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 신동면에 있는 경춘선 '김유정역'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사람 이름을 역명에 붙인 역사다. 역 근처에 있는 우체국도 '김유정 우체국'이다. 이 또한 사람 이름이 붙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다. 여기가 바로 <동백꽃>, <봄봄> 등으로 유명한 천재적인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 마을이기 때문이다.
김유정역 근처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 앞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김유정 실레이야기길' 표지판이 있다. 이곳이 오늘 산행의 출발점이자 김유정의 문학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단언컨대, 길 중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 이 길이 아닌가 싶다.
김유정 문학관을 지나 김유정 생가에 이르니 담벼락에 노란 동백꽃이 활짝 피어있다. 마름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풋풋한 애정을 그린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에서 “나와 점순이는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고만 정신이 아찔하였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떠오르면서 소설을 처음 읽고 심쿵했던 학창 시절로 잠시 돌아간 기분이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나무 또는 동박나무라고 부른다.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붉은 동백꽃이 아니고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다.
'나'를 괴롭히던 동갑내기 마름 집 딸 '점순이'는 바보처럼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던 '나'에게 봄철 동백꽃의 진한 향기와 함께 그 마음을 그렇게 전한 것인데.
김유정의 고향 실레마을 뒷산 금병산에는 김유정 작품을 딴 ‘봄봄길’, ‘산골나그네길’, ‘금따는 콩밭길’, ‘동백꽃길’, ‘만무방길’이 있다. 어느 코스를 택하여 오르고 내려오더라도 4시간이 채 걸리지 않고 어느 코스로 올라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온다. 오늘 산행은 김유정 문학관에서 출발해서 김유정의 소설 속 배경이 되었던 실레마을길과 동백꽃길을 지나 금병산 정상에 오른 후 산골나그네길로 하산하여 다시 김유정 문학관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걷기로 한다.
병풍이 빙 돌아가며 둘러쳐져 있는 산 안에 폭 안겨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실레마을은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시골 마을이다. 마을 골목 어딘가에서 불쑥 점순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상상을 하면서 정겨운 마을길을 걷다 보면 실레길은 끝나고 동백숲길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동백숲길은 계곡으로 난 길이라 음지가 많은 탓인지 아직 동백나무꽃을 많이 볼 수 없다. 숲속 나뭇가지에는 잎도 없지만 편안하고 정겨운 흙길이 이어지고 울창한 잣나무숲에 들어선다.
촘촘하게 들어선 커다란 나무들 빈 가지 빽빽하게 얽힌 무채색의 숲은 푸른 잣나무 군락지 덕분으로 생기가 돈다. 숲길 사이의 흙길을 밟는 느낌이 겨울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경칩이 지난 지 오래니, 세상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때가 되었다. 숲의 흙도 마찬가지여서 얼었던 흙이 녹아 숨구멍이 트이면서 겨울잠에서 깬 벌레들이 세상으로 나오고 흙길은 부드러워진다. 숲길을 걸으면서 피톤치드를 원 없이 마신다. 숲은 그렇게 살아 있다.
생기가 가득한 푸른 소나무 숲을 지나 제법 경사가 있는 오르막이 몇 차례 나오면서 비로소 이마에 땀이 맺힌다. 외투를 벗어 배낭에 넣고 숲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니 비릿한 봄 냄새가 풍긴다. 이어서 금병산 정상(672m)에 도착한다.
정상 전망대에 서면 춘천 시내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춘천 최고봉인 대룡산과 대룡산 왼쪽으로 사명산, 구봉산, 오봉산, 용화산, 삿갓봉, 가덕산 등이 이어지며 끝없는 산세가 춘천을 에워싸고 있고 산자락에는 호수와 저수지가 군데군데 보인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있어 춘천 시내 조망이 그리 좋지 않다.
정상에서 내려서는 산골나그네길은 능선길인지라 순하고 편하다. 계곡길인 동백꽃길보다 햇살이 좋아 개나리와 진달래가 많이 피어있고 동백꽃인 생강나무 노란 꽃이 군락을 이루며 화사하게 피어나 봄을 맞이하고 있다. 아찔한 첫사랑의 봄! 유정의 고향 실레마을 금병산에 드는 봄은 그렇게 생강나무꽃이 맞이하고 있다.
흔히 산수유나무와 생강나무를 혼돈하는 경우가 많다. 산수유나무는 나무껍질이 벗겨질 듯 일어나 거친 것이 특징인데 비해 생강나무는 나무줄기의 표면이 훨씬 매끈하고 가지나 잎을 꺾어 비비면 생강 냄새가 나는 것으로 구별이 가능하다.
금병산 자락을 노랗게 물들인 동백꽃은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30살에 요절한 유정의 생애가 떠올라 애잔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가 우리 현대 문학사에 얼마나 큰 족적을 남겼는지를 생각해보면 환희의 송가처럼 느껴진다.
하산 길은 올라올 때 만났던 풍광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능선길인지라 거리는 길지만 길이 유순하고 동백꽃도 많이 피어있다. 게다가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들린다. 잣나무숲이 끝나는 곳에 있는 저수지를 오른편으로 낀 채 산길을 내려서면 전원주택이 나오고 김유정역과 김유정 문학촌이 시야에 들어온다.
김유정 생가 근처에 있는 한낮의 노천카페에는 봄 햇살이 강하다. 내가 마시는 커피잔에 어느새 산바람을 타고 온 알싸한 동백꽃 향기가 내려앉았다.
이제 정말 ‘봄봄’인가 보다.
여계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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