那國;미마나노쿠니)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을 떠나 2천여 리,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한일고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일본서기』 숭신(崇神)천황 65년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수없이 접했을 것이다. 한일 양국 학자들 사이에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온 ‘임나국(任那國)’과 그 임나국의 왕자 ‘소나갈질지(素那葛叱知)’가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65년 가을 7월에 임나국(任那國;미마나노쿠니)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을 떠나 2천여 리,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
‘소나갈질지(素那葛叱知)’는 다른 문헌들에는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도노가아라지(都奴加阿羅志), 도노하아라지지(都怒何阿羅志止), 도노하아라사지(都怒賀阿羅斯止)’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고 일본어에서는 “츠누가아라시토”라고 읽는데, 기실 이들은 모두 [돍놁알지]라 일컬었던 이름을 저마다 다른 한자로 차자하여 표기한 것이다. 소나갈질지(素那葛叱知)의 ‘질(叱)’과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의 사(斯)는 현대한국어의 사이시옷 또는 사이지읒과 비슷한 음을 표기한 것이라는 점만 알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이름과 같은 [알-지]의 앞에 ‘똘똘하고 똑똑하며 마음씨가 널널하고 넉넉한’ 사람이라는 뜻의 [돍+놁]을 덧붙인 이름 [돍놁-알지]를 [도녹알지] 비슷한 형태로 발음하면서 앞에 열거한 것과 같은 식으로 다양하게 음차표기한 것이다.
이 [돍놁알지]는 앞에서 잠시 설명을 보류한 바 있는 중애천황의 화풍시호인 ‘족중언(足仲彦)’과 일맥상통한다. ‘족중언(足仲彦)’을 일본어에서는 “타라시나가츠히코”라 읽고 있는데 이는 후대인들에 의해 와전되어 그런 것이고, 본래는 “타라나카히코”라 읽어야 올바르다.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일컬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중애천황의 화풍시호 ‘족중언(足仲彦)’은 ’소나갈질지(素那葛叱知)‘와 똑같은 이름 [돍놁알지/tork-nork-artchi]를 차자(借字)만 달리하여 표기한 것으로, 이 두 사람은 동일인물로 추측된다는 얘기다.
『일본서기』에는 숭신(崇神)천황 65년이 BC.33년의 일이고 숭신(崇神)천황이 기원전의 인물인 것처럼 기술이 되어 있지만, 실제 숭신천황은 ‘탁순왕 말금한기(末錦旱岐)’와 동일한 인물로 추측되고, 재위연대는 서기 519년~549년 전후로 추측된다. 소나갈질지가 그를 만나러 간 것 역시 서기 531~532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공황후 46년조에 보이는 탁순왕 말금한기(末錦旱岐)는 고대한국어로 ‘으뜸가는 임금’을 의미하는 [맏금/mort-khum]을 음차(音借)한 표기였는데, 후대의 일본인들이 앞글자 末을 음독하지 않고 수에(すえ)라고 훈독하여 ‘末錦’을 “수에그미(すえかみ)”라 읽었고, 그 오독한 [수에카미]를 후대의 표기자가 ‘숭신(崇神)’이란 한자로 새롭게 차자해 쓴 것으로 추측된다. 무슨 말인고 하니 탁순왕 말금한기(末錦旱岐)가 바로 숭신천황(崇神天皇)이라는 얘기다.
영남대학교 한보식 교수가 펴낸 『중국연력대전(中國年曆大典)』의 실제 월삭간지를 대조해 보면 제10대 숭신천황, 11대 수인천황, 12대 경행천황, 14대 중애천황 등 상당수의 천황들이 500년대 초반에서 중반, 거의 같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들이 결코 부자관계로 이어지는 혈통의 가문이 아니라는 쪽으로 귀결이 되는 것이다. 12대 경행천황이나 그 아들로 되어 있는 일본무존도 마찬가지다. 이들 대부분이 서기 500년대에 큐슈지역에서 각자 다른 나라를 통치하던 왕들이었는데, 『일본서기』 편찬자들에 의해 한 가문의 계보로 꿰맞춰지면서 마치 부자관계로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의 혈통처럼 잘못 알려지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일본서기』에 14대 천황으로 기록되어 있는 중애천황(仲哀天皇)의 이름 ‘중애(仲哀)’와 ‘족중언(足仲彦)’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중애(仲哀)’는 [가슳/kasur]이라 일컬었던 이름을 사음훈차하여 표기한 것이고, 차자방식을 달리하여 음차하면 ‘가실(嘉悉)’이나 ‘가수리(加須利)’라 적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가실왕(嘉悉王)’과 『일본서기』에 보이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이 바로 그것으로, 이들과 중애천황은 모두 동일인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중애천황의 화풍시호인 족중언(足仲彦)은 일본어로 “타라시나가츠히코”라 읽히고 있지만 잘못 읽는 것이며, “타라나카히코”라 읽어야 올바르다 할 것이다. 일본어로 足을 타루(たる)라 하고 仲을 나카(なか)라 하기 때문이다. 본래 [타라나카히코]라 불렀던 이름을 ‘足仲彦’이라 표기한 것이며, 이는 [돍놁알지]를 음차한 ‘도노아아라사등(都奴我阿羅斯等)’ 혹은 ‘소나갈질지(素那葛叱知)’와 동일한 이름이다. 다시 말해, 숭신천황 65년조와 수인천황 2년조에 보이는 임나국(任那國)의 소나갈질지(素那葛叱知)는 바로 중애천황과 동일인이라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2) 『일본서기』에 중애천황의 아버지로 되어있는 일본무존의 이름은 소대존(小碓尊)이었다고 하는데 ‘소대(小碓)’는 [코우스/kous]라는 이름을 고대의 일본인들이 차자하여 적은 표기로 그 이름만 놓고 보면 백제 제6대 구수왕(仇首王)의 똑같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름만 같을 뿐이고, 이 둘을 동일인물이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소대(小碓; 코우스)’라는 이름은 서기 532년 신라에 항복한 구형왕(仇衡王)과도 같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구형(仇衡), 구해(仇亥), 구차휴(仇次休)’는 모두 [쿠세이, 쿠쉬/koush] 정도로 불렀던 이름을 음차한 표기이다. 『일본서기』에 많이 언급되어 있는 ‘백제 귀수왕(貴首王)’은 백제 6대 구수왕이나 14대 근구수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가야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하고, 『속일본기』에 나오는 ‘구소왕(久素王)’ 역시 구형왕을 가리킨다고 해야 옳다.
서기 532년 신라에 항복한 가야국 구형왕(仇衡王)이 바로 일본무존 소대존(小碓尊)이고, 구형왕의 둘째아들은 무덕(武德) 혹은 무도(茂刀)요, 일본무존의 둘째아들은 중애(仲哀)천황이라 하였으니, 중애천황은 무덕(武德) 혹은 무도(茂刀)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과는 달리, 구형왕의 둘째왕자는 신라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신라에 맞서 싸웠던 것으로 봐야 옳다.
(3) 중애천황이 신라에 맞서 싸운 것은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한 서기 532년 이후이고 신공황후가 신라를 공격한 것은 남편 중애천황이 사망한 후부터이다. 대략 540년~541년 정도로 추정된다. 중애천황의 사망에 대해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9년 봄 2월 계묘삭 정미(5일)에 천황이 갑자기 몸이 아프더니 다음날 죽었다[이때 나이 52세였다. 바로 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찍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책(一)에서는 천황이 친히 웅습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에 황후와 대신 무내숙녜(武內宿禰;타케우치노스쿠네)는 천황의 죽음을 감추고 천하에 알리지 않았다. |
9년 봄 2월 계묘삭 정미(5일)에 천황이 갑자기 몸이 아프더니 다음날 죽었다[이때 나이 52세였다. 바로 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찍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책(一)에서는 천황이 친히 웅습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에 황후와 대신 무내숙녜(武內宿禰;타케우치노스쿠네)는 천황의 죽음을 감추고 천하에 알리지 않았다.
12세기 후반에 일본 천태종 승려 현진(顯眞)이 쓴 『산가요략기』 중의 「삼한정벌기」에도 중애천황이 웅습(熊襲)을 공격하다가 대마도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사망했다고 되어 있다.
‘웅습(熊襲)’은 [구마+습]을 차자한 표기로 ‘고구려’와 ‘신라’를 한꺼번에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고대 일본어에서 ‘웅(熊), 박(狛)’은 [구마/kuma] 혹 [고마/koma]를 표기한 것으로 ‘高麗(=고구려)’를 일컫는 말이었고, ‘습(襲), 주방(周防), 사마(沙麽), 좌파(佐波), 하이(蝦夷)’는 [스비/subi]를 차자한 표기로 ‘사비신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당시 대마도가 고구려에 속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는 논하지 않겠다. 그 핵심 단서가 되는 내용이 『일본서기』에도 실려있고, 앞에서 언급한 『산가요략기』의 「삼한정벌기」에도 실려있다.
『일본서기』 홍계천황(현종천황) 3년조에 보면 “이림성(爾林城)은 고구려의 땅이다.”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는데, ‘이림성(爾林城)’은 한국어로 [이스블/isbur]이라 일컬었던 지명을 ‘음차+사음훈차’한 표기이며, 지금의 대마시(對馬市) 엄원(嚴原; 이즈하라)을 말한다. 또, 현진스님이 쓴 『산가요략기』의 「삼한정벌기」에는 “대마도는 일찍부터 고구려의 목(牧)이었는데 신라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중애천황이 웅습(熊襲; 고구려+신라)을 공격하다가 대마도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도 마냥 허황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산가요략기』의 「삼한정벌기」 내용도 그저 신뢰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외면해 버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에 관하여 좀더 알고자 하거나 관심이 있으신 분은 졸저 『지명연구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라는 ebook을 참고하시기 바라고 여기서는 더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마지막으로 핵심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정리하면, 일본의 제14대 천황이자 신공황후의 남편으로 알려져 있는 중애(仲哀)천황은 [가슬/kasur]이라 일컬었던 이름을 사음훈차하여 ‘중애(仲哀)’라고 적은 것으로, 사실상 ‘가수리군(加須利君), 가실왕(嘉悉王)’과 같은 이름이며, 이들은 모두 동일인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일본무존의 이름 ‘소대존(小碓尊)’은 [코우스/kous]라 일컬었던 이름을 적은 것으로, 구형왕(仇衡王)과 동일한 인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무존의 둘째아들인 중애천황은 서기 532년 신라에 항복한 가야국 구형왕(仇衡王)의 둘째왕자 무덕(武德)과 동일인으로 추측되는 바, 중애천황의 실제 재위연대는 서기 533년~540년 정도로 추정되고 그의 왕비인 신공황후의 활동시기는 541년~569년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신공황후는 후대인들이 지어낸 전설 속 가공의 인물도 아니고 서기 300년대에 활동한 인물도 아니며, 서기 500년대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그에 따라 신공황후가 300년 후반에 한반도 남부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주장 역시 완전히 엉터리라는 게 저절로 밝혀진 셈이므로, 앞으로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논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수수께끼로만 여겨져 왔던 고대사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인명과 지명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자표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crazycho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