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 이사를 한다. 오랫동안 한곳에서 사무소를 운영하다가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표정을 보니 즐거운 마음보다는 수심이 크다. 코로나 시대에 사무소를 꾸려가는 어려움이 있을 테지만, 임차료 또한 압박을 받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십여 년을 한곳에서 운영해왔으니 알게 모르게 들어찬 짐이 꽤 많다. 벽면에 걸린 상장이며, 위촉장, 트로피, 감사패 그리고 메달 등등.
이사를 간다는 것은 몸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떠나보내는 일. 한 사람의 살아온 자취를 잘라내며 지나온 시간을 떠나보내고, 새 뿌리를 내리는 일이기에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다. 예전에는 동네에 이사하는 집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한번씩 보고, 친한 사람들은 이삿짐을 실어주며, 서로 인사를 건네어 발전을 기원했다. 이젠 그런 광경을 볼 수 없으니 아쉽지만, 전문 이삿짐센터에서 완벽하게 처리해주는 만큼 편해진 면이 있을 것이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삶이 옮겨간다는 것. 작은 이사를 넘어선 큰 이사를 생각해본다. 근원적으로는 한 삶이 옮겨갈 때-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갈 때, 즉 이승을 떠나갈 때-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사를 생각한다. 생명을 부여받고 지상에서 꾸려온 몸을 반납하고 떠나가며 끝을 맺는 이사-일생의 여정. 며칠 전 큰 이모부님의 부음(訃音)을 듣고 장지에 다녀왔다. 아흔의 연세로 세상을 떠나셨으니,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한 생명체로서의 몫은 다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수명의 많고 적음을 떠나, 큰 육신이 조그만 유골함에 담겨 납골당 작은 한 칸으로 옮겨가는 것이 삶의 자연스런 경로라는 인식에 마음이 무거웠다.
죽음의 무게는 얼마인가. 죽음이 숫자로 표시되는 요즘이다. 코로나 확진 숫자에 눌려 이백 명이나 삼백 명이라는 위중증 사망자의 숫자는 대수롭지 않게 눈에 훅,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것 같다. 죽음은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니는가. 죽음은 얼마나 깊고 무겁게 다가오는가. 죽음이 덩어리가 되고 있다. 죽음의 무게가 이처럼 수치로 가볍게 취급된 적이 있을까 싶다. 죽음이 둥둥 떠다니는 때에, 아마도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면 그 무게는 천근만근 무겁기 그지없을 것이다.
사실 죽음은 삶의 다른 한쪽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미래와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췌장암에 걸렸던 잡스(Steve Jobs)는 “죽음은 삶의 최고의 발명품으로서 낡은 것을 거두고 새것을 인도해오는 동인(動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엘리엇(T. S. Eliot )또한 그의 시 <황무지(荒蕪地)>에서, 봄을 맞지 못하는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봄이 오는 계절에 생명이 움트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은 삭막하지만, 생명을 향한 자연과 인간의 열망은 한결 같지 않은가. 누가 뭐라 해도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니, 이제 생명을 맞을 준비를 하자. 그것이 살아있는 자의 권리이자 의무이고, 행복이고 즐거움일 것이다.
파릇해지는 들판을 걸으며 개천을 들여다본다. 물고기들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조만간 그들도 돌아올 것이다. 한겨울 얕은 개울에서 자맥질을 하던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샐린저(J.D. Salinger)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가 던졌던 물음.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요?”를 생각하며 들판을 걷다보니, 겨울동안 얕은 개울과 천변에서 뒤뚱뒤뚱 오가던 오리들이 호수 깊은 곳에서 유영하고 있다. 얼음이 녹자 호수 깊은 곳으로 이동하며 강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봄이 조금씩 다가오는 것이다.
이승을 떠나 사후 세계로 이사를 한 이모부님이 평안히 영면하시길 기원한다. 잠시 숫자로 표시되었다 티비(TV) 화면에서 사라지는, 코로나에 희생된 알지 못하는, 수많은 저문 영령들에게 안식이 깃들기를 희구한다. 삶과 죽음은 동면의 양면처럼 한 트랙에서 얼굴을 바꿔가며 우리 삶을 채운다. 봄볕이 따갑다. 홀연히 서있는 나무의 그림자도 제법 길게 늘어지고 있다. 일생동안 무겁게 또는 지치도록 그림자를 달고 다녔을 영령들. 사후 세계에서는 평안히 안식을 취하시길 빈다.
처음이휴영(處陰以休影)
처정이식적(處靜以息迹)
그늘에 들어 그림자는 쉬고,
고요함 가운데 발자국이 쉰다.
봄 들판에 새소리와 햇살이 가득하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
신연강 imilto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