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를 국어사전에는 ‘봄철에 오는 비. 특히 조용히 가늘게 오는 비를 이른다’고 정의되어 있는데 조용하고 가늘게 오는 비는 크고 작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뭄이 길게 지속되어 오면서 농작물 관리에 애를 먹고, 곳곳에서 나는 산불들이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냥 보이기도 하지만 기실 그것도 자연의 한 일부이기도 하다.
옆집 수탉의 아침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니 알 수 없는 조용한 기운이 감돈다. 창문을 여니 봄비가 내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기다리던 봄비다. 낙엽 밑의 땅도, 새싹도, 한 해를 지낼 안식처를 바쁘게 만들고 있던 작은새도. 이토록 간절하게 기다리던 봄비를 보고 누군가는 반가움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경기민요인 창부(倡夫)타령에 보면 하늘과 같이 높고 하해와 같이 깊은 사랑을 ‘~칠년 대한 가뭄 날에 빗발 같이도 반긴 사랑~’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긴 가뭄 뒤의 비를 기다리는 것은 또 한 자연의 기다림이고 귀결이자 세상의 온갖 것들이 살아가는 행태의 중요한 부분인 것도 같다.
귀한 봄비를 방안에서 보고 있기는 아깝다. 슬리퍼를 신고 비 오는 아침을 걷는다. 헛간의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정겹다. 작은집에서 아침을 깨우는 것이 마치 피아노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것 같기도 하다. 벌써 나뭇잎이 벌써 흠뻑 젖었다. 뒷산의 소나무도 봄비를 반기는 듯 천 가지의 손을 하늘로 뻗어 올리고 있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하늘엔 회색 구름들이 산과 들을 건너뛰며 춤을 춘다. 옷고름과 치맛단이 나풀거린다.
이제 며칠 지나지 않으면 땅이 속살을 섞고 일굼을 갖추어서 봄비를 대지에 토해낼 것이다. 세상을 지배한다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존재처럼 먹기만 하고 내뱉을 줄 모르는 따위와는 다르다. 그 봄물, 봄기운은 겨우내 땅속에서 참고 있던 푸른 기운을 매달고 올라와 온 세상을 푸르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그들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푸르게 만드는 것은 비단 색깔 뿐 만이 아닐 것이다. 먼 곳에 사는 친구가 봄비가 온다며 간만에 연둣빛 전화를 해 왔다. 봄비가 온다고 전화를 주는 친구가 고맙고 그런 친구를 둔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 멀리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는 벌써 봄을 맞이한 소리였다. 그와 내가 이순(耳順)을 넘겼어도 빗방울 한 줄기를 보고 서로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야 고맙다, 봄비야 고맙다.
지난번 새벽녘에 잠시 뿌리고 갔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많은 것들의 갈증을 다소간 해소시켜 주었다. 지난번에 많이 내렸다면 이번 봄비의 고마움은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세상사 이치가 그렇듯 첫술에 배부를 수 없고 간절함이 클 때 뒤따라오는 행복감은 더욱 크다.
“봄비‘는 만물을 생동시키기도 하고 노래며 시(詩)도 있고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있다. 언 땅이 풀리자 비집고 올라온 연둣빛 새싹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이롭다. 용혜원 시인은 ’봄비가 내리면 온통 그 비를 맞으며 하루 종일 걷고 싶다‘고 하였고, 가수 이은하는 ’봄비 속에 떠난 사람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라며 노래했다.
마음까지 흠뻑 봄비를 맞고 싶은 소망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봄비 속에 떠난 사람이 왜 하필 봄비를 맞으며 돌아왔을까. 우리에 삶이란 걷기 싫어도 걸어야 하고, 떠나는 시간이 있으면 돌아오는 때도 있다는 것을 말하며 우리 모두에게 암묵적인 동의와 가르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내려서 고여 있는 봄비에 뒤따라 내린 비가 포개져 합쳐진다.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왜 날 버리고 먼저 떠났냐며, 내가 못 찾을 것 같냐? 올해 못 찾으면 지구를 몇 바퀴 돌아 내년 봄에라도 찾을 거라며, 그게 가족 아니냐며 속삭이는 것 같다. 그렇게 모인 봄비 가족도 참 행복해 보이는 아침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봄비의 여행이나 우리네 삶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