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한산대첩을 그린 영화 '한산'을 관람했다. 이순신 장군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좀 더 세밀하게 봐야겠다는 생각에 볼펜과 메모지를 갖고 중간중간 메모를 하면서 보았다.
전투 장면이 장쾌하고 여기저기 극적인 요소를 픽션으로 가미하여 위기감을 고조시키다가 반전을 꾀한 전체적인 스토리 구성이 돋보였다. 김한민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들의 노력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역작이라고 생각된다.
인상적으로 남는 대사는, 임진왜란 전쟁은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라는 것과, 전세를 뒤집기 위해 "압도적 승리가 필요하다"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이었다. 그리고 학익진을 수성전(守城戰)을 펼치는 바다 위의 성채에 비유한 것도 참신하고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한산대첩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역사적 기록은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보고한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이라는 장계다. 한산대첩의 전개 과정과 결과가 이 보고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문헌 기록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 답사를 가장 많이 한 필자의 현장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영화 한산의 내용과 역사적인 팩트는 무엇인지 일단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한산대첩 당일인 1592년 7월 8일(이하 음력) 오전에 견내량에 정박해 있던 약 70여 척의 왜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서 끌어내기 위한 작전을 살펴보자. 영화에서는 광양현감 어영담이 자원하여 판옥선 3척을 이끌고 견내량으로 들어간다. 선발대가 안갯속에서 혼전을 펼치는 사이에, 삼도수군 연합함대가 견내량 입구까지 압박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부분에 대해 견내량파왜병장의 기록을 살펴보자. 미륵도 서측 당포에 정박해 있던 조선수군 연합함대는 한산대첩 하루 전날 당포 목동 김천손으로부터 "견내량에 적의 대선 중선 소선 70여 척이 오후 2시쯤 거제도 북단 영등포(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에서 내려와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다음날 아침 이순신 연합함대는 미륵도 남단을 돌아 한산도 앞바다로 진출했다. 이때 왜군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선봉으로 나와서 우리 함대를 정탐하고는 견내량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군이 뒤쫓아 들어가니 견내량에는 왜군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이 대열을 갖추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판옥선 5~6척을 협소한 견내량으로 보내어 싸움을 걸게 한 뒤 적의 대규모 선단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냈다.
영화에서는 판옥선 3척이 견내량으로 접근해 들어갔다가 혼전이 벌어지고 등선육박전까지 벌이는 것으로 나온다. 이 과정에서 견내량의 물살에 휘말려 암초에 좌초되는 적선도 묘사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판옥선 3척이 간 것이 아니고 5~6척이 들어갔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포격만 가한 채 빠져나오면서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냈다. 사소한 것이지만 그날 안개는 없었기에 적의 선봉 정탐선을 멀리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학익진을 펼치는 과정에 통신 수단으로 방패연을 날리는 장면이 나온다. 전술비연에 대한 구전과 설화는 있지만, 연을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북, 호각, 깃발, 나팔, 신기전 등이 통신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영화에 사용된 지도를 유심히 보았다. 한자와 함께 한글을 병기해 놓은 지명이 있었다. 요즘 한글세대들을 위한 배려인가는 몰라도 뭔가 좀 불편해 보였다. 통영(統營)이라는 지명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1603년에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을 고성 땅 두룡포로 옮기면서 생긴 것인데, 1592년 한산대첩 당시의 작전지도에 통영이 등장한 것은 고증을 잘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산대첩에서 이긴 후 더 큰 압도적 승리를 위해 다음날 안골포로 진격할 것이라는 이순신 장군의 대사와 함께, 안골포를 '진해 땅 안골포'라고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골포는 그 당시 진해 땅이 아니고 웅천 땅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진해 땅은 현재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일대다.
그리고 한산대첩에서 승리한 이순신 함대가 1592년 7월 11일 왜군의 본영인 부산포까지 진격했다는 자막이 나오는데, 역사적인 팩트는 안골포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연합함대는 낙동강 하구의 몰운대까지 가서 시위를 한 후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복귀했다. 이순신 장군이 적의 소굴인 부산포를 공략한 것은 같은 해 9월 1일의 일이었다. 자막에 나오는 날짜는 괄호 속에 음력이라는 내용을 병기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학익진으로 적을 물리치는 전투 장면은 정말 대단했다. 거북선도 상당히 치밀하게 고증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 척이 등장하는데, 용머리가 들락거리면서 총통을 발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어린진(魚鱗陣)으로 진격해 오는 적 함대를 학익진(鶴翼陣)의 압도적 화력으로 격멸해버리는 전투 장면과 혼신의 힘을 다해 노를 젓는 격군들의 모습은 눈물겨웠다.
컴퓨터 그래픽이 없었다면 이런 영화는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그래픽 담당자들이 현장답사를 꼼꼼하게 하여 사진 자료를 확보한 후 한산도와 미륵도 그리고 견내량 일대의 지형을 참고해서 그렸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전적지 답사를 많이 한 사람이나 현지인들이 보면 현장과는 동떨어진 그림에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산대첩에서 승리할 수 있게 이순신 장군에게 결정적 제보를 해준 조선의 민초 당포 목동 김천손에 대한 언급이 영화에 없는 것은 못내 아쉬웠다. 견내량에 집결한 70여 척의 왜선에 대한 김천손의 제보를 기초로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이순신 장군은 압도적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갈 무렵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이순신 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져 죽는다. 극적인 감동을 주기 위한 픽션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후미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조선수군이 쏜 화살이 갑옷을 뚫고 들어가 중상을 입고 견내량을 지나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훗날 명량해전에서 다시 이순신과 만나게 되는 악연이었다.
이상에서 영화 '한산'에 대한 팩트체크를 해보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로 봐야 한다. 영화 '명량'과 비교했을 때 큰 흐름에서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영화 '한산'은 명품이다. 나는 몇 년 전에 김한민 감독과 함께 여수에서 범선을 타고 고흥 사도진까지 가는 답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산을 제작하는데 들인 노고를 치하 드리며, 시나리오 작가와 이순신 역의 박해일 님과 제작진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