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새, 알바트로스는 북반구 추운 지역에 사는 큰 새다. 선원들은 항해 중에 흔히 볼 수 있는데 저 높은 창공에서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서서히 나는 모습은 말 그대로 위풍당당한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커다란 날개와 몸집으로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한참을 뒤뚱거리면서 달려야 하기에 물 위에서 도약하는 데는 오히려 커다란 몸집과 날개가 부담이라고 한다. 또한, 그 무게로 인해 내려앉을 때는 사뿐히 앉지 못하고 넘어질 듯 구르듯이 앉는다고 한다.
알바트로스는 2미터 정도 길이의 날개를 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창공을 날다가 지치면 바다 위로 내려와 쉰다고 한다. 한마디로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큰 새이며 한자 문화권에서는 신선의 이름처럼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새의 날아다닌 모습이 어떠한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는 그의 시 <알바트로스>에서 비유와 상징을 통해 이 새를 시인에 비유했다. 높은 창공을 나는 알바트로스의 멋진 비상은 그 어떤 새들도 흉내 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지상에 내려오면 커다란 몸짓 때문에 하늘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조차 둔하기에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 그래서 ‘바보새’라는 별칭을 갖는다.
이러한 모습이 현실에서 고통받는 시인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시인은 세상을 바라보는 직관력과 꿰뚫어 볼 수 있는 예지력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순수한 시적 영감으로 하늘을 날며 살지만, 막상 지상에서는 유배된 듯한 삶을 살고 있다. 또한, 야만스럽고 비열한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질시를 받는다. 이러한 숙명 아닌, 숙명이 바로 뱁새들이 언감생심 흉내 낼 수 없이 구만리 장천을 나는 대붕인 알바트로스의 모습과 그와 대비되듯 뱃사람에 잡혀 조롱당하는 그의 모습이 시인과 같다는 것이다.
시인은 언어를 조탁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언어의 마술사이기도 하다. 높이 나는 알바트로스가 다른 새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시인 또한 남다른 관조와 시선으로 형상 너머의 것을 본다. 그러나 알바트로스가 지상에 내려앉는 순간 불편한 자세로 놀림 받고 조롱당하면서 ‘바보새’취급을 받듯이 일반적으로 경제적 개념을 모르는 시인, 그래서 생활인으로서는 다소 무능한 시인은 그저 창작하는 시인일 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인은‘바보새’라 불리는 알바트로스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 보들레르의 시를 보면 뱃사람들에게 잡혀서 날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알바트로스에 시인 자신을 투영시켜 박해받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인간들의 세상살이 자체가 그런 것 같다. 도움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와 그리고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멸시하고 돈과 명예와 지위에 집착하면서 아빠, 엄마 찬스 쓰는 인간들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부조리한 세상살이에서도 오직 자신의 이상과 꿈과 고귀함을 버리지 않는 사람만이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쳐 저 높은 창공을 알바트로스처럼 비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만 추해지지 않고 멸시와 질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시인 정신’이야말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들레르는 그의 시 <알바트로스>에서 현실에서 조롱당하고 낙오된 시인의 운명에 대한 한탄, 그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 괴리된 시인의 운명에 대한 것을 시로 표현하고 또한, 생활인으로서의 무능함을 알바트로스에 빗대어서 노래하고 있다.
높은 하늘을 비상하는, 그래서 오직 하늘을 날 때만이 존재의 가치가 있는 알바트로스, 바다 위에, 또는 배 위로 잡혀 오는 순간 커다란 몸집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는 우스꽝스럽고 바보가 되는 새, ‘바보새’, 이 새가 바로 시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무능함 때문에, 주변에서 무시와 질시 당하는 것과 같이 지상에서 보이는 추한 꼴의 알바트로스 모습에서 시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다.
이처럼 방금까지 우아한 날갯짓으로 바다 위와 하늘을 날던 멋진 새가 뱃사람들의 갑판 위로 잡혀 와 우습고 흉한 꼴이 된 알바트로스. 선원들이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리면서 비웃고 어떤 선원은 절름거린 병신 흉내를 낸다. 이처럼 시인 또한, 하늘의 왕자가 되어 폭풍 속을 헤치면서 다니지만, 지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 무능한 생활인이 된다. 이렇게 시인은 높은 이상과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지만, 현실적인 삶에서는 다소 뒤떨어지고 서툴고 어색할 뿐이다. 이러한 시인의 모순성을 이 시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어찌할 것이나! 시계추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얽매여 시시포스 (Sisyphos)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삶을 변화시켜라”라는 랭보의 말처럼 우리의 삶을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되고 놀잇감이 되더라도 난, 장자나 노자처럼, 김수영과 이상처럼, 보들레르와 말라르메처럼 사상과 시의 얼혼이 융합하고 통섭하는‘바보새’인 시인이 되고 싶고, 알바트로스가 되고 싶은 것이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문학작품 공모전 금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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