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윤리가 뭘까?

- 목회 윤리는 분석이 어려운 미지의 영역임에 틀림없다

- 목회 윤리가 뭘까? -



작은 빌라에서 시작된 신혼생활은 평온했다. 신학대학원생이라는 자격을 갖추고 본 교단으로 돌아간 사역지는 작지만 따뜻한 교회였다. 20대 중반의 결혼생활은 친구인지 부부인지 모를 아내와 함께 즐거웠다. 결혼을 하니 학교생활도 더 안정되는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 가난했고 불편한 것은 많았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전도사님, 잘 지내세요?”

의외의 전화다. 첫 사역지에서 지도하던 학생의 어머니 집사님. 사실 집사님과 자주 연락하던 사이가 아니었기에 교회를 떠난 뒤 몇 년이 지난 후의 전화는 의외였다. 반가움보다는 불안함이 몰려왔다. “집사님, 잘 지내시죠?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인사치레 안부와 함께 들려온 소식은 나를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키게 했고 당장 운전대를 잡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것저것 잴 경황이 없었다.

「전도사님, 어떡해요. 우리 유진이가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뇌에 문제가 생겼다는데 원인도 모르겠고 의사는 어렵겠다는 말만 해요. 그런데 유진이가 전도사님을 찾아요. 보고 싶다고.」

첫 사역지 청소년부 예배는 토요일이었다. 스타렉스를 끌고 운행을 돌며 예배를 인도하고 저녁이 될 즈음에는 복귀 운행을 하며 아이들과 만남을 이어갔다. 늘 지각하던 아이. 뻔히 태우러 가는 것을 알면서도 자고 있어서 깨워 기다렸다 데리고 오기를 몇 번인지. 지각하지 않을 때가 드물었던 아이다. 뭔가 늘 뾰로통하고 말이 많던 여중생. 전형적인 모태신앙 청소년이다. 그래도 내가 이뻐하는 것을 아는지 결석은 거의 없었던 친구. 그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은 어린 전도사에게 너무나 충격이었다.

작은 경차를 급하게 몰아 도착한 경기도의 모 대학병원. 중환자 면회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시간에 맞추기 위해 무리한 운전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을 맞출 수 있었고 집사님과 조용한 인사를 나눈다. 면회 시간이 가까울 때, 담임목사님과 교인들이 들어왔다. 반가운 얼굴들이지만 티를 낼 수 없는 상황인지라 조용히 목례만 주고받는다. 담임 목사님의 어두운 표정이 아이의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까지만 해도 짐작조차 못했다. 아무 말 없이 유진이의 얼굴을 보고 마음으로 기도했다. 부디 살려달라고. 정해진 면회 시간이 끝나고 복도에서 성도님들과 근황을 나누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담임 목사님의 호출이다. 조용히 비상계단으로 향하더니 불쾌함을 드러낸다. 아니, 불쾌를 넘어 분노를 쏟아내었다.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교회 떠난 후 이렇게 교인들과 연락하는 것 아닙니다. 목회 윤리에 어긋나는 거예요. 앞으로 절대 교인들과 접촉하지 마세요.」

간단히 상황 설명을 드렸다. 아니, 해명이라고 해야 맞을까? 하지만 소용이 없다. 이미 나는 윤리도 없는 나쁜 전도사였으니깐. 아이는 중환자실에서 생(生)과 사(死)를 넘나들며 치열하다. 그리고 밖에서는 목회 윤리의 뜨거운 강연이 이어진다. 뭐가 중요한 걸까? 내려오는 차 안에서 목사님 입장으로 이해해 보려 시도한다. ‘20대 중반의 타 교단 전도사. 거리는 차로 약 3시간. 앞으로 접촉점 없을 가능성 높음.’ 전혀 신경 쓰일 부분이 없을 것 같은데. 모르겠다. 목회 윤리는 분석이 어려운 미지의 영역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져본다.

삽화 : 강신영

작성 2022.05.13 08:20 수정 2022.05.13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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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