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실존의 존재이다.
- 장 뤽 낭시
일본의 한 무용수는 하얀 눈이 내린 겨울 산길을 나체로 걸어간다고 한다. 그 공연을 보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나도 해 보았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산길을 나체로 걸어보았다. 충만한 자유였다. 몸만으로 나는 부족함이 없이 존재했다.
오랫동안 인간의 몸은 정신의 하위에 머물렀다. 정신은 실체고 몸은 곧 썩어서 사라져야 할 헛것이었다. 누가 우리에게 이렇게 몸을 보게 했을까? 지배 세력인 왕과 귀족이었다. 그들은 낮은 생산량에서 자신들의 몫을 늘리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들은 성직자들을 통해 물욕에 젖지 않은 고매한 인품을 보여주었다. ‘이게 진짜 인간이야!’ 갑자기 가짜가 된 백성들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물욕을 억제하게 되었다. 한평생 물욕에 젖어 사는 왕과 귀족들은 딴 세상에 살았다.
그러다 산업혁명, 과학혁명이 일어나며 생산성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제 누구나 실컷 물욕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정신보다 몸이 더 고귀한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몸짱’은 있어도 ‘정신짱’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언뜻 보면 몸이 해방된 것 같지만, 자본주의는 다시 몸을 상품화시켰다. S 라인, 동안, 11자 복근…. 몸은 다시 우리의 몸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거울을 보며 ‘텔레비전에서 본 명품 몸을 어떻게 하면 따라갈 수 있을까?’를 고심한다.
우리는 헬스장에 가고 성형을 하며 몸을 서서히 명품 몸으로 만들어간다. 우리는 짝퉁 몸으로 살아간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뤽 낭시는 그의 저서 ‘코르푸스’에서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의 몸’에 대해 말한다.
부활한 예수는 자신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몸을 만지게 하여 자신이 실제로 부활했음을 믿게 한다. ‘지금 여기의 몸’이다. 지금 여기에 손이 닿으면 알 수 있는 몸, 이 세상에 실재하는 몸이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몸을 만지려는 마리아에게는 ‘내 몸을 만지지 말라’고 했다. ‘가장 멀리서 오는’ 몸이다. 낭시는 우리에게 몸의 닿을 수 있는 몸과 닿을 수 없는 몸을 얘기하고 있다. 잡으려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잡지 않으면 저 멀리 있는 몸.
저 멀리 있지 않고 닿으면 바로 알 수 있는 몸은 얼마나 무서운가? 도둑의 몸, 공무원의 몸, 학생의 몸, 여자의 몸...... 모두 언어에 갇힌 몸이다. 그런 몸만 몸으로 알면 몸은 하나의 물질이 되어 버린다. 서로 만나도 서로 물질일 뿐이다.
낭시는 말한다. “몸은 실존의 존재이다.” 그렇다. 이미 정해진 몸은 없다. 지금 여기에서 무언가를 향해 선택해가는 몸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하나로 어우러지지 못하는 건, 각자 이름에 갇힌 몸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사라진 몸이 되어야 새로운 몸이 구성되고 서로 새롭게 만날 수 있다.
낭시는 이렇게 하나로 만나 어우러지는 사회를 ‘무위의 공동체’라고 했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광기로 하여금 이성을 감시해야(푸코)’한다. 단단한 이성으로 굳어진 몸으로는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우리 안에서 알 수 없는 광기가 이성을 잠재우고 새로이 발명된 인간으로 서로 만나야 한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우리를 무위의 공동체로 초대하는 영화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평화롭게 살던 산골 마을 동막골에 미군도 오고 인민군도 오고 국군도 온다. 이질적인 이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가는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머리에 꽃을 꽂은 ‘미친 소녀 여일’이다.
그들은 전쟁도 잊은 채 잠시 하나로 어우러진다.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무위의 공동체, 이름이 사라진 사람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공동체가 깊이 새겨졌다.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의 이치를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으로 설명한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이렇게 천변만화할 때 우리는 지상에 천국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릇인 줄만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허기의 용병이었다.
〔......〕
어느 날 내 몸이 다만
통로인 것을 알아채자마자
하늘이 내려와 소롯이 안기었다.
담고도 남았다.
이내 허기도 포만도 사라졌다.
- 김규성, <몸의 증언> 부분
인간은 생각이라는 게 있어, 삼라만상에게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인 인간의 몸은 그릇이 되어 버린다. 시인은 자신의 몸이 통로인 것을 알아챈다. 만져지기도 하고 만져지지 않기도 하는 몸이다. 모든 인간과 천지만물을 만날 수 있는 몸이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 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