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역사기행] 용산을 가다

김용필

1. 용산은 어디인가?

용산은 900년 동안 점령군의 주둔지였다. 용산은 북악산에서 이어지는 용맥이다. 구용산과 신용산으로 구분되는데 구용산이 용산의 원조이다. 구용산은 도화동, 용문동. 원효로 1.2.3.4가 청파동, 남영동 서울역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청암대(도화동 끝자락) 천주교 용산성당이 있는 성심여고가 원용산이다.

 

용산엔 쌍용산이 있다. 주산인 북한산에서 북악산(백암산) 인왕산을 건너 안산 이루러 뻗은 두 줄기 산맥을 쌍용맥이라고 한다. 하나는 북아현동, 공덕동, 염리동, 용강동에서 한강으로 뻗는 맥이고 하나는 안산에서 북아현 충정로, 중림동, 만리동, 공덕동. 도화동을 잇는 등성이로 청암대로 솟아 용산강으로 빠진다. 두 마리용은 염리동의 쌍용산과 도화동의 청암산이다. 원래 마포나루와 용산나루는 청암만을 좌우로 한 지형인데 지금은 청암산 좌측은 용산 우측은 마포로 구분되었다.

 

용산은 마포 종점인데 19세기 말 외국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마포에서 용산포로 물류 이동이 바뀌면서 용산 포구가 생겨 활발한 무역항으로 부상하였다. 지금의 성심여고 앞 나루터를 말하는 것이다. 용산포로 밀어닥친 외세는 강변에 배를 정박하고 국제무역을 활성화시켜 도성으로 진입하였다. 원래 마포에서 만리동 아현동 서소문으로 빠지던 길이 용산포에서 용문을 거쳐 원효로로 이어져 남대문 도성으로 통하는 새길이 생긴 것이다.

 

용산포는 국제무역항이 되었다. 제일 먼저 무역항을 개척한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증기선을 가지고 와서 한강에 주둔시키고 무역을 권장하였다. 다음에 영국이 무역 점을 개설하였고 그 후 청나라와 일본이 무역 점을 열었다. 용산 시대를 맞으면서 어느새 독일과 영국은 물러가고 청나라와 일본의 주력 함대가 집결하였다.

 

조선 건국 시 정도전과 무학대사는 한양 천도를 기획할 때 안산 아래 이화대의 북안현동 마포와 연세대 앞 동교동 평야를 택했다. 그러나 수도로는 비좁아서 북악산 아래로 경북궁을 지어 옮겼다.

 

2. 개항의 중심지 용산포

188410, 고종은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항을 열어 주면서 마포의 삼개나루가 개시장(開市場)이 되었다. 1887년 한강의 용산포로 선교사의 뱃길이 닿으면서 용산포에 독일,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의 무역 점이 들어서서 종교활동과 상업활동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원효로를 중심으로 한 용산이 번창하였다프랑스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자 천주교회는 함벽정(涵碧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곳에 신학교를 세우고 인근의 삼호정(三湖亭) 자리 (현재의 용산성당 일대)에 성직자 묘지로 매입하고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양옥건물인 용산신학교(성심여고)가 설립되었다.

 

독일은 18888월 용산의 한강에 증기선의 취항하였고 일본이 들오면서 19001월 서계동(서울역) 청파동, 원효로 4가에 이르는 전차가 개통하여 서울의 개항 근대화는 마포에서 시작하여 용산포에서 성업하게 되었다용산은 원래 용맥을 지닌 땅이었다. 13세기 몽고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한강변에 병력을 주둔하였고 임진왜란 때 한양 정벌대 2개 사단이 점령 주둔하였고 병자호란 땐 마포 당인리에 청나라 진지를 만들었고 대원군의 지시로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민비는 청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청군이 용산 남영동에 점령기지를 만들어 조선을 지배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 청일전쟁 이후 일제는 신용산에 식민지 점령군 사령부를 만들고 철도기지를 세워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3. 점령군 주둔지로의 용산의 역사

(1) 몽골군 주둔지 : 용산이 외국군 점령주둔지가 된 것은 13세기 몽골군이 일본 정벌대를 꾸리면서 고.몽엽합군을 만들면서 효창원에 병참기지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1차 일본원정에 실패했지만 2차도 실패하여 몽골군이 고려병과 같이 유럽정벌대로 나가면서 해체되었다.

 

(2) 임진왜란 때 일본군 한양 정벌대 주둔지

1952년 음 428, 왜병은 조선 침략 20일 만에 한양성을 정복하였다.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가고 무주공산인 한양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3만 주력군으로 청파동(서계동)에 주둔하고 한양을 공략하였다. 다시 후진으로 온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2만대군이 원효로 4(삼각지)에 주둔하고 한양성을 공략하였다. 이때부터 한강 용산포에서 용문동 원효로 남영동 청파동은 완전히 일본군 소굴이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원효로는 일본 색이 짙은 고을이 되었다.

 

(3)청나라 군대 집결지

청나라군은 홍제동과 마포의 당인리에 병사를 주둔하고 한양성을 공략하고 남한산성을 공략하였다. 당인리란 지명은 청나라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청나라가 철수한 후에도 당나라인들이 큰 마을을 형성하여 조선 여인들과 결혼하여 살았다. 당인리는 청나라 마을이란 뜻인데 사람들은 당나라라고 불렀다.


(4) 임오군란과 청나라 통치관청(총독)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은 구식 군대다 반란을 일으키자 민비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청나라에선 이홍장이 정여창, 마건충 정권대사로 원세계(위안스카이) 총사령관으로 3,000명의 군사가 조선에 들어와서 난을 수습하고 대원군을 납치해서 청나라로 데리고 간다.

 

조선에 남은 원세계는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14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당인리에 옛 청나라 마을에 청나라 촌을 만들었다. 그가 조선에서 벌인 횡포는 극에 달했다. 고종 왕은 하수인 취급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1912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손문은 원세개(袁世凱)를 불러 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이며 군 총사령관으로 재직 중 1916년 사망하였다.

 

*조선이 청국과 일본의 통치를 받은 것은 세계정세의 변화가 아니고 고종을 앞세우고 벌인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 싸움으로 결국 나라가 망했다.

 

(5) 을미사변과 일본군 주둔지

1884년 김옥균등 개화파들이 일본을 앞세워 갑신정변을 일으켜 대개혁을 기도했으나 청나라와 러시아의 방해로 실패하고 일본이 철군하면서 청나라의 제압 아래 혼란한 시기를 맞는다. 마침내 일본은 1884-1985년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885년 일어난 동학혁명까지 진압함으로써 조선은 완전히 일본군 치하에 들어간다.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간섭을 하는데도 무능한 고종을 앞에 두고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 싸움이 계속된다. 마침내 일본군은 용산의 삼각지에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육군 본영을 세우고 대대적인 조선 침략의 기회를 만든다.

 

러시아가 반박하자 1904년 러일전쟁이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은 용산(龍山)의 삼각지를 중심으로 300여만 평을 강제로 수용하여 일본군 병영(兵營)을 만든다. 청일·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기세는 중국을 넘보고 용산(龍山)에 군사 기지를 만들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군은 용산에 만주 정벌 조선 주둔군 기지를 확대하였다. 당시 용산은 일본군이 독점하는 군사 기지가 되었다. 사령관저는 효창공원이었다. 용산은 원효로를 경계로 구용산과 신용산으로 구분되는데, 구용산은 원효로 서쪽의 청파동·효창동·용문동, 남영동. 서계동이었고 신용산은 동쪽의 삼각지. 이촌동. 후암동. 서빙고동이었다. 구용산은 주거지이고 신용산은 군사 기지였다.

 

4. 용산이 점령군 기지로의 최적성

용산은 역사적으로 점령군에 수용된 땅이었다. 지금까지 그 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왜 외국군이 용산을 탐내고 점령군 기지로 만들었을까, 그만큼 한양성을 공략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한강까지 배가 드나들어서 교통의 요지였고 철도가 서면서 해로 육로가 군사 작전상 최적의 요충지가 되었다.


용산은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인천까지 배로 드나들 수 있는 한양의 관문으로 일본군은 용산을 본격적으로 일본군 주둔지로 개발하고 철도를 건설하여 만주로 향하는 관문을 만들었다. 일본은 본토 군영을 모두 용산 군영으로 옮겨 조선반도를 통치하면서 만주국까지 통치하였다. 용산의 삼각지는 세계적인 군사 기지였다. 용산은 하루라도 총성과 말발굽 소리가 그치지 않은 군사 요충지였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군이 주둔했던 자리에 미군이 진주하여 미군 사령부를 만들었다.

 

5. 미군 24사단과 미8군 주둔지

19459월 미국 제7사단은 한국에 상륙, 용산 기지에 있던 일본군 시설들을 접수하고 무장해제를 촉구하면서 미군 기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사용하던 땅 100만 평을 이양받아 새 점령지에 주한 제24사단 사령부를 세우고 일본 무장 해제 목적으로 주둔하였다1949년 여름 미군성이 철수한 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용산 기지는 다시 미8군 주한 미군이 주둔하였다. 1953915일 용산 미8군사령부를 관악산 기슭로 잠시 옮겼으나  19577월에 영구 주둔목적의 주한미군사령부가 용산에 발족했고, 도오쿄에 있던 유엔군 사령부도 이곳으로 옮겨왔다. 1978117일에 한국 연합사가 발족하여 미군 병영에 한국군 연합사가 구축되었다. 2003년 용산 미군지지 반환이 협의가 끝나 2017년 미8군 본부가 평택으로 이전해 갔으나 용산의 미군 기지는 현재 미반환 상태이다.*

 

6. 용산기지는 서울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영구보존할 가치가 있다.

서울이 도심에 이런 미개발 땅이 있다는 것은 아파트 숲에 묻혀 사는 서울시민에겐 천혜의 땅이다. 서울시민들은 미군으로부터 용산기지를 되돌려받아 역사 자연공원으로 만들어 다시는 외세의 침략기지나 점령군 병영이 되지 않도록 후대의 유산으로 남겨 보존하고 싶어한다. 용산 미군 지지를 역사 자연공원으로 만드는 것이 도심의 허파라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그런데 자유로운 시민의 휴식 자연 공간이어야 할 용산을 눈앞의 이산으로 건물이나 토지를 활용해서는 안 된다. 오롯이 역사 자연공원으로 서울시민의 허파 같은 역할로 편한 휴식공간이 되어야 한다. 용산을 역사 자연공원으로 영구보존하는 것이 후손을 위한 배려이며 희망일 것이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

김용필 danmoon@hanmail.net


작성 2022.04.05 11:14 수정 2022.04.05 11:41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전명희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