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5일 아들이 7살 되던 어린이날 점심을 먹고 아이들이랑 섬진강을 한 바퀴 돌아올 마음으로 출발했다. 남해 자연을 열렬하게 예찬하지만 사실 우리나라 자연은 어느 곳이나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 어릴 적에는 남해에서 출발하여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을 늘 다녔다. 특히 하동 섬진강은 특별히 좋아하는 곳이다. 하동읍을 지나고 최참판댁을 지나고 화계장터를 지나고 구례 운조루를 지나고 구례를 돌아 광양으로 해서 섬진강을 따라 드라이브하는 길을 참 좋아한다.
그날도 점심을 먹고 출발했으니 하동 최참판댁을 지날 때가 2시 반쯤은 되었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작가 박경리가 이승을 떠난 시간 2시 45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소 작가 박경리를 참 좋아해 토지 16권짜리를 세 번을 읽었다.
2002년 막내를 가지고 유산기가 있어 7개월부터 낳을 때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는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하는 시간 작가 박경리. 박완서, 최명희 세 여성분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읽었다.
20년 전에 읽었지만, 특별히 토지는 가슴에 절절했다. 용이와 월선의 사랑이 어쩜 그리고 슬픈지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오래전에 본 텔레비전에서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작가 박경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고향이 통영이시니 통영에 흔적을 남긴 이순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경리 작가는 “이순신은 정치를 예술로 승화시킨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셨다. 해설사를 하기 이전부터 이순신을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작가 박경리의 답은 감동이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했을 때 감동하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에 감동하기가 쉽지 않은데 정치를 예술로 승화시킨 분이란 말에 감동을 받았고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2008년 5월 5일 그 즈음 작가 박경리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뉴스를 듣고 있었는지라 나는 최참판댁을 지날 때 “자기야, 우리 원주 한번 가보자 박경리 선생님 병원에 계시다는데 생전에 꼭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라고 했더니 남편은 “심아, 니가 사춘기 소녀가?” 하면서 면박을 주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광양 쪽 매화마을을 들러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하니 오후 6시쯤 되었을까 피곤하여 침대에서 누우면서 텔레비전을 켰더니 박경리가 떠났다는 뉴스가 나왔다.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한 시간 전에 박경리 작가가 있는 원주에 갔으면 선생님을 뵐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너무 컸다.
그리고 2022년 5월 5일 남해방문의 해 서포터즈단으로 활동하는 남해가 아닌 곳으로 홍보를 위해 택한 곳이 최참판댁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이 박경리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날이었다.
우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박경리 선생과 나는 최참판댁에서 정신적 조우를 한 것이다. 박경리 작가는 통영, 하동, 원주를 문학과 문화로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인물이다. 문학을 빛내고 지역을 빛낸 박경리 작가의 정신이 살아있는 최참판댁에서 나는 위대한 작가의 정신이 후세들에게 길이 남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서재심]
시인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코스미안뉴스 객원기자
서재심 alsgml-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