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백제 26대 성왕이 전사한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답변이 튀어나온다. 백제 성왕은 신라로부터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전투에서 사망했다고. 구체적으로는 구천(狗川)이란 곳에서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고. 관산성(管山城)은 현 충북 옥천군 군서면을 가리키며 구천(狗川)은 현 충북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의 구진벼루를 가리킨다고.
이러한 정도는 중학생만 되어도 배우는 기본상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침없이 대답을 쏟아낸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한반도를 삼분한 상태로 서로 다투었고, 누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었으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고 배웠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인해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맞서 싸웠고, 어렵게 한강유역을 되찾게 되지만 신라 진흥왕이 배신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해 버리는 바람에 나제동맹이 깨어지고 그때부터 신라와 백제는 원수지간이 되어 싸우게 되었으며, 성왕의 태자인 여창(=나중에 27대 위덕왕으로 즉위함)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아버지인 성왕이 부하 몇 명만 거느린 채 아들 여창왕자를 위로하러 가다가 구천(狗川)이란 곳에서 신라 복병에게 기습을 당해 전사했다고. 기실 이것이 지금까지 역사학계의 다수설이자 정설처럼 여겨져 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필자는 차자표기를 바탕으로 한 지명과 인명 국명 연구를 하다 보니 관산성(管山城)과 구천(狗川)에 대한 학자들의 지명비정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삼국의 치열한 싸움에 대해서도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하면 고구려 신라 백제가 주로 싸웠던 곳은 한반도 중부지역 한강을 중심으로 하여 그 부근이 아니라 거제도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 일대였다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산성(管山城)은 경남 거제(巨濟)를 가리키고 구천(狗川)은 경남 거제도와 통영시 사이의 좁은 해협 견내량(見乃梁)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 관산성(管山城)은 구타모라(久陀牟羅) 현 거제도(巨濟島)
먼저, 관산성(管山城)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다.
『삼국사기』 잡지에 “관성군(管城郡)은 본시 고시산군(古尸山郡)이었는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라고 기록이 되어있어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관산성(管山城)은 바로 이 관성군(管城郡)이라 추정하였고, 그래서 관산성(管山城)을 현 충북 옥천군에 비정해 왔다. 필자 역시 그러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필자가 『국명풀이 백제(百濟)』라는 책에서 설명했듯이 ‘百濟’는 [온닮]이라 부른 나라이름을 차자한 표기이며, ‘巨濟’가 [크닮]을 표기한 것이다. 이 점을 알고 연구에 임해야 한다. 일본어에서 “쿠다라(くだら)”라고 일컫는 것은 사실 百濟가 아니라 巨濟를 가리키는 것인데 후대인들이 잘못 혼동하여 百濟를 ”쿠다라(くだら)“라고 하는 것이므로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백제를 가리키는 [ᄋᆞᆫᄃᆞᆱ]이란 국명은 당시 사람들이 [온담/안담/온돔/아담/아덤/안달/아달/오돌]처럼 일컫기도 하였던 바, 일본측 문헌에는 “安曇, 阿曇, 大伴, 御友, 阿積, 穗積, 鞍橋, 意多郞, 吾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차자표기되었다. 巨濟가 [크닮]을 차자한 표기라 하였는데, [크닮]을 연진발음하면 [크다므라]가 된다. ‘큰 담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그런데 일본측에서는 그 [크다므라]를 “구타모라(久陀牟羅)”라고 표기하였다. 그리고 그 “쿠다모라(くだもら)”를 일본인들이 다른 방식으로 차자하면 ‘관촌(管村)’이나 ‘관읍(管邑)’이라고 표기할 수 있다. 일본어로 ‘관(管)’을 쿠다(くだ)라 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흠명기 14년조에 구타모라(久陀牟羅)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 구타모라가 바로 거제도(巨濟島)인 것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관산성(管山城)과 동일한 지명이라는 얘기다. 흠명천황 14년은 서기로 553년, 백제 성왕 28년에 해당한다. 다음에 요약 인용한 내용은 흠명천황 12년(서기 551년)에서 15년(서기 554년)까지의 『일본서기』 기록이다.
▶흠명천황 12년(551)
성명왕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고구려)를 공격하여 한성을 획득하고 평양까지 공격함.
▶흠명천황 13년(552)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림.
▶흠명천황 14년(553)
1월, 2월, 백제가 사신을 거듭 파견하여 군사지원을 요청. 5월 내신(內臣=有至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로 감. 12월 성왕이 사신을 보내 전황을 알림.
12월 9일 백제왕자 여창이 신라를 공격. 함산성(函山城)을 격파함. 신라와 박(狛)이 연합하여 맞서므로 지원군이 절실하게 필요하며 죽사도(竹斯島) 근처의 군사들이 지원해 주기를 요청함.
왕자 여창이 신라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성책을 쌓음. 성왕이 아들 여창을 지원하기 위해 출병.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 고도(苦都)가 성왕의 목을 벰. 축자국조가 뛰어난 활솜씨로 신라군의 포위망을 뚫고 여창을 구출. 그래서 그를 안교군(鞍橋君; 쿠라지노키미)이라 부름.
▶흠명천황 15년(554)
1월 백제 사신이 내신(內臣)과 좌백련(佐伯連)에게 구원병의 파견 상황을 물음.
2월 백제왕자 여창이 아우 혜를 보내 성왕의 사망소식을 전함.
위 인용문에는 ‘구타모라(久陀牟羅)’ 외에도 ‘함산성(函山城)’ ‘죽사도(竹斯島)’ ‘좌지촌(佐知村)’ 같은 지명이 실려있는데, 이들 지명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기로 하겠다.
■ 함산성(函山城)은 고리산(古利山) 현 한산도(閑山島)
먼저 함산성(函山城)의 函은 상자나 궤짝을 의미하는 글자다. 상자나 궤짝을 우리말로 “고리”라 한다. 바느질도구를 담아놓는 상자를 “반짇고리”라 하는데 그 ‘고리’에 해당하는 한자가 바로 ‘函(함)’인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이 [고리뫼/kori-moi]라 일컫는 지명을 음차하여 적으면 고리산(古利山)이 되고 사음훈차하여 적으면 함산(函山)이 되는 것이다. 函山을 후대인들이 한자음 그대로 읽어 [함뫼/한뫼]라 부르게 되고 그 [한뫼]를 다시 閑山이라고도 표기하게 되니, 그것이 지금의 한산도(閑山島)이다. 1000년쯤 후인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왜적들과 많이 싸운 곳으로 유명한데, 그 옛날 삼국시대 때부터 상호간의 요충지로 뺏고 뺏기는 싸움이 많이 벌어진 곳이었던 셈이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는 ‘고리산(古利山)’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고리산(古利山)은 바로 함산성(函山城=한산도)을 가리킨다.
문무대왕이 영공(英公)과 함께 평양을 격파한 다음, 남한주로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옛날 백제의 명농왕이 고리산(古利山)에서 우리나라를 치려고 꾀하였을 때, 유신의 조부 무력(武力) 각간이 장수가 되어 격격(激擊) 승승(乘勝)하여 왕 및 재상 4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 세력을 꺾었으며, 또 부친 서현(舒玄)은 양주(良州) 총관이 되어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그 예봉을 꺾어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변민(邊民)들은 농상의 업을 편안히 하고 군신(君臣)은 소간(宵旰)의 근심을 없게 하였다. 지금 유신이 조고(祖考)의 업을 계승하여 사직의 신이 되고 출장(出將) 입상(入相)으로 그 공적이 많았다. 만일 공의 일문(一門)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만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의 직위와 상사(賞賜)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제3 김유신 하.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한 이병도 역주본 『삼국사기』에는 고리산(古利山)을 관산(管山)과 같은 곳으로 보아 현재의 충북 옥천이라고 주석을 덧붙여 놓았는데, 잘못된 주석이라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고리/kori]는 궤짝이나 상자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며 한자로는 函이나 箱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함산(函山)이 더 타당하다 할 것이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고리산(古利山)은 함산성(函山城)과 같고 관산성(管山城)은 구타모라(久陀牟羅)와 같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현재의 한산도와 거제도인 것이다.
■ 죽사도(竹斯島)는 축자국(筑紫國) 현 후쿠오카
죽사도(竹斯島)는 큐슈 북안의 축자국(竺紫國)을 가리킨다. 본래는 [담부라/담무라]라 하는 지명을 築의 약자인 ‘筑’과 ‘紫’라는 한자로 차자하여 표기했던 것인데 후대인들이 筑紫를 한자음 그대로 “츠쿠시(つくし)”라 읽고 그 [츠쿠시]를 다시 “竹斯(죽사)”라고 음차하여 적은 것이다. 이는 아마 ‘축자(筑紫)’를 ‘축족류(筑足流)’나 ‘도구사기(都久斯岐)’라고도 표기하였던 데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일본서기』 흠명기 14년조에 나오는 ‘죽사도(竹斯島)’는 현 큐슈의 후쿠오카(福岡)시 일대를 가리킨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뒤에다 섬을 의미하는 島를 붙여놓았는데, 아마 그 당시의 신라인들은 큐슈지역을 섬으로 인식했던 게 아닌가 싶다. 임나국(任那國)을 가리키는 목출도(木出島) 역시 끝에 島가 붙어있다. 임나국(任那國)은 말로국(末盧國)을 가리키며 현재의 마츠우라(松浦)에 비정된다는 점에 대하여는 『여기가 임나다』라는 책을 참고하시기 바라고, 여기서는 상술하지 않기로 하겠다.
『일본서기』에는 성왕을 죽인 인물이 좌지촌(佐知村)의 고도(苦都)라는 인물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우도도(高于都刀)라고 기록해 놓았다. [곧/kot]이라는 이름을 '고도(苦都)' 혹은 '고우도도(高于都刀)', '곡지(谷智)'라고 차자하여 적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출신지를 『일본서기』는 ‘좌지촌(佐知村)’이라 하였고 『삼국사기』는 ‘삼년산군(三年山郡)’이라 하였는데, 이는 본래 [사알/sar]이라 일컫는 지명을 그렇게 차자한 것으로 추측된다. 넓은 산비탈을 일컫는 원시지명어소 [슬/sur]에 대해서는 졸저 『국명풀이 신라』에서 상술한 바 있으니 그를 참고하시기 바라고 여기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원시지명어소 [슬/sur]은 [살/설/솔/술/슬/실/셀]로 쉽게 넘나들었으며 『삼국사기』 지명에는 ‘薩(살)’이란 한자로 음차표기되거나 ‘淸(청)’이란 한자로 사음훈차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해가 바뀌면 나이도 한 살 더 먹게 되는 바, [살/설]이라 일컫는 지명을 齡(령)이나 年(년)으로 사음훈차하여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덕왕이 삼년산군(三年山郡)을 삼년군(三年郡)으로 개명하고, 그후 또 지명이 보령군(保齡郡)으로 바뀌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말해, 사람들이 [살/sar] 혹은 [설/sur]이라 일컫는 지명을 삼년산(三年山)이라 차자하여 적기도 하고 보령(保齡)이라 차자하여 적기도 했으며 좌지(佐知)라 차자하여 적기도 했을 거라는 얘기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삼년산군(三年山郡)은 삼년군(三年郡)을 가리킨다고 보고 현재의 충북 보은군에 비정하였는데, 일단 필자도 이 견해가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비정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명은 같거나 비슷한 것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섣불리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성왕을 죽인 고우도도(高于都刀, 또는 苦都)의 출신지가 충북 보은이 아니라 경남 고성군 삼산면(三山面) 일대일 거라고 추측한다. 고성군 삼산면 상리면 하이면 일대를 고려시대에는 ‘보령향(保寧鄕)’이라고 했다 한다. 保齡과 保寧은 한자가 다르지만 표기자의 실수로 와기자가 쓰였을 수 있는 일이며, 해당지역에 [살/설]을 음차한 표기라 할 수 있는 ‘서리(西里)’ ‘상리(上里)’ 같은 이름이 남아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성군 삼산면 일대는 ‘함산성(函山城=古利山. 현 한산도)’, ‘관산성(管山城=久陀牟羅. 현 거제도)’ 등과도 잘 합치가 되는 곳에 위치해 있어 그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 진성(珍城)은 명진현(冥珍縣) 현 거제 명진리
『삼국유사』에는 ‘진성(珍城)’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진흥왕 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승성(承聖) 3년 9월에 백제군사가 진성(珍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8천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쳐서 고구려를 치려고 했었다. 이때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매여 있다. 만일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게 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한 것이다.
승성(承聖)은 양(梁)나라 효원제(孝元帝)의 연호로 승성 3년은 서기로 554년이다. 백제 성왕32년, 신라 진흥왕15년에 해당한다. 같은 554년에 일어난 같은 사건을 적은 것이다. 우리는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가 되찾은 한강유역을 차지해 버렸으며, 백제 성왕은 전쟁을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전투중인 아들 여창왕자를 위로하기 위해 불과 50여명의 병사들만 거느리고 가다가 신라 복병에 걸려 전사하고 말았다는 도식적인 줄거리에만 익숙해 있는데, 위에 인용한 『삼국유사』의 내용은 그와는 정반대의 상황을 기록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러한 상황 설명은 논외로 하고 오로지 지명 위주로만 논하기로 하겠다. 위 인용문에는 진성(珍城)이란 지명이 등장하는데 진성(珍城)은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거제시 거제면 명진리, 명진(溟珍)이 바로 진성(珍城)이다. 『삼국사기』에는 명진현(溟珍縣)이 본래 매진이현(買珍伊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명진(溟珍)으로 개명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명진 폐현 설명에서 “고려 원종(元宗) 때에는 왜(倭)를 피해 진주 영선현(永善縣)에 임시로 옮겨 살게 하였다. 본조 공정왕(恭靖王; 조선 2대 정종) 때에 강성현(江城縣)과 합병하여 진성(珍城)이라 하였고, 세종 때에는 본섬에 되돌려 다시 내속시켰다.”라고 하였다.
명진현(溟珍縣)을 진성(珍城)이라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 초기이지만 그 이전 고려시대부터 그렇게 부르기도 했으리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성(珍城)은 바로 명진현, 매진이현(買珍伊縣)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자 珍(진)은 梁(량)과 함께 [돌/tor]이라 하는 순우리말을 차자할 때 많이 사용하던 글자다. ‘땅, 터’를 뜻하는 말이 [돌/tor]이다. 아주 너른 땅은 [노르돌]이라 하여 鷺梁(노량) 혹은 奴珍(노진)이라 쓸 수 있고, 으뜸가는 땅은 [맏돌]이라 하여 麻梁(마량) 혹은 馬珍(마진)이라 쓸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문자 없이 입으로만 주고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발음이 조금씩 왔다갔다 넘나들기 일쑤였다. [맏돌/말돌/마돌/매돌]이 쉽게 넘나들었다. 買珍伊(매진이)는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는 [마돌/매돌이] 정도로 일컬었던 지명을 차자한 표기인 것이다. 『일본서기』는 여창왕자(훗날 위덕왕)의 백제군이 함산성(函山城=古利山, 한산도)을 격파하고 신라의 구타모라(久陀牟羅=管山城, 거제도)에 들어가 성을 쌓았다고 기록하였고, 『삼국유사』는 백제군사가 진성(珍城, 거제 명진리)을 침공해 남녀 3만9천명과 말 8천필을 잡아갔다고 기록하였다. 가만히 따져보면 일맥상통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얼른 보기에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크게 다른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4년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 고구려본기 양원왕 10년조의 기록을 차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서기 554년의 기록이다.
(백제 성왕) 32년 7월에 왕이 신라를 침습하려 하여 치니 보기병 50명을 이끌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 함께 싸우다가 (성왕이) 난병(亂兵)에게 해를 입고 돌아갔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조
(신라 진흥왕) 15년 7월에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 왕 명농이 가량(加良)으로 더불어 관산성(管山城)을 내공(來攻)하므로,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마주 나가 싸우다가 이(利)를 보지 못하게 되자, 신주(新州)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병(州兵)을 이끌고 와서 교전함에 이르러 비장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우도도(高于都刀)가 갑자기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제 제군(諸軍)이 승승(承勝)하여 크게 쳐서 이기고, 백제의 좌평 4명, 사졸 2만 9,600명을 베어죽이니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간 것이 없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
(고구려 양원왕) 10년 겨울에 백제의 웅천성(熊川城)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10년조
백제 성왕이 전사한 곳을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구천(狗川)’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구천(狗川)은 어디일까? 종래의 연구자들은 구천(狗川)가 충북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에 있는 ‘구진벼루’를 가리킨다고 설명해 왔으나, 필자는 그러한 견해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구천(狗川)은 당시 사람들이 [가이ᄂᆞ리]라 일컬었던 이름을 狗와 川이란 한자로 차자하여 적은 것이다. 狗는 [가이]를 사음훈차한 표기이고, 川은 [나리]를 진의훈차한 표기이다. [가이나리]를 현대한국어로 하면 [개내(갯내)]이다. 삼국시대에는 개(dog)를 “가이”라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의 송(宋)나라의 손목(孫穆)이 쓴 『계림유사』란 책에 “犬曰家稀(견왈가희)”라 하여 고려 사람들은 犬을 ‘가희’라고 한다고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한국어 ‘개(dog)’를 한자로는 犬 혹은 狗라 쓴다. 그러니까 [가이나리]라는 지명을 한자로 ‘狗川(구천)’ 혹은 ‘犬川(견천)’이라고 차자하여 적을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狗川 혹은 犬川이라 차자된 지명이 본래 뭐라고 부르던 것인지 모르는 후대인들은 [개내] 혹은 [갯내]라 일컫는 소리와 ‘狗川, 犬川’ 같은 표기만 보고는 그 지명을 ‘見乃’라고 표기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견내(見乃)’는 본래 지명과는 거리가 있는, 살짝 왜곡이 된 표기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경남 통영시와 거제도 사이에 보면 양쪽 해안이 거의 맞닿을 듯이 보이는 아주 좁은 해협이 있다. 견내량(見乃梁)이다. 1000년 후에 이순신장군이 왜적들과 싸운 곳으로 유명하다. 이 견내량(見乃梁)이 바로 구천(狗川)이고, 백제 성왕의 사절지라는 게 필자의 견해이다.
차자표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보면 [가이놀]이라 일컫는 지명을 구노(狗奴)라 차자하여 쓸 수도 있고 구양(狗壤)이라 차자하여 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라 경덕왕이 금물노군(今勿奴郡)를 흑양군(黑壤郡)으로 개명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구양(狗壤)’, ‘구노(狗奴)’, ‘구천(狗川)’이 같은 지명일 수 있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구양(狗壤)’이란 지명은 『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다루왕조를 보면 ‘구양성(狗壤城)’과 ‘와산성(蛙山城)’이란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다루왕) 37년에 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옮겨 구양성(狗壤城)을 쳤다. 신라가 기병 2,000명을 일으키므로 이를 역격(逆擊)하여 패주시켰다.
39년에 와산성(蛙山城)을 쳐서 빼앗고 200명에게 주둔시켜 지켰는데, 얼마 안 있어 신라에게 패하였다.
이 구양성과 와산성은 이후로도 백제와 신라가 서로 뺏고 뺏기기를 계속한 성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성이라 할 수 있다. ‘구양성(狗壤城)’이 바로 [가이놀]을 차자한 표기로 성왕의 사절지인 구천(狗川)을 가리키고, 현 경남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의 견내량(見乃梁)에 비정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술하였으니, 여기서는 ‘와산성(蛙山城)’에 대해서만 논하기로 하겠다.
와산성(蛙山城)의 蛙는 ‘개구리 와’자 이다. [개고리뫼]라 일컫는 지명을 蛙山이라 표기한 것이다. 필자는 처음에 蛙山이 『일본서기』에 보이는 기질기리(己叱己利)와 같은 곳을 가리키는 줄 알았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己叱己利는 [곳고리]를 차자하여 적은 것으로 蛙山과 일맥상통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질기리(己叱己利)는 큐슈의 오고리(小郡)시에 비정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걸 깨닫고는 와산성(蛙山城)의 위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에 딱 들어맞는 곳을 찾아냈다.
바로 경남 거제시 하청면에 있는 앵산(鶯山)이다. 개고리와 굇고리(꾀꼬리)는 음이 비슷하다. [골+골]로 중첩된 지명이 [고고리]인 바, 그것을 蛙(개구리 와)라는 한자로 차자하여 적기도 하고 鶯(꾀꼬리 앵)이란 한자로 차자하여 적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차이가 없는 지명 [kokori]를 일본에서는 ‘己叱己利’ 혹은 ‘小郡’이라고 차자하여 적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명은 원시지명어소 [굴/kur]이 중첩하여 이루어진 ‘고구려(高句麗)’ 국명에 대하여 연구를 하고 나면 점차적으로 하나씩하나씩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구양성(狗壤城)과 와산성(蛙山城)은 신라와 백제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지명이므로 신중하게 파악을 시도해야 할 터인데, 종래의 학자들은 덮어놓고 한반도 중부지역 현재의 충북 옥천 부근일 거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엉터리 비정을 남발해 왔다.
뿐만 아니라, 관미성(關彌城)이나 석현성(石峴城), 도곤성(都坤城), 금현성(金峴城), 우산성(牛山城)등에 대해서도 잘못된 비정을 내놓는 바람에 우리의 고대역사 자체를 완전히 왜곡시켜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 성왕의 사절지 '구천(狗川)'은 충북 옥천이 아니라 경남 통영시 견내량(見乃梁)을 가리키고 ‘관산성(管山城)’은 경남 거제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아야 올바른 역사를 파악할 수 있고 역사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한반도 중부에서만 치열하게 싸웠을 거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관련 분야 연구자들의 맹성(猛省)을 촉구한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