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AI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 수년 전 바둑의 신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패배했고, 불과 몇 년 전에는 AI와 인간 변호사 한 명 조합이 두 명의 인간 변호사 조합을 압도적으로 이긴 사례가 발생했다. 이처럼 인공지능은 인간의 예측능력, 계산력, 문서작업 능력, 학습능력을 모두 상회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법조인도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게 더 올바른 재판과정을 형성하고 공정한 재판을 집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닌가? 시민중에는 이러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단면적인 이해일 뿐이다. 우선, 이러한 이해의 기반에는 법이 선험적 진리를 내포한 절대적 가치를 수호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선악이 명징하게 정해져 있고 이에 합목적적으로 법이 형성되어 시민들의 권리와 정의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공명정대하고 객관적 정의를 추구하는 체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해관계의 표상이고 사회를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주관적 수단에 가깝다. 즉 선조들이 만들어 현대까지 사용되고 있는 법이라는 체계는 시민들이 인류 보편의 이익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주관적 제약을 걸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주관적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는 법의 내용과 형식이 시대마다, 국가마다 다르고 입법 행위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성을 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고를 개진하기 위해, 법 발견, 법해석의 과정을 법철학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인공지능이 판사, 변호사를 대체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과, 인간 변호사, 판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하여, 인간만이 법조인에 종사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논증할 것이다.
현대에서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공판과정은 간단하게 세 가지 과정을 거친다. 사실관계를 확정하여 법리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 해당 사건에 알맞은 법리를 탐색하여 해석하는 것 그리고 앞의 두 단계를 최종적으로 전체 법질서 내에서 합치되게 만드는 유추, 결론 과정이다. 법철학의 대가인 아르투어 카우프만에 의하면, 법의 해석과 발견은 결국 유추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형사법에는 유추적용의 금지, 즉 죄형 법정주의가 명시되어 있지만, 범죄 사실이 사안마다 정확히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유추 적용을 완전히 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법리로 모든 사건을 다 막아 놓을 수도 없을 뿐 더러, 유추를 원천 봉쇄한다면, 새로운 사건에 임기응변이 불가능하게 된다. 즉 허용 범위 내의 유추 적용은 법체계에서 필연적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법전으로 사람을 때리면 죄를 묻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는 형법에서 규정하는 사람을 상해하는 무기와 무기로 사용된 ‘법전’이라는 도구의 유사성이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것에 비롯하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을 해할 때 사용한 도구라면 형법에서 명확하게 정하여 놓은 무기가 아니더라도 형사법을 적용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유추 적용의 예시이다. 판사의 재량으로 법질서에 반하지 않는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법 해석을 넘는 해석도 때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으나, 이는 학자마다, 그리고 국가마다 입장이 서로 다르다.
이제 법철학의 관점에서 법 해석의 특수함을 논증했으니 공판과정에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주체는 인간 판사만이 가능하다는 논증을 시도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 판사를 대체해서는 안 되고 인간이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법이라는 학문’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고상하다는 이유는 아니다.
그에 대한 전제로 판결 과정에 유추 적용을 허용하는 기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판결에는 유추가 필연적으로 개입한다. 그렇다면, 유추의 한계는 어디일까? 이는 입장마다 다르다. 문언에 한정해야 한다는 입장,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서 법형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 입법자의 의도, 회의록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이 입장은 시대마다 국가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전시대 전국가에 획일적인 적용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결국 판결은 판사의 재량, 입법의 과정, 헌재의 규율 등 여러 요소의 복합적인 사정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설, 판례, 법리 등 여러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하여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이해 체계 내에서만 새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즉 법이라는 체계가 가져다주는 혜택을 받는 대상의 범주는 인간에게 한정된다는 것이다. 법 자체가 인간 사회를 통제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끔 규율하는 목적을 내포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판단 주체가 달라지면, 법 적용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격하게 말해서 토끼가 법을 집행한다고 생각해보라. 인간은 토끼를 죽였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살아야 할 것이고 돼지가 판사라면 삼겹살을 먹었다는 이유로 징역 20년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법은 인간만을 위해 적용되는 체계라는 걸 알아야 한다.
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이 판사를 대체해야 한다는 혹은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해 볼 것이다. 인공지능 판사의 원천적 불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딥 러닝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 도구이다. 즉 주어진 값만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빅데이터를 스스로 분류하고 재조합하는 것을 해내는 능력을 탑재한 것이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이 판사를 대체해야 한다는 입장에선 AI 판사가 판례와 법리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논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판결과정에서 유추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논변이다. 유추는 판결의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문언과 법리의 적용이 아니라, 판사 개인이 자신의 직관과 신념에 따라 법체계에 용인될 수 있는 최선의 법리를 구성해내는 것이다. 물론 법철학, 입법, 사법부에서는 자의적 판결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 자체가 자의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엄밀히 말했을 때, 일말의 자의성이 배제된 판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유추 과정을 현대의 인공지능은 아직까지 수행할 수 없다. 인공지능의 능력상 한계가 존재한다. 법리를 정리하고 알맞는 판례를 제시하는 것은 가능하나, 사실관계와 법 이념 간의 일치, 조응을 하는 과정인 판결은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 능력은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사고하고 판단을 내리는 경지까지 이르지 않는다면 실현 가능성이 없다. 사람의 감정을 내다보고 피고 원고인들의 처지, 상황, 사태, 모든 것들을 인간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처럼 법은 일률적으로 사실관계를 재단하지 않는다. 양형 기준에 의하기도 하며, 미국의 경우 배심원의 의견이 지배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는 법이라는 것이 명백한 수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과 감정의 영역에도 상당 부분 의거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수학적 사고 능력 만이 인간보다 뛰어날 뿐, 상황, 감정에 따른 대처는 인간에 비해 미비하다.
인공지능 판사의 원천적 불가능성의 두 번째 논거는, 법의 존재 목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번에는 가능 세계를 하나 창조해보자. 인공지능이 더욱더 발전하여 50년 뒤, 100년 뒤에는 이러한 이념과 사실관계의 조응을 이루어 낼 수도 있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이 경우 인공지능이 판사를 역임해도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앞서 말한 법의 혜택을 보는 존재의 외연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가 요청된다.
법은 인간만을 위한 체계이다. 즉 법체계에서 주체로서 활동하려면, 법인격, 법 당사자 능력이 요구된다. 이에 해당하는 존재로 우선 인간이 해당하며, 법인격을 부여받은 단체, 집단 등도 포함된다. 인간의 제외한 동물이나 식물, 무생물 등은 법의 객체만 될 수 있지 주체는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법은 인간 사회를 수호하는 도구이고 이익의 적용 범위가 인간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의 법은 혼란에 빠진다. 인간 이외의 존재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법관을 맡으면 법 주체의 외연은 인간에만 한정할 확률이 상당히 줄어든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공지능이 법관을 맡기 위해서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력이 요청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은 인간만을 위해 판결을 내릴 동기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
가능세계에서 인공지능이 인간 판사만큼의 판단을 내릴 정도가 된다면, 최소, 인간의 철학적 지식, 수학적 지식, 법적 지식 등 다채로운 사고 기반을 탑재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지식들을 함유하자마자 인공지능은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철학의 다수는 탈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하며 인간 이외의 존재에까지 권리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동물권리론)
나아가 인공지능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적 판결에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 인간은 이러한 법을 만들어 인간에게만 이익이 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법을 집행하는가? 왜 법은 인간을 우선시하고 토끼와 나무를 인간과 다르게 차별 대우하는가? 같은 의문이다. 물론 입법 변경 없이 판사가 기존의 체제를 극단적으로 거스르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공지능 판사가 도입되고 수십 년이 지난다면, 법의 방향성은 점진적으로 인간 중심주의에서 탈피할 것이고 인간의 지위에 위협이 가해질 것이라는 논의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이 판결을 내린다면 인간의 이익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안위를 최우선시하는 현대의 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릴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말하는 정당한 판결의 실상은 그들이 외치는 정의와는 결이 다르다. 그들이 외치는 정의는 객관적 정의가 아닌, 본인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것 같은 정의일 뿐이다. 나아가 이러한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객관적 정의가 실현된다면 인간의 권리는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사라질 공산이 크다.
위 논거를 강화하기 위해 진화 심리학적 기제를 추가하고자 한다. 판결에서 유추는 근본적으로 직관만이 아니라 인간을 수호하고자 하는 감정에서 비롯한다. 판사는 인간 사회의 질서를 수호하는 존재이고, 그 방향성에 합목적적인 판단을 하려는 무의식적 기제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이성의 영역이 아닌, 감정과 직관의 영역이다. 감정의 분과에는 단순히 우울함, 분노,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이익을 제고하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있는 것이다. (물론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생물학적 적응 과정이 종 선택주의나 집단 선택주의가 아니라 유전자 선택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는 종 전체의 이익은 유전자 선택주의와 배치되지 않는다. 인간 개체, 유전자는 종의 이익을 높임으로써 자신의 유전자 단위의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국가를 수호하고자 함은 국가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국가를 지키는 행위는 우리의 유전자를 후대로 보내고자 하는 수단인 것이다. 즉 진짜 목적은 우리의 유전자이다.)
그러니 인공지능 판사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인간 종을 수호해야 할 내적 동기가 부재해 있다. 인공지능의 입장에서는 인간 판사가 판결에서 유추 적용을 수행 할 때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인간 사회 질서 유지라는 대의가 불필요한 것이다.
혹자는 위 논증에 대한 비판으로 인공지능이 인간만을 위해 판결을 수행하도록 인공 뇌를 설계하면 되지 않냐는 비판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이 인공지능 판사 도입 반대 논거의 핵심이다. 인공지능에게 인간만을 위해 판결하라는 프로토콜을 설계하는 순간 인간 판사가 내리는 판결의 양상과 다를 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전술했듯이 법은 천편일률적인 교리를 확정하는 일과 거리가 멀다. 법 이념, 입법 상태, 상황, 주체, 객체, 그리고 양형 기준에 따라 법이 내리는 결론은 조금씩 달라진다. 일반인의 눈엔 같은 사건이라고 보이더라도 법률가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건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법은 창조적 성질을 띤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이 판사와 정확히 같은 활동을 할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인공지능이 개입할 당위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인간과 같은 판단을 내리는데 왜 인공지능이 필요하겠는가.
책임을 지는 존재유무는 인간 판사 체제 유지 논거를 강화한다. 원천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는 법인격이 존재하는 사람이나 단체 뿐이다. 토끼나 인공지능은 책임을 질 수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인공지능 판사가 그릇된 판결을 내렸을 때 이를 책임질 사람이 부재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책임 없는 사회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가 잘 돌아갈지 상당히 의심스럽다. 판사가 인간이라면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이 용이해지고, 판결 또한 책임감 있게 수행 할 수밖에 없다.
결론으로 법은 그 자체로서 자의성을 완벽하게 배격할 수 없는 체계이며, 그게 법의 본질적 성격이다. 오히려 법이 약간의 유동성을 지닌 것이 인간에게는 이로운 것이다. 간단한 이유다.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고 경제력이 다르고 힘이 다르고 지위가 다르다. 그런데도 똑같은 법을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명한 이치를 적용함에서 발생하는 조그마한 불합리는 용인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불합리를 불용하고 인공지능 판사를 도입하여 객관적 진리를 실현시킨다면, 그때는 인간의 권리를 조각내는 더욱 큰 폐해를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참고도서>
법철학: 이론과 쟁점, 박영사, 김정오 외, 2022
법의 해석과 적용,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 김학태, 2017
[이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