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에 대하여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은 한국의 역사책에는 실려있지 않으며, 『일본서기』에 실려있는 이름이다. 먼저 아직기(阿直岐)에 대하여 두산백과사전에 설명해 놓은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는 아지길사(阿知吉師)로,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아직기(阿直岐)로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왕(近肖古王)에서 아신왕(阿莘王) 대 사이에 왕명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왕에게 말 2필을 선사한 후 말 기르는 일을 맡아 보았다. 그후 일본 왕은 그가 경서(經書)에 능통한 것을 보고 태자(太子:菟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백제의 박사(博士) 왕인(王仁)을 초빙하여 일본에 한학(漢學)을 전하게 하였다. 뒤에 아직사(阿直史)라는 일본의 귀화씨족이 나타났는데, 그는 이 씨족의 선조이다.
그리고, 같은 두산백과사전에서 왕인(王仁)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에는 "오진[應神]천황 15년 가을 8월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좋은 말 2필을 바치니 아직기에게 말을 돌보게 하였는데, 아직기가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우지노와키이라츠코[兎道稚郎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천황이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하고 물으니, 아직기가 '왕인이라는 사람이 뛰어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불렀으며, 오진천황 16년 봄 2월에 왕인이 오자 태자의 스승으로 삼고 여러 경전과 서적을 배웠는데 막힘이 없었다. 왕인은 후미노오비토[書首] 등의 시조이다"라고 적혀 있다.
또, 《고사기(古事記)》에는 "백제의 조고왕(照古王)이 아지길사(阿知吉師)를 시켜 말 암·수 1필씩을 바쳤으며, 현명한 사람이 있으면 보내라 하니 화이길사(和邇吉師)를 보내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千字文)》 1권 등 모두 11권을 바쳤다. 화이길사는 후미노오비토[文首] 등의 조상이다"라고 적혀 있다.
《고사기》의 화이길사(와니키시[和邇吉師])와 《일본서기》의 왕인(와니[王仁])은 같은 사람인 듯한데, 그가 활동한 시기를 《고사기》는 근초고왕(346∼375)때라고 소개한 반면 《일본서기》는 아신왕(392∼405)·전지왕(405∼420) 때라고 하였다. 이에 《일본서기》를 더 신뢰하여 왕인이 일본열도로 건너간 시점을 5세기초로 이해하거나 두 기록을 절충해 근초고왕 때부터 아신왕 때에 걸친 시기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며, 두 기록을 모두 믿지 않고 왕인을 아예 6세기경의 인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일본에서는 각종 기록과 이야기를 통해 왕인이 경서(經書)에 통달했으며 왕과 신하들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고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치[河內]지역에 살면서 관청에서 기록하거나 문서를 다루는 일을 맡았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일본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높이 기려왔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그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 데다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논어와 천자문만 가져갔다는 점에 주목해 그의 학문 수준 내지 교육 내용의 수준이 그리 높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이 태어나 공부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와 함께 탄생지, 책굴, 나루터 등이 전하며, 일본에는 오사카[大阪]부에 속한 히라카타[枚方]시에 왕인의 무덤이 전한다. 그리고 오사카·큐슈지역에 각각 왕인을 기리는 신사(神社)가 세워져 있다. 모두 왕인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전설의 흔적일 개연성이 높다. 특히, 일본의 왕인신사들은 일제시기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추진·홍보하기 위해 새로 만들었다는 지적이 있다.
인용한 백과사전 내용을 요약정리하면, 아직기와 왕인은 둘 다 백제 근초고왕~아신왕 때의 인물인데 먼저 아직기가 일본 응신천황 15년(서기 404년)에 건너가서 왕인박사를 추천하였고 왕인박사는 응신천황 16년(서기 405년)에 황전별(荒田別) 등이 데리러 오자 천자문과 논어 등을 가지고 가서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연도계산법에 따르면 응신천황 15년은 서기 284년이고 응신천황 16년은 서기 285년이지만 이는 신뢰성이 없는 기록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일본서기』 응신기 16년조 기록에 아화왕이 사망하자 직지왕이 뒤를 잇게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신왕의 사망연도는 서기 405년이어서 두 기록의 연도가 크게 다르다. 이를 꿰맞추기 위해 등장한 것이 이른바 ‘『일본서기』 기록의 2주갑 인상설’이라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들은 2갑자를 과거로 끌어올려 기술한 것으로 보이므로 그만큼 연대를 후대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게 ‘2주갑 인상설’이다.
물론 『일본서기』의 연도를 120년 끌어내려도 합치되는 것은 거의 없다. 120년 끌어내려 연도를 꿰맞춰 보려고 애를 쓰다가는 오히려 갈수록 더 혼란스러워져 결국은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과거의 『일본서기』 연구자들 대부분이 어두운 미로를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은 임나일본부설 추종자처럼 변하고 말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왕인박사가 백제의 선진문물을 후진국인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식의 자부심으로만 충만한 연구자일수록 더 그러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일본서기』 응신기 15년~16년의 내용을 보면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은 각기 다른 인물이며 1년의 간격을 두고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다.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을 풀이해 보면 이 둘이 각각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름이 동일한 이름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 같은 이름으로 추측된다고?
-이들이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벌컥 화부터 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분도 계실 줄로 안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독자 여러분께서는 흥분하지 마시고 꼬일 대로 꼬여 있는 한일고대사의 매듭을 풀어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보아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려 읽어 주시기 바란다.
먼저, 아직기(阿直岐)라는 이름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阿直岐가 당시 사람들이 뭐라고 일컬었던 이름을 그렇게 표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의 “김알지(金閼智)”나 김유신의 누이 “아지(阿之)”, 그리고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의 이름 “어지지(於只支)”와 비슷한 이름이었을 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는 있다. 그러니까 [아즈지] 유사한 이름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음차하여 “阿直岐”라 적었을 거라 추측해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만약 훈차한다면? 훈차한다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차자표기는 내가 2천년 전의 표기자라 가정하고 그 표기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게 가장 좋다. 내가 과거의 표기자였다면 과연 어떠한 한자를 차용하여 어떻게 표기를 했을까?
한자 仁을 차용하고자 했을 수 있다. 仁은 ‘어질 인’자다. [어지]라 하는 말을 仁이란 한자로 훈차하여 표기하고자 했을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이 정도까지만 하고, 이제 ‘왕인(王仁)’이란 이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한국어로 왕(王)을 [검/kum]이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 대하여는 다른 글에서 몇 차례 설명한 바 있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의 검(儉)이 그러하고, 신라의 왕호 이사금(尼師今)에 쓰인 금(今) 역시 그러하다. 현대한국의 ‘임금’의 [금]이 바로 왕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일본어 ‘키미(君; きみ)’도 이와 같은 어원에서 분화된 말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왕인(王仁)은 당시 사람들이 [검+어지]라 일컬었던 이름을 차자한 표기로 추측된다는 얘기다. [검+어지]는 필자가 다른 글에서 설명한 바 있는 ‘가라왕 하지(荷知)’의 이름과 똑같다. 필자는 [감+지]라는 이름을 [가마+지]로 연진발음하여 “겸지(鉗知; 일본어로 鉗을 ‘카마’라 함)”라고도 적고, [가+모츠]라고 여겨 “하지(荷持; 일본어로 持를 ‘모츠’라 함)”라고도 적었는데, 후대의 제2차 혹은 제3차 표기자들이 하지(荷持)를 하지(荷知)로 잘못 적게 되었을 거라고 추측하였다.
그와 사실상 똑같은 이름이라 할 수 있는 [검+어지]를 王과 仁이란 한자로 차자하여 표기한 것이 ‘왕인(王仁)’이라는 얘기다. 물론 이름이 같다고 해서 이들이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감지, 가마지, 가모츠]는 가야국 제9대 겸지왕(鉗知王)이고, [검어지]는 가야국 마지막왕인 제10대 구형왕 때의 인물로 추측된다. 구형왕(仇衡王)은 구해(仇亥) 또는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했던 바, 일본무존(日本武尊)의 이름 ‘소대존(小碓尊; 코우스)’과 같고, 백제 제6대 ‘구수왕(仇首王)’과도 같으며, 『속일본기』에 나오는 ‘구소왕(久素王)’과도 같다. 종래의 연구자들은 『일본서기』에 보이는 ‘귀수왕(貴須王)’이 백제의 제6대 구수왕이나 제14대 근구수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는데, 필자는 잘못 짚은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일본서기』에 많이 등장하는 백제 ‘귀수왕(貴須王)’이 가야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고 아직기와 왕인박사는 바로 이 구형왕 때의 인물이며 가야국 구형왕이 이들을 큐슈지역에서 일본열도 중부지역으로 파견했을 거라고 본다. 그리고 그 도일(渡日)한 시기는 525년 무렵일 것으로 추측하며, 앞에서 말했듯이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은 서로 다른 2명의 인물이 아니라 동일한 인물 1명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종래의 연구자들이 주장해온 대로 왕인(王仁)박사의 도일시기를 서기 405년 무렵이라고 할 경우 곧바로 치명적인 약점에 맞닥뜨리게 되는 바, 그가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천자문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때에 천자문을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천자문이 만들어진 것은 양(梁) 무제(武帝) 때 주흥사(周興嗣)란 사람에 의해서인데, 양무제의 재위연대는 502~549년이고, 주흥사의 생몰연대는 470~521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쉽게 말해, 천자문이 만들어진 것은 서기 502~521년 사이로 추정된다는 말이다. 북위의 종요(鍾繇)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신빙성이 거의 없는 주장이라 보아 이 글에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천자문이 만들어진 것은 500년대 초반인데 그 책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왕인박사가 일본에 가져가서 전해주었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삼척동자들도 비웃을 수밖에 없는 헛된 주장이다. 그러한 견해는 견해라 할 수도 없고, 그러한 주장은 주장이라고 할 수도 없다. 주장이 아니라 억지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말도 안되는 그 주장을 굳건하게(?) 펼쳐내는 사람들이 있다.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도 더러 있을 것이다.
천자문은 양무제 때에 주흥사란 사람에 의해 502년~521년에 만들어졌고, 그것을 일본에 전해준 왕인박사는 백제 근초고왕 때의 인물이 아니라 가야국 구형왕 때의 인물이라는 것. 왕인박사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는 가야국 구형왕 때인 525년 무렵으로 추측되며, 한반도 백제에서 건너간 것이 아니라 큐슈 혹은 서일본 지역에서 열도 중동부 지역으로 건너간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 파견한 사람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아니라 가야국의 구형왕이라는 것. 이것이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이다.
그리고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은 사실상 이름이 똑같다고 할 수 있는 바, 이들을 전혀 다른 2명의 인물인 것처럼 기술해 놓은 『일본서기』 응신기는 후대의 편찬자들이 동일인이란 사실을 모른 채 저지른 실수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글의 핵심요지이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