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역사추적] 위대한 리더 光海를 조명하다

무장하고 전장을 누빈 光海王

김용필

군주의 통치술이 국가 운명을 좌우한다.

우린 세계사에서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에 의해서 국가의 존망이 좌우되는 것을 무수히 보아왔다. 똑똑한 군주에 의해서 국가와 민족이 흥하고 무지하고 우둔한 군주에 의해서 민족이 망하는 냉혹한 역사를 체험했다. 선택된 리더에 의해서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다. 오늘날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끼어 이념대결과 힘의 균형을 잃은 우리나라는 현명한 국제 정세 판단에 예민한 지혜가 요구된다. 국가와 민족의 존망이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광해왕 같이 균형을 유지하는 외교술과 리더의 결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지금 생각하니 패륜 왕으로 치부했던 광해 왕이 얼마나 현명한 처세를 했던지 그리워지는 것이다.

 

명분을 버리고 실용을 추국한 光海의 외교정책

임진왜란 후 명나라를 숭상하는 사대부들과 광해 왕의 충돌은 사납고 거칠었다. 광해는 지는 명나라보다는 일어서는 후금에 실리 외교를 펼쳤다. 임진왜란 때 후금의 누르하치는 조선을 돕겠다고 나섰다.

 

조선과 여진은 한민족 형제입니다. 우리가 조선을 도와서 일본을 칠 것입니다후금의 누르하치가 제안하였다.

지금 명나라가 우릴 돕고 있는데 명나라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후금의 지원을 받는다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광해가 거절하였다.

후회할 것입니다. 그러나 긴급할 땐 언제든지 지원을 요청하십시오.”

 

그렇게 광해는 후금의 지원을 거부했으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는 청과 국가 명운을 건 사루후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 1만 명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광해는 망설였다.

 

전하. 속히 명나라에 원병을 해줘야 합니다.”

난 원병 해 줄 의사가 없소이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까? 명나라는 왜군의 침략을 막아주었습니다.”

아닙니다. 일본과 명나라 전쟁에 우리가 이용당한 것입니다.”

명분을 중하게 여기십시오.”

명분이라지만 명나라는 지는 해이고 후금은 뜨는 해입니다. 난 국익을 위해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할 것이요.”


그러나 명분을 주장하는 사대부들의 주장에 못 이겨 조선은 1619년 사루후 전투에 1만 명의 군사를 명나라에 보내 후금을 치게 하였다. 강홍립 장군과 부장 김응서가 원군장으로 나섰다. 출전 전야, 광해는 강홍립 장군을 불렀다.


장군, 이 전쟁은 결과가 뻔하오. 전투에 나가서 싸우는 척만 하시오. 그리고 이 서신을 누루하치 태수에게 전해주시오.” 그 문서는 조선 의용군은 후금을 치지 않을 것을 명약 한다는 서신이었다.

장군, 광해왕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장차 후금은 조상의 나라 조선을 형님으로 우러러 받들 것이며 절대 침략을 안 할 것입니다.” 란 약조를 하였다.


마침내 후금이 명나라를 이기고 청나라가 섰다. 광해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챙기는 정책을 시행하여 나라를 구했다. 그런데 조정은 강홍립 장군이 배신을 응징하려 했으나 광해가 막았다.

 

光海아닌 으로 책정한 비정한 역사를 수정하자

조선 27대 왕 중 국난극복을 위하여 손수 무장하고 전장을 누빈 왕은 오직 光海왕 뿐이었다. 왜적이 질풍노도처럼 조선을 짓밟자 선조 왕은 보신으로 의주로 도망을 가면서 태자 광해에게 왕권을 부여하였다.

 

세자는 듣거라, 나는 의주로 가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이니, 세자에게 왕권을 줄 터이니 병사를 통솔하라.” 전란 중에 선조는 도망을 갔지만 광해는 칼을 들고 전장에 나가서 용감하게 전투를 지휘하였다. 전쟁 후 공적으로 왕권을 승계받아야 하는데 명나라와 서인 관료들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앞세워 광해 타도의 반란까지 시도하였다. 이에 광해는 대북파인 이이첨 정인홍의 도움으로 형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유배 후 살해하고 마침내 왕업을 승계받았으나 국모를 죽인 잔혹한 살인자로 낙인되어 아닌 광해으로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국난극복을 위하여 칼을 들고 전장에 나간 진정한 군주였다. 친족과 정적을 학살한 범행은 규탄받아야 하지만 나라를 살린 왕이란 장점은 재 평가받아야 한다. 명나라의 반대와 자극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김류와 이괄의 반정 세력들이 광해를 폐위시키고 무능한 백치 능양군(인조)를 왕으로 모셨다. 인조는 무능하고 무지해서 정사를 돌보지 못해서 병자호란이란 엄청난 국난의 수모와 국왕이 땅에 머릴 받는 슬픈 역사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군무사(軍務司)로 전장을 누빈 光海王

임진왜란 때 태자 광해는 군무사(軍務司) 사령관으로 전장에 나가서 적과 싸운 장수였다. 아버지가 버리고 간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전선에 초막을 치고 밤을 새우며 전투를 하였다. 왜군이 일사천리로 북진하여 한양성을 지배하고 평양성으로 질주할 때 의병을 모집하여 관군을 지원하면서 왜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평양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왜군의 진로를 함경도로 빼돌렸다.


왜적이 평양으로 진격하는데 왜 병사를 함경도로 돌리십니까?” 김응서 장군이 불편한 심기로 말했다.

장군, 아버님이 아직 평양성에 진주 못 했습니다. 시간을 벌려고 유인하는 것입니다.” 광해는 김응서를 다독였다. 역시 왜군은 함경도로 진격하다가 광해에게 속은 것을 알고 진로를 평양으로 돌렸다.

 

정유재란 때 광해는 3(전라.경상. 충청)방어사령관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순천 왜성으로 후퇴하는 왜군 6만 명과 조. 명 연합군 5만이 대치하고 있었다. 권율과 이순신이 순천 왜성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유정 총사령관이 공격을 멈추고 전투를 하지 않았다. 수군 제독 진린과 조선군 총사령관 권율이 항의하였다.


적은 독 안에 든 쥐라서 치면 항복할 것입니다. 한데 왜 전투를 안 하십니까?”

스스로 항복할 것인데 우리 병사의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퇴로를 열려고 합니다.”

당장 쳐서 항복을 받아내십시오.”

네 이놈, 진린과 권율은 명령을 불목할 셈인가? 내 방으로 와라.”

유정은 권율과 진린에게 곤장 10대씩 쳤다.

더 불복하면 죽일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광해왕이 달려가서 유정을 만났다.

어떻게 진격을 독려하는 장수에게 곤장을 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진정 전투에 나온 장수의 생각이란 말이요. 명나라 황제께 보고할 것입니다.”광해가 따졌다.

전쟁은 끝난 거나 다름없소. 난 명나라 병사를 전투로 죽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대장군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조선군이 공격할 것입니다.”

왕자는 물러가시오. 내가 이 전쟁의 사령관입니다.”

난 조서의 분왕이요. 당장 전투를 개시하시오.”


그러나 유정은 전투를 안 하고 적의 퇴로를 열어주었다. 적장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연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장에 나가 퇴로를 막다가 죽임을 당했다. 임진왜란이 끝났다. 광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도 전장을 헤매고 다닌 공으로 왕위를 승계했으나 명나라는 승인을 하지 않았다.

 

光海를 광인으로 만든 당파 싸움의 덫이다

전후 대북파가 정권을 잡았다. 이이첨, 정인홍이 주도권을 잡고 광해를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서인의 김류, 김자점, 유영경, 최명길이 적자라고 반대하였다. 그리고 임해군이 왕자들과 결탁하여 인목왕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명나라의 도움으로 반란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이첨과 정인홍이 광해를 왕으로 옹립하고 피의 숙청을 벌인다. 형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비를 폐서인시켜 유배를 보낸다. 명나라가 광해를 싫어한 것은 적자가 아니란 이유가 아니고 실제는 명나라 장수들의 방해였다.


마침내 인조반정으로 광해는 왕위에서 물러나고 인조 왕이 등극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조선 왕조에서 가장 나약하고 무지한 왕이었다. 이괄은 인조반정 공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여 청나라로 도망가서 광해를 추방한 이유를 전한다. 그러나 청 태종은 이괄 무리를 처형한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는 강화도로 유배 갔다가 제주로 이배 되어 죽임을 맞았다. 청나라 태종은 광해를 실권시킨 인조에게 책임을 물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仁祖反正이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1619년 명나라를 친 후금이 청나라로 거듭난다. 1927년 청태종은 형제의 나라 조선의 광해가 인조반정으로 추출 당했다는 말을 듣고 조선을 공격하는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조선은 친교를 약속하고 청을 보냈으나 인조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청을 비호감으로 대하자 청태종은 조선을 치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모욕을 주었다. 병자호란이다. 막을 수 있는 전쟁을 인조의 외교 무치로 국난을 맞은 것이다. 청나라 침략은 우리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약탈이었다.

 

光海의 창조적인 업적을 말한다.

대동법을 실시하여 가난을 구제하였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에서 가난으로 굶주린 백성에게 대동법을 시행하여 구휼하였다. 광해는 선혜청을 만들어 춘궁기에 쌀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받는 통치로 민생을 구제하였다.

 

탕평책으로 인재를 고르게 등용시켰다. 정여립의 기축옥사로 서인이 동인을 대학살 하면서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갈리고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갈려 4색 당파의 극치를 이루었다. 광해는 대북. 소북. 노론. 소론의 치열한 당파 싸움을 조정하여 분당을 초월한 북인과(동인) 서인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이이첨, 정인홍 같은 당대 최고 석학을 등용하였다.

 

경복궁 재건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경복궁을 차근차근 다시 짓기 시작하였다. 먼저 창덕궁을 새롭게 중건하고 정궁으로 활용하였다. 경복궁이 창경궁으로 이궁하여 정사를 보았다.

  

중립외교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책으로 국익을 도모했다. 청나라는 조선을 형제의 나라라고 우호적이었는데 인조반정으로 광해를 몰아내고 능양군 인조를 왕위에 세우자 청나라가 분노하며 조선을 침략하였다. 정묘호란으로 양국의 우호가 다짐 되었는데 조선이 외면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개혁 군주로 국제 정세에 예민하게 대응하였다.

 

광해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허균을 내세워 사회개혁을 주도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추구하는 통합의 정책과 후금의 누루하치 세계화 정책을 받아들여 실용 개혁 정책과 교린 외교로 부국강병책을 생각했던 임금이었다. 그러나 당파의 거센 물결에 왕권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역사는 그를 잔혹한 폭군이란 죄명으로 임금이 왕이 아닌 군으로 왕 계보에 기록 함이 안타깝다. 조선 역사에서 칼을 들고 전장에 나가 나라를 구한 왕은 오직 광해임을 잊지 말아야 하고 병자호란은 광해를 물리친 인조의 무능한 외교 실수로 일어났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작성 2022.03.14 10:59 수정 2022.03.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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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