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숨이 막힐 것 같은 유교적 이념 아래 조선시대 여인들은 죄지은 듯 규중(閨中)에 갇혀 부모 봉양하고 자식을 길렀다. 물론 궁중의 비극을 담은 ‘한중록(閑中錄)과 ‘인현왕후전’ 등은 여인의 붓끝에서 탄생했고, 또한 규방문학 등이 있다. 이 중에 허난설헌은 사대부 집안의 규수였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도 쓰라린 고통과 아픔을 시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조선조 최고의 시인이다.
난설헌은 조선 선조 때의 석학인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삼남삼녀(三男三女) 중 셋째 딸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오빠 허성, 허봉, 아래로는 하나뿐인 남동생 허균(許筠)이 있었다.
‘사람은 가도 문장은 남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난설헌은 자신의 모든 글을 불에 태워서 없앨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성차별과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에서 오는 고통과 남루한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싶어서였을까. 그렇지만, 아우인 허균은 누이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친정 등에 흩어져 있던 200여 수의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엮어 중국에서 간행되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일까 난설헌은 조선에서보다는 중국에서 더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허난설헌,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으로 난설헌은(許蘭雪軒) 호다. ‘난설헌蘭雪軒’은 여성의 미덕을 칭송하는‘난혜지질蘭蕙之質’에서‘蘭’을 가져왔고‘雪’은 버들가지 하얀 송이(서설絮雪)를 눈에 비유하는데, 이는 지혜롭고 고결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여성 즉, 허난설헌을 의미하며 시인 자신과의 동일성을 강조한 측면도 있다. 그녀의 시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 마지막 2구를 보자.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늘어져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차가운 달빛 서리에 붉게 떨어지네.
‘삼구三九’는 허난설헌 자신이 ‘3×9=27’로써 죽음을 상징하고, ‘홍타紅墮’는‘붉게 떨어지다’는 의미로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상징하는 시어로써, 자신이 27세에 죽게 될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는 시참(詩讖)의 시문이다. 이런 자신의 운명을 감지한 듯 난설헌은 어린 나이의 두 아이를 해를 걸러 잃고 쓴 <곡자(哭子)라는 시의 읊조림에 더욱 잘 드러난다.
(……)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存汝丘(현주존여구) 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네.
應知弟兄魂(응지제형귀) 너희 오누이 넋이야 응당 알지니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서로 어울려 놀겠지
(……)
지정무문(至精無文)이라고 했던가. 지극히 가까운 정분이나 지극히 절박한 감정에서는 글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한다. 더욱이 자식을 잃은 참척(慘慽)의 고통 앞에서 차마 어찌 글을 짓겠는가. 그러함에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서하지통(西河之痛)의 아픔을 피를 토하듯 쏟아내고 있다. 이렇듯 곡자에서는 사랑하는 두 남매를 잃은 큰 슬픔 앞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어머니의 참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지전으로 혼을 부르고’의 한 맺힌 듯한 시구를 보면 제대로 키우지 못한 죄로 통곡하는 심정은 애절하다 못해 처절한 초혼(招魂)의 비통함이 있다. 정지용의 시‘유리창’이 떠오른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 너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
조선조의 남존여비 사회 분위기와 그녀의 평탄치 않은 삶의 궤적 속에서도 시문학을 통해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존엄한 뜻을 글로 표출해 냈다는 점에서 허난설헌은 페미니즘( feminism)적 문학 활동의 요소와 발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새기며 필자는‘여류시인 허난설헌’이 아닌 ‘여류’라는 칭호를 빼고‘시인 허난설헌’으로 썼다.
비록 난설헌의 작품에 대한 폄하와 함께 표절 시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의 생각은 표절이 아닌 한시 표현상 운용의 묘를 극대화 시킨 환골탈태(換骨奪胎)나 점철성금(點鐵成金)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한과 평탄치 않았던 삶을 자신만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제까지 인식하고 비판의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분명 페미니스트로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난설헌은 3가지 恨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이 넓은 세상에 왜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났을까?, 하필이면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 수많은 남자 중에 하필이면 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을까? 닫힌 시대를 살면서도 시작으로 영혼을 불살랐던 여인, 어느 해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중부고속도로 아래에 있는 난설헌의 묘를 찾아갔다. 술 한잔 준비하지 못해 주변의 노란 들국화를 꺾어 상석에 올려놓았던 기억이 새롭게 난다. 그리고 두 남매의 봉분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문학사상 남성 중심의 사회적 규범을 벗어난 난설헌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그녀의 글,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한가할 때는 옛사람의 글을 보라)’를 맘속에 탁본하며 펜을 접는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문학작품 공모전 금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이메일 jisra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