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은 하나가 아니다. 한 사람 안에는 다층적인 자신이 존재한다.
– 자크 데리다
마크 트웨인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왕자와 거지’를 보았다. 얼굴이 쏙 빼닮은 왕자와 거지는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마냥 신나게 논다. 하지만 어른들 세계는 그들의 변신 놀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거지가 된 왕자는 왕궁에서 쫓겨나 세상을 떠돈다.
왕자가 된 거지는 그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세력에 의해 왕이 승하하자 왕으로 추대되게 된다. 거지가 된 왕자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백성들의 처절한 삶의 실상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결국엔 충직한 기사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거지로 변신해 보았던 왕은 성군(聖君)이 되어 백성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변신에 대한 열망을 항상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천민, 평민으로 살아와서 귀족, 상류층들의 삶이 궁금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할 때, 언론매체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직접 만나보면서 그들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가지?’ 실망스런 사람들도 있었고, 집에 가 보면 셋집에서 검소하게 살아가는 유명 인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옷을 바꿔 입고 변신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 후 오랫동안 바랐던 귀촌을 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시골에 내려가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녔다.
가슴이 뻥 뚫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다는 것을 느꼈다. 놀고 있는 밭들을 구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마시며 흙을 일구고 씨앗을 뿌렸다. 시골 사람들은 이런 모습의 나를 소꿉놀이한다고 했다.
농부로 변신한 즐거움. 흉내 내기에 불과했지만, 나는 밀짚모자를 쓰고 괭이를 들고 변신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러던 어느 날, ㅅ 지역신문의 기자가 찾아왔다. 귀농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했다. ‘헉! 귀농이라니?’
나는 시골 사는 재미를 글로 써서 약속된 날에 그에게 주었다. 그가 글을 보더니 “글을 아주 잘 쓰시네요.”하고 말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그 신문에 칼럼을 쓰게 되었다. 그러다 그 신문의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변신이었다. 나는 역시 성격이 이상주의자가 맞나 보다. ‘변신의 즐거움을 만끽하자!’ 가슴이 뛰었다. 시골도 한 나라의 축소판이었다. 지역을 이끌어가는 시골 귀족들이 있었다. 나는 가끔 그들과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귀족들 언저리밖에 가보지 못했지만, 시골에서는 나도 그들과 한 무리가 된 듯했다. 그들은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만나면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었지만, 속을 알 수 없었다.
항상 이해관계로만 그들과 얽혀졌다. 7년의 시골생활을 끝내고 다시 도시로 이사 오며 그들과도 결별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변신의 기회가 줄어든다. 하지만 변신의 경험들을 되새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더 빼앗길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저들 너그러운 웃음 뒤에 숨은
더러운 음모가 보이고
부드러운 손길 그 소매 속에
감추어 든 비수가 보인다
더 쫓겨갈 곳이 없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들린다
- 신경림,《따뜻한 남쪽나라》부분
어린 시절을 ‘더 빼앗길 것이 없는 이들’로 살았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눈과 귀가 멀어버렸을 것이다.
여러 변신을 해보며 깨달았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 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